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공학, 연구와 개발은 바늘과 실처럼 같이 붙어다니면서 쓰인다. 이공계라고 쓰고, R&D라고 쓴다. 한꺼번에 안 쓰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붙여서 쓰곤 한다. 하지만 일반인, 심지어 이쪽에 몸담은 사람들도 그 의미를 대~충 넘겨짚어서 오해가 좀 있다. 그래서 쓴다. 먼저 과학과 공학이다.
과학과 공학, 어떤 관계일까?
뭐, 우리나라의 많은 단어가 그렇지만 이쪽 용어라는 것이 일본이나 중국을 거쳐서 정착된 것이 수두룩 빽빽이다. Science를 과학이라고, Engineering을 공학이라고 쓴 옆나라 때문에 우리도 그냥 별 생각없이 그렇게 써 왔던 것 같은데, 어원을 쬐끔 파고들어 보자.
Science는 가위(scissors)와 어원이 같다. ‘자르다,’ ‘나누다,’ ‘분리하다’에서 앎(to know)으로 연결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마찬가지로 ‘나누다’라는 뜻을 내포한 회의문자 ‘科’와 배움(Study)을 뜻하는 學이 연결된 단어 과학(科學)은 Science를 큰 왜곡 없이 담아낸 한자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과학이라는 말이 Science와 별개로 만들어져 쓰인 말이라면 동서양이 ‘앎’이라는 것을 근본적으로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과학은 큰 것을 쪼개고(그 자체로 이해가 안 가니까) 그것을 배워서 결국 어떤 것을 아는 것이다. 현대의 과학은 이를 굉장히 체계적인 방식으로 일반화하고 있다. 과학은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로부터 알 수 있듯이 ‘탑다운(Top down)’을 내포하고 있다. 어떤 큰 것을 이해하기 위해 그것을 이루는 작은 부분으로 나눠 배우고, 그렇게 알아낸 지식을 공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결국 무엇인가를 총체적으로 알아가는 것이다.
Engineering은 엔진(Engine)에서 온 말이다. 이 Engine이라는 말은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라틴어 ingenium에 이르는데, 이 말은 in + genium(천재를 뜻하는 genius)으로 비범하도록 하는 것이다. 조금 더 나가서 genium이라는 말은 gen, 즉 만들어내는 것(generate을 생각하자)과 연관된다. 동양에서 工이 장인을 뜻하고, 장인의 匠이 도끼로 상자를 ‘만드는’ 것에서 나온 회의문자임을 생각할 때, 역시 한자나 영어나 ‘만듦’을 뜻한다는 것에 있어서 사고의 일치를 엿볼 수 있다.
만든다는 것은 기존에 있던 것을 변형·가공·융합하는 것이다. 그냥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 만든 것보다 더 ‘비범’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일반인이 만드는 것과 장인이 만드는 것의 차이도 ‘비범함’의 유무에서 나온다. 여기에 ‘학(學)’을 붙인 것은 그렇게 하는 방법, 즉 더 나은 방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또는 더 나은 방법을 찾을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예전에는 기술을 전수받는 것으로 족했지만 이제는 단순히 기술 뿐 아니라 변형·가공·융합하는 방법론과 무엇인가 만들어내기 위해 필요한 근본적 지식까지 배운다.
과학은 왜, 공학은 어떻게
과학과 공학의 어원을 톺다보니, 우리는 과학과 공학의 근본적인 차이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과학은 배워서 알아내는 것이다. 각 분야별 지식을 쌓고, 쌓아놓은 지식 사이의 관계를 규명해 자연을, 자연의 규칙/법칙을 알아내는 것이다. 공학은 더 낫게 만드는 것이다. 더 적은 자원으로 더 높은 효율과 편의를 만든다. 과학은 자연을 배우고, 공학은 자연을 이용한다. 이 둘은 배워야(또는 연구해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도 아주 존내 열심히. 어떤 사람은 평생을 바치기도 한다. 하지만 배우는 목적이 다르다.
과학은 인간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족하다. 왜(Why)에 대한 답을 얻어가는 과정이다. 호기심이 과학의 자양분이다. 초파리의 섹스 시간을 탐구한다. 이걸 연구하면 뭐가 생겨서? 그냥 궁금한 거다. 궁금함을 체계적인 방법을 이용해서 알아내는 것이다. 그걸로 족하다. 누군가에게는 얼빠져 보이는 이런 연구를 하는데 자원이 든다. 그것도 연구 주제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어마어마한 리소스가 든다. 연구실과 연구 기자재가 필요하고, 값비싼 책/논문도 봐야 한다.
뭔가가 왜 그런지 궁금해 미치겠는 ‘과학자’에겐 무엇보다 중요한 시간이라는 자원도 소모된다. 그걸 다른 곳에 쓰면 더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궁금한 것을 어쩌나? 알고 싶은 것을 어쩌나? 그래서 자원을 줄 수 있는 곳(자원을 어디에 쓰는 것이 좋을지 고려해야 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이걸 연구하면 이러저러한 것을 할 수 있다’고 구라를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쓰기 싫은 제안서를 쓰고 펀딩을 한다. 탁 터놓고 말해서 한량이다. 만드는 것 없이 리소스를 쓰기만 하는 곳이다.
공학은 더 낫게 만들어야만 한다. 엔지니어링은 디자인하고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미 있는 것을 다시 디자인 한다. 재료를 바꾸고, 구조를 바꾸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바꾼다. 목적은 하나다. 더 적은 자원으로 더 훌륭한 걸 만드는 것이다. 과학과 마찬가지로 자원을 쓰지만 그렇게 나온 결과물은 자원을 만들어내는 효과를 낸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실패다. 그래서 재료를 공부하고, 구조를 바꿔보고, 디자인을 수정한다. 공학은 어떻게(How)의 답을 얻어가는 과정이다. 어떻게 더 나아질 수 있을까 연구하고 개발한다.
과학과 공학, 서로의 도움을 받는
세탁기는 더 적은 물과 세제와 전기를 써서 더 많은 빨래를 더 빨리, 그리고 깨끗하게 해야 한다. 자동차는 사람이나 짐을 더 적은 연료로 더 많은 거리를 더 안전하고 편하게 옮겨야 한다. 공학은 누구에게나 피부로 와닿는 ‘효용’이 있다. 이런 효용을 만들기 위해서 공학은 과학의 힘을 빌린다. 과학자들이 이미 밝혀 놓은 수많은 ‘왜’에 대한 해답을 이용한다. 공학은 과학적으로 규명된 법칙을 이용하고 응용한다. 그 과정에서 공학의 결과물을 이용하기도 한다.
사물의 위치를 높은 정밀도로 파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GPS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이용하는 한편 인공위성 기술을 사용한다. 에너지를 얻기 위한 원자력발전 역시 아인슈타인의 E=mc^2 라는 아름다운(?) 공식에서 시작해 건설기술과 제어공학으로 완성했다. PDP는 플라즈마 현상을 이용하고 LCD는 액체 결정 구조의 연구 결과로부터 나왔다. 오늘날의 복잡한 무선통신은 퓨리에로 대표되는 여러 수학자의 공이 컸고, 그것을 빠르게 계산해주는 반도체 프로세서의 설계와 공정기술의 도움을 받았다.
물리/화학 분야에서 규명한 다양한 원소의 특성을 몰랐다면 우리는 전구나 다름없는 진공관을 쓰는, 컴퓨터를 쓰기 위해 발전기와 냉각기를 같이 돌려야 하는 집채만 한 컴퓨터를 써야 했을지도 모른다. 공기역학의 도움으로 더 빠르고 안전한 탈것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바탕으로 만든다. MRI는 자기공명현상의 연구 결과를 이용해 방사능을 이용하지 않고도 인체 내부를 X-ray나 CT보다 더 선명하게 찍는다.
광학과 재료과학의 발달과 정밀 가공 기술로 우리는 먼 곳과 작은 것을 관찰한다. 삼투압 현상으로 정수를 하고, 도플러 효과는 각종 탐지장치에 쓰인다. 프랙탈 구조를 안테나에 적용하고, 2D/3D 영상에서 다양한 렌더링에 쓰기도 한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과학과 기존 공학의 결과물 도움 없이 만들어진 것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그럼 공학은 과학의 도움을 받기만 하느냐 하면 또 그게 아니다. 과학은 공학으로부터 엄청난 도움을 받고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다.
의약학 분야에서 MRI나 fMRI(그전에 X-ray나 CT)의 성능 개선(촬영 시간 단축, 해상도 증가, 소형화, 단층촬영 결과의 3D합성 등)은 과거 이런 장비들이 없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데이터를 뽑아 인간의 생리현상을 세포수준에서 알아볼 수 있게 해 준다. 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천체망원경으로 우주를 더 잘 관찰하고, 원자 수준의 관찰을 가능하게 하는 전자현미경의 발달로 물리·화학 연구도 분과가 더 작게 갈라져서 이해의 수준을 높인다.
예술 수준의 정밀도를 자랑하는 대규모 공사와 정밀 센서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강입자충돌기는 이전에는 이론으로만 존재할 것이라 예측했던 입자를 규명할 수 있도록 돕고, GPS 기술은 실험 결과가 믿을만한지 검증하는데도 쓰이고 있다. 컴퓨터공학과 소프트웨어공학의 그야말로 눈부신 발전은 몇 년 전에는 꿈도 꾸지 못할 대용량 데이터를 빠르게 분석해서 과학자의 연구를 촉진하고 있다.
몇 개월씩 걸리던 유전자 분석은 이제 분석 목적에 따라 단 몇 시간이면 결과를 받아볼 수 있게 되었다. 테라바이트 단위의 로그 분석이 슈퍼컴퓨터의 도움 없이도 몇십 분이면 끝난다. 기후학자는 전 세계 온습도, 풍향, 풍속, 기압의 측정 결과를 대규모 병렬 컴퓨팅을 이용해서 분석하고 시뮬레이션 해서 지구 규모의 기후 변화를 연구한다.
희미해지는 경계: 무엇을 위해 연구하는가
과학과 공학은 한 범주로 묶어서 비슷하게 취급하곤 하지만 분명히 다르다. 목적 자체가 다르고 임하는 자세가 다르다. 하지만 그 경계는 서서히 희미해지고 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경계는 급속히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 그것도 공학이 주도권을 쥐고.
공학으로 충분했던 기업의 연구실은 더 나은 디자인을 위해 기꺼이 필요한 의문(만)을 던지고 그 의문을 자체적으로 해결한다.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는 곳이다 보니 연구결과가 외부에 잘 공개되지 않고 의문 해소보다 실용주의에 입각할 때가 많다. 과학으로 충분했던 아카데미는 궁금해서가 아니라 사회가 필요로 하는 연구를 한다.
궁금해서 연구한다는 사람에게 자원을 잘 배분하지 않는다. 체모의 특성이 궁금해서 연구하겠다는 사람에게는 연구비를 주지 않아도 발모제나 제모제를 연구하겠다고 하면 얘기가 달라지는 식이다. 연구의 목적이 궁금함의 해소에 있지 않고 연구 주제의 목표 달성에 있다보니 성과가 없으면 쉽게 자원을 끊어버리는 일이 다반사다. 이에는 자원을 끊는 권한이 과학에 무지하거나 관심이 없는 이에게 있는 것도 문제이다.
인류는 호기심을 바탕으로 문명을 이뤘다. 연구 결과가 어디에 쓰일지 고민하지 않고, 그저 궁금하기 때문에 지적 호기심을 꾸준히 발산 또는 수렴하여 해소시킨 ‘과학자’라고 불리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들이 연구 결과를 기꺼이 공유하고 과시(?)하였기에 이를 바탕으로 공학 기술의 한계를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여 극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작금의 특허 전쟁도 그렇고 기업의 권한과 권력이 커져가는 모습도 그렇고… 필요한 것(이라고 쓰고 돈이 되는 것이라고 읽는다)에만 집중하는 모습이 걱정이 좀 된달까. 거기다 모 기업 CTO였던 분이 “과학에서 알 것은 거의 다 알았다”면서 “지금은 필요를 만들어 팔아야 하는 시대고 이런 ‘발상의 전환’을 통해 아직도 공학하는 사람이 할 일은 많다”고 주장하는 모습에서 절망감과 회의감을 느꼈다.
공학과 과학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연결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보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윤의 추구만을 목적으로 한 공학의 발전이 과학에 필요한 호기심과 잉여력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 보여서 매우 낙천적인 나도 지구의 미래가 좀 걱정스럽기 시작한다.
〈윌-E(Wall-E)〉라는 픽사의 애니메이션이 보여준 황폐화된 지구의 모습과 우주선의 비만 남녀들의 모습은 참으로 흥미로웠다. 애플을 상징하는 기업이 추구했던 기술 발전의 끝을 애플이 만든 것이 분명해 보이는 로봇을 주인공으로 하여 보여준 것이 말이다.
개인적으로 필요를 만들고 욕구를 자극하여 기업 이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살고 싶지 않다. 주변에도 과학에 발을 담근 사람이 정신적으로 힘들어하고 아노미 상태에 자주 빠지는 것을 본다. 당장 내 가장 친한 친구도 과학자의 길을 버렸고, 온라인 지인은 심심하면 멘붕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 과학자를 ‘이공계’로 엮어서 실용을 내세워 호기심을 죽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 공학에 몸담고 있는 사람은 아주 가끔이라도 조금 떨어져서 큰 그림을 봤으면 좋겠다.
- 이공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조금 이기적이었으면 좋겠다.
- 인문학이 어쩌고 말이 많은데 현대인은 이공학에도 관심을 좀 더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공학 베이스 + 인문학은 무기도 되고 방패도 되지만 이공학 베이스 없이 인문학만 떠드는 것은 속빈 강정에 빛좋은 개살구란 생각.
- 당장 쓸모 없어 보이는 것이 항상 쓸모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역사를 보면 안다.
- 잉여력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