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인 것이 처벌받는 세상
최근에 드라마 <송곳>을 재미있게 보고 있다. 그 드라마에서 인상 깊은 대사가 나왔다. 보통인 것이 처벌받는 세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보통인 것이 처벌받는 세상이란 다른 말로 하면 그냥 사는 것은 죄가 되는 세상이라는 말이다. 사는 것에도 허가와 권리증 취득이 필요하다. 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그냥 사는 것은 죄인가. 왜 보통인 것은 처벌 받는가.
여기에는 적어도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종교서적이 있다. 바가바드기타가 있고, 도덕경이 있고 성경이 있으며 금강경이 있다. 이 책들을 읽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이 책들의 내용을 생각해 보자. 나는 때로 만약 2-3세기 후의 인류가 전혀 다른 세상을 살게 된다면 20세기나 21세기의 인간들은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었다 하리란 생각을 한다. 왜냐면 내가 앞에서 거론한 성서들의 ‘성스러운 존재’의 자리에 다른 단어 하나를 집어 넣으면 요즘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메세지들과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 단어는 ‘경쟁’이다. 우리는 경쟁이라는 신을 가진 종교를 믿고 있다. 그냥 사는 것이 죄가 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런 종교를 숭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쟁이 천지를 창조하고 모든 것의 바탕에 있으며 모든 것의 어머니라고 믿는다. 경쟁 없이는 망한다고 생각한다. 그냥 사는 것은 경쟁 없이 산다는 것처럼 들린다. 그건 이교도의 메세지다. 사는 것은 원죄라 경쟁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 이 종교에는 이름도 있다. 그건 ‘자유주의’다. 자유주의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혹은 경쟁이라는 신이 세상의 선을 구현한다고 말한다. 아니 통상 그렇게 이해된다.
그런데 일찍이 자유시장이란 존재한 적이 없다고 『거대한 전환』에서 칼 폴라니는 논박한 적이 있다. 그는 자유주의의 아버지들이 활동한 시기는 특정한 국가의 특이한 시기였다고 지적한다. 당시 영국은 지나치리만큼 노력한 것에 대해 보상을 안 해주고 있었다. 하향평준의 절대적 평등주의 배급제가 실시되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차등적으로 보상해주는 시스템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자유시장과 경쟁은 강조됐다.
경쟁이라는 신에 대한 숭배
그런데 우리는 그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다. 경쟁을 모든 것에 대한 처방으로 생각한다. 이런 사고 방식에서 그냥 사는 것, 보통인 것은 자연선택의 원리에 의해 사라져야 하는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서로 밀치고 싸워 이겨 살아남는 것이 선이며, 그렇지 못한 것은 악이 된다.
사실 자연 선택이 자연의 법칙이듯 경쟁이 좋은 것을 골라내는 자연스럽고 유일한 과정이라는 생각은 잘못됐다. 어른이란 반드시 아이가 진화하고 발전한 형태가 아니며, 반드시 더 좋은 존재일 이유가 없다. 좋고 나쁜 것에는 절대적 기준이 없다. 좋고 나쁜 것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사회적인 테두리와 문맥을 설정해야 논할 수 있는데, 절대적인 테두리와 문맥이란 없기 때문이다. 경쟁이라는 말이 뭘 의미하는지 많은 사람들은 생생히 느끼지만, 경쟁이란 규칙에 대한 것이며 현실에서 경쟁의 규칙이 뭔지, 규칙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왜 꼭 그래야 하는지는 무한히 확실한 것이 아니다. 경쟁이라는 신적 존재도 도나 신처럼 신비적인 데가 있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나도 경쟁이 성스럽다는 메세지에 중독되어 있다. 우리는 사랑도 경쟁이라는 말에 익숙하다. 1등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규칙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세상에서 행복이란 경쟁에 이긴 상태로 정의된다. 경쟁은 만병통치약이다. 세상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하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그럼 경쟁을 더욱 강화하면 해결되겠군요.” 특히 자기 자신이 그 경쟁에 끼어들 필요가 없을 때 그렇다. 사장이나 정부의 고위관리같은 사람들은 탁자에 앉아서 “세상이 이렇게 문제가 많은 것은 경쟁이 너무 적은 때문입니다. 경쟁을 더 키웁시다” 라고 서로에게 말한다.
국민이 행복하면 경쟁이 적어질 테니까 국민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된다. 경쟁은 모든 것의 해결책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에 반박하지 못한다. 경쟁을 키웠는데도 문제가 더 나빠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더더욱 강력하게 경쟁을 키워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 아멘!
그러나 사실 경쟁이란 필요악일뿐, 이렇게 모든 것의 근원에 있으면서 그것 없이는 우리를 당장 망하게 하는 성스런 존재가 아니다. 그럼 대화도 경쟁일까? 경쟁이 없이 우리가 망한다면 그 반대인 협동 없이도 우리는 망한다. 그냥 사는 것은 죄가 아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이 원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한 첫 번째 걸음은 우리가 어떤 종교적 믿음에 빠져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경쟁의 힘에는 한계가 있다.
그냥 산다는 건 남들과 다르게 산다는 것: 우리의 편협함에 대하여
우리가 그냥 사는 것이 안되는 두번째 이유는 ‘그냥 산다’는 말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여기 여자의 외모에 미친 듯이 집착하는 나라가 있다고 하자. 그래서 그 나라에서는 몸매가 나쁘거나 눈이 작거나 피부가 나쁘면 아예 ‘도덕적인’ 비난을 받는다. 여자가 저게 뭐냐고, 저런 모습을 하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범죄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더 예쁜 여자는 여신처럼 대우 받고 덜 예쁜 여자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다.
그런 나라에서 한 여자가 말했다고 하자. 나는 여신처럼 아름답지 않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평범한 내 모습을 가지고 그냥 살고 싶다. 이 가상의 나라에서, 정말 가상의 나라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여자는 ‘그냥 살고 싶다’는 이유로 비판 당하고 차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게 옳을까?
아름답지 못한 것은 죄가 아니다. 게다가 이 여자가 그냥 살고 싶다고 말할 때 그것은 모든 것에 대해 포기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나의 가치를 찾아서 ‘다르게’ 살겠다는 의미다. 이쪽의 입장에서 보면 아름답다는 가치, 그것도 획일화된 기준 하에서, 그것에만 미친듯이 몰두하는 세상이 오히려 미친 것 같다.
요컨대 우리가 그냥 살아서는 안 되는 두 번째 이유는 다양한 가치를 수용하지 못하는 우리의 정신적 편협함이다. 아름다움이란 가치에 중독된 사람이 조금 덜 예쁜 여자를 차별하고 비판하듯, 우리는 때로 어떤 가치에 중독되어 다른 사람을 너무 쉽게 비판한다. 돈이 없으면 차별당하고 비판받아야 할까? 학벌이 낮으면 차별받고 비판받아야 할까? 직위가 낮으면 차별받고 비판받아야 할까? 임대아파트에 살면 차별받아야 하나? 못생기면 차별받아야 하나? 지방에 살면 차별받아야 하나? 싼 차를 타면 차별받아야 하나? 유명하지 못하면 차별받아야 하나?
인간은 누구나 유한하다. 누구도 자신이 편견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가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때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편견에도 정도가 있다. 10평짜리 집에 살 때와 백 평짜리 집에 살 때 그 안에서 느끼는 부대끼는 정도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 사회가 가진 정신적인 넓이, 즉 다름에 대한 수용폭이 넓다면 사람들은 사회와 불화하지 않고도 자기의 자리를 찾아 자기 방식대로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그냥 사는 일은 너무도 쉽게 죄가 된다. 좁디 좁은 방에 수십 명이 들어있으면 숨쉬는 것도 죄다.
그냥 산다는 말은 대개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표를 나는 추구하지 않겠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꼭 게으름에 대한 것이 아니며, 의무에 대한 배신이 아니라 삶에 대한 권리다. 그 말은 다른 가치를 전혀 추구하지 않겠다거나, 나는 영원히 이렇게만 살겠다는 게 아니다.
요즘의 한국에서는 어쩌면 사람이 그냥 사는 것이야 말로 가장 고상한 행위일지 모른다. 그냥 사는 것이 죄가 되지 않고 적어도 이따금은 죄책감없이 그냥 살 수도 있는 나라를 꿈꾸는 것이 이 시대의 한국에서는 가장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과로사로 죽고 자살해서 죽고 있다. 불행해 하고 있다.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견딜 수가 없다. 그냥 사는 것은 죄가 아니다, 이 말이 필요한 사람이 너무 많다.
파괴된 공동체의 문제
앞에서 거론한 두 가지의 이유는 정신적인 것이었다. 모든 이유들은 서로 연결되어 서로 갈라질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가 그냥 살 수 없는 데에는 그보다 더 사회적이고 물리적인 이유도 있다. 그것은 우리가 뭘 원하면서 사는가 하는 문제와, 그것을 얻기 위해 어느 정도의 공동체가 필요한가 하는 문제, 그리고 그런 공동체들이 지금 어떻게 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사람이 물도 안 마시고 숨쉴 필요도 없고 옷도 필요 없이 마치 바위처럼 살 수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한다면, 사람이 그냥 사는 일이란 비교적 간단한 일일 것이다. 한 평의 땅만 마련한 후에 그냥 턱하니 주저앉으면 된다. 사람이 바위 같아도 한 평의 땅은 필요하다는 것이 씁쓸하지만 그건 핵심이 아니니까 넘어가도록 하자.
그러나 우리는 그것보다는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인간은 자신이 자각하고 있지 못할 뿐, 공동체 혹은 사회 안에서가 아니면 살 수 없다. 독방 안에서의 삶만 해도 먹을 거 주고 입을 거 주고 살 곳을 주는데도 인간에게 고문이 된다. 그리고 우리에게 어느 정도 크기의 공동체가 필요한가, 어떤 특징의 공동체가 필요한가 하는 것은 우리가 살기 위해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하는 문제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당신이 미네랄 워터가 아니면 마실 수 없고, 백화점을 매일 들락거리지 않으면 우울증에 빠지며, 비싼 옷과 자동차를 남에게 자랑하지 않으면 삶의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면, 당신의 아이는 최고의 학군에서 최고의 학원에 가야한다면, 당신은 그냥 살기가 참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현대의 한국인들은 종종 소비에 중독되어 있다.
한국 사람들 중에도 물론 겨우 먹고 사는 사람도 많지만, 그래도 우리들이 이 정도는 하고 살아야 사는 거라는 소비수준은 꽤 높다. 우리는 그냥 살 수 없다. 최소한의 행복을 위해 적어도 이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돌아가신 법정스님의 무소유의 메세지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욕심과 소유가 고통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데 필요한 것을 줄일 수 있으면 있을수록, 자급자족이 되면 될수록 우리는 그냥 살 수 있다. 자동차와 아파트 융자금과 아이들 학원비와 기타 사회적으로 체면을 지키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돈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적어도 그렇게 하는 데 한계가 있다. 더구나 소비수준이 높건 낮건 꿈을 꾸는 것은 자유다. 그러니 일단 이 부분에 있어서 할 만큼 했다고 하자. 그 다음 질문은 그런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공동체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공동체가 있다면 그 안에서 우리는 그냥 살 수가 있을 것이다. 비록 작고 유명하지 않은 마을이지만 그 마을이 당신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준다면 거기서 그냥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회의 삶을 시험해보고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이젠 그것이 지겨워졌다면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정신적인 두 가지 이유가 원인이겠지만 한국 사회는 여러가지 사회적 공동체를 파괴해 왔다. 이제 지방에 사는 건 죄고 가족이나 친척과 함께 사는 것은 죄고 한 지역에서 그 지역사람들과 함께 계속 사는 것도 죄다. 경쟁이라는 시스템은 그런 것들과 관련이 있는 공동체를 갈아서 없애는 맷돌 같다. 그런 사회 시스템은 종종 과거의 공동체를 억압이나 비참함과 함께 기억하게 한다.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한 틀에서 경쟁하는 사회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 그리고 대안이 없는 것은 슬픈 것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보통 땅값이 오르고 집값이 오르는 것을 행운이고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변화 속에서 우리의 이웃은 얼마간 곤란에 처한다. 우리가 그런 곤란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나만 부자가 되고 싶어하면 공동체는 망가진다. 우리 동네의 싸고 좋은 가게들은 가게세가 올라서 떠나가고 만다. 가난한 사람들은 재개발과 함께 정든 동네를 떠난다. 마을에는 아이들이 필요하다. 아이들이 지역의 단합과 활력의 뿌리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젊은 사람도 떠나고 아이들도 떠난다. 돈을 번 사람들이 멋진 주택단지를 만들어봐야 가보면 머리 허연 노인들만 모여서 재미가 없다. 도시는 광기에 차있고 시골은 쓸쓸하다. 천지를 둘러봐도 사람사는 것처럼 사는 곳이 없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있을 곳을 파괴당한다. 나는 정신적 넓이가 사람들이 있을 곳을 마련해 준다고 말했는데 물리적으로는 다양한 공동체가 존재하는것이 우리의 선택지를 넓혀준다. 너무 많은 공동체가 파괴된 한국은 마치 1당 독재를 하는 나라와 같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무한경쟁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그래서 모두들 하기 싫어하는 게임을 해야 한다. 무한 경쟁이 원칙이고 그냥 사는 것은 죄가 되는 게임이다. 한국 사람은 아파트가 좋아서 아파트에 사는게 아니다. 아파트가 아니면 대안이 없으니까 아파트에 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대안적 삶들을 파괴당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산다.
우리가 그냥 살기위한 행동수칙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우선 욕심과 소유를 줄이고 되도록 자급자족이 가능하고 기쁨을 주는 경우에는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되 그것이 남의 이야기의 반복이 되어서는 안된다. 귀농이 꼭 답이 아니다. 도시와 시골이란 상대적인 이야기다. 도시가 꼭 나쁠 것은 없다. 다만 뭘 주고 뭘 받는가에 대해 고민해야할 뿐이다.
나는 열린 자세라는 말을 싫어한다. 열린 자세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이다. 우리는 그냥 열린 자세를 취할 수 없다. 능력은 그냥 얻어지는게 아니라 고민과 배움에서 생긴다. 우리는 열린 자세를 달성해야 한다. 여러 사람들이 편안히 동거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다양성과 역사의 보존에도 좀 더 큰 가치를 줘야 한다. 그저 어떤 한가지 관점으로 모든 것을 다 쓸어버리고 다 똑같이 만들어 버리는 것은 우리의 삶을 고달프게 한다. 한국은 이미 굉장히 그렇게 변한 나라다.
물론 그냥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여러 사람의 공감이 필요한 문제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우선 우리의 믿음에 대해 점검해 봐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모든 것의 근원은 경쟁이며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경쟁이라고 생각하는 종교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원문: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