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상 뒤의 가로 8인치, 세로 5인치인 오렌지와 크림색의 색인 카드 상자(이베이에서 산 벨로스 85 제품) 곁에는 작은 검은색 공책 세 권이 쌓여 있다. 이 공책에는 아이디어나 글귀 같은 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 끼적여두었다. 아마 다시 읽을 일은 절대로 없을 텐데도 보관하고 있다(다시 읽는다고 해도 무슨 말을 썼는지 알아보지도 못하겠지만).
그 공책은 물론 몰스킨Moleskine이다. 그렇게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공책은 몰스킨 외에 거의 없다. 작고 검은 몰스킨은 거의 종교적인 열광을 불러일으킨다. 그런가 하면 허세의 상징으로 조롱받기도 한다. 전 세계 어느 도시에나 있는 똑같이 생긴 유명 커피숍에 앉아 있으면서도 자신이 독창적인 사람임을 과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허세적 소도구라는 것이다. 작고 검은 몰스킨이나 희고 납작한 맥북 같은 것들.” (문구의 모험, 제임스 에드위드 지음, 김병화 옮김, 어크로스 펴냄, 2015년, 89쪽)
혹시 지금 당신은 스타벅스에 앉아 몰스킨 노트를 펼쳐두고 맥북으로 이 글을 읽고 있지는 않은가? 제임스 워드가 ‘문구의 모험’에서 서술한 이 대목을 보면 이는 세상 어디에나 낯설지 않은 풍경인 것 같다.
내게도 몰스킨 노트가 있다.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먹고 한 권 구입했다. 2만 원이 넘는, 노트치고는 비싼 가격이지만 검은색 표지의 하드커버와 노트가 벌어지지 않게 고정해주는 고무줄 덕분에 노트를 배낭 안에 아무렇게나 넣어도 ‘작품’(?)을 보호할 것으로 기대했다.
실제로 그랬다. 작품 보호 기능은 배낭 안에서만이 아니라 어지러운 책상 위에서도 일어났다. 아무 종이에나 그리면 없어지기 쉬운 낙서 수준의 그림이지만 일단 몰스킨 안에 가둬 두면 사라지지 않는다. 몰스킨 노트는 다 써도 함부로 버리지는 않는다.
노트가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가끔은 우쭐한 느낌도 들었다. 몰스킨으로 작업한 위대한 작가들이 많다고 하지 않은가! 빈센트 반 고흐, 파블로 피카소, 어네스트 헤밍웨이, 브루스 채트윈 등 거장들이 쓰던 노트라고 했다.
그런데 엄밀하게 따지면 이게 사실이 아니라고. 우리가 문구점에서 살 수 있는 ‘몰스킨Moleskine’이라는 상표의 노트가 처음 판매되기 시작한 것은 1997년이다. 위에 열거한 인물 중 가장 최근까지 살았던 채트윈 조차 1989년 사망했으니, 이들이 이 상표의 노트를 쓸 수 없었다.
사연은 이렇다. ‘몰스킨’이라는 단어가 유명해진 것은 ‘송라인’, ‘파타고니아’ 등으로 유명한 기행문의 거장 브루스 채트윈이 그의 작품에 자신이 좋아하던 “기름 먹인 검은 천 제본” 노트를 묘사하면서부터이다moleskin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표면이 부드럽고 질긴 면직물”이라는 뜻) 그는 1986년 오스트레일리아로 여행을 떠나기 직전 파리의 단골 문구점에 노트를 사러 갔는데, 몰스킨 노트 공급이 줄어들 거라는 얘기를 듣고 100권을 주문했다. 그런데 노트를 받으러 갔더니 몰스킨 노트를 만들던 제조업자가 죽어 더는 몰스킨 노트를 살 수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게 잊혀 있던 채트윈의 ‘몰스킨 사랑’은 1997년 이탈리아의 한 노트 제조업체가 ‘몰스킨Moleskine’을 브랜드화하면서 부활했다. 그들은 브루스 채트윈의 스토리를 전면에 내세우는 동시에 고흐, 피카소, 헤밍웨이까지 끌어들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상속자이자 계승자”라고 밝히고 있다. 결국, 이렇게 표지를 제본한 노트는 모두 ‘몰스킨 노트’, 그러니까 일반 명사다. 채트윈 등이 이런 형태의 노트를 사용한 것이지 현재의 몰스킨 상표의 제품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마케팅의 힘이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
‘문구의 모험’은 볼펜, 지우개, 풀, 노트, 클립과 같은 문구들에 대한 역사서이다.
1941년 미국에서 출시된 파커의 ‘파커51’은 구입하기 위해서는 예약을 해야 했다. 잉크 색깔도 ‘인디아 블랙’, ‘튀니스 블루’, 차이나 레드’, ‘팬아메리칸 그린’ 등 다양해졌다. 1945년 최초의 볼펜(레이놀즈 인터내셔널 펜)이 출시될 때 이 펜의 가격은 현재 시세로 17만 원이나 됐고, 고장 날 경우 환불이 가능한 2년 기간의 보증서를 끼워줬다. 출시일에는 상점 앞에 5,000명이 줄을 서는 풍경도 생겼다. 데자뷔 같지 않은가? 21세기, 아이폰은 ‘샴페인 골드’, ‘로즈 골드’ 같은 색상을 내놓고 있으며, 출시일에는 사람들이 애플샵 앞에 길게 줄을 선다.
디지털 시대는 많은 풍경을 바꾸어 놓았다. 사람들은 더는 신문을 보지 않으며, 종이 책을 읽는 사람도 줄어들고 있다. 글은 펜이 아니라 PC나 노트북, 스마트폰으로 쓰는 장르가 돼버렸다. 심지어 펜글씨도 태블릿의 스타일러스로 구현되는 세상이다. 우리의 책상, 주머니, 가방 안에는 여전히 크고 작은 문구들은 멸종의 운명을 맞이할까? 저자는 이렇게 답하고 있다.
“이메일 사용도가 점점 높아지는데도 만년필 판매량이 매년 줄어드는 대신 늘어난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만년필 판매량이 안정적인 것(이따금 급격히 치솟는 상황은 물론)은 이상해 보인다. 그러나 글을 적을 일은 항상 있을 것이고 그럴 일이 줄어들기는 해도 그 기회는 더욱 소중히 여겨지게 된다.”
참, 몰스킨 이야기 한 가지 더. SG캐피털이라는 큰 회사에서 몰스킨을 부활시킨 ‘모도 앤드 모도’를 인수하며 제품 포장에 “중국에서 인쇄되고 제본됨”이라는 문구를 추가하자 예전 생산 버전 몰스킨 노트 사재기 현상이 일어났다고 한다. 사실 처음부터 몰스킨의 제조지는 중국이었는데 사람들은 품질이 더 나빠졌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것.
하지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중국산이면 무조건 저급품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중국은 종이가 처음 만들어진 곳이고 오랫동안 세계의 제지 산업을 이끌어온 곳이다. 참 아이러니하다.”
원문: 북클라우드 / 글: 김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