1.
서구 국가들을 보며 느끼는 이율배반이 있다. 유학 시절, 학부를 갓 졸업한 영국아이가 자긴 졸업하자마자 르완다로 가서 1년 자원봉사를 한다며 ‘정의롭게’ 말했다. 참 좋은 일이라 감탄하고 있는데, 그 아이가 문득 내게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일본도 잘사는데 아프리카도 좀 돕고 그래야지.”
내가 웃으면서 나는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 대답했다. 그 아이가 어색해하며 얼버무린다. “한국도 잘 살잖아. 아프리카와 제 3세계에서 자원봉사도 좀 해도 되잖아.”
그 말에 내가 그 아이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말했다.
“한국인은 아프리카에 빚진 거 없어. 하지만 영국인은 있어. 우린 식민지 만든 적 없거든. 아프리카에서 훔쳐온 덕에 니들은 잘 살아서, 대학 학비도 거의 무료인 복지도 받고 사해동포를 외칠만한 여유도 있는 건데, 이제 궤짝 채로 훔쳐온 아프리카에 가서 동전 한 잎 떨궈주는 거라는 생각은 안들어? 그렇게 거룩하고 정의롭게 가지 말고 가서 빚 갚는다고 생각하고 아프리카 인들을 위해 일해주길 바래.”
이런 말을 처음 들어보는지, 그 아이와 다른 유럽 아이들이 눈을 휘둥그래 뜨고 날 쳐다봤다.
그런 거 말이다. 서구 사회에서 드높이는 정신 문명 – 코스모폴리타니즘, 포스트마던, 그리고 드높은 윤리 의식, 그게 전부 역설적으로 착취를 통해 축적한 부로 가능했다는 사실을 보며, 참으로 씁쓸하다.
2.
과거 전쟁은 주변 국가가 중심 국가에게서 강제로 물질적·정신적 산물을 받아오는 수단으로 활용될 때가 있었다. 유럽 연합 십자군이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이슬람으로 쳐들어갔고, 청이 명으로 쳐들어갈 때가 그 역사이다.
그러나 현대에서 이 이론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전쟁은 강대국들이 패권 유지를 위해 일으킨다. 그리고 이후 일어나는 내전은 강대국 패권 유지를 위한 내부 분열 정책의 산물이다. 한국이 그렇게 둘로 찢겼고, 르완다가 그렇게 인종청소 학살을 자행했고, 보스니아가 피투성이가 되었고, 이제 시리아가 울부짖고 있다.
시리아를 위해 테러를 저질렀다는 이슬람 청년들, 그게 해결책이 안된다는 걸 모르는 무지한 짓이었다. 서구 사회가 들이댈 윤리적 기준을 벗어나서 호소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는 판에서 우리는 사니까.
윤리적일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 똘레랑스를 외칠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를, 높은 정신적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를, 지난 세기까지 악랄한 착취를 통해 그리고 현대의 패권 전쟁을 통해 얻은 서구 사회의 그 대단한 윤리 가치에 우리는 감복한다, 아니 감복해 엎드러지는 수 밖에 없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러는 아닌 거다. 씁쓸하다.
테러를 비난하는 손길은, 세계 패권을 두고 제3세계의 살과 피를 찢은 서구 국가들에게도 가야 한다.
원문: Joyce Park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