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홍, 우린 당신의 뇌 구조가 궁금해요!
옷걸이 디자인으로 유명한 염지홍씨가 영국 왕립예술학교 면접시험을 치를 때 들은 이야기다. 그는 남들이 하찮게 여기는 철제 옷걸이로 온갖 것을 만들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독서대를 시작으로 부채, 셀카봉, 테이블, 침대…
교수들은 그에게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이나 접근법이 다른 디자이너와 사뭇 다르다.”라고 했다. 그의 뇌 구조가 궁금해지는 이유다. 남다른 인생을 사는 패션디자이너 염지홍 씨의 이야기다. 교육부가 주관하고 직업 능력 개발원이 주최한 ‘별별 진로 콘서트’에 출연한 염지홍 씨는 자신의 직업을 열정(Passion) 디자이너라고 소개했다.
옷걸이 독서대로 세계의 시선을 사로잡다
“20살 때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퇴직으로 온 가족이 7평짜리 피자가게를 시작했다. 가게에서 책을 읽다가 조금 더 편하게 읽을 방법이 없을까 하는데 세탁소 옷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옷걸이에 옷을 걸듯 책을 올려놓고 냉장고에 걸어두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행착오 끝에 제법 유용한 독서대가 완성됐다.”
염 씨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옷걸이 독서대를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 만드는 방법을 유튜브(youtube)에 올렸다. 전 세계 사람들이 다양한 언어로 칭찬의 댓글을 달았다. 그는 일약 스타가 됐고 이어 ‘생활의 달인’이라는 방송 프로그램과 ‘스타킹’에 출연하는 기회를 얻었다.
“생활의 달인 프로그램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의아했다. 옷걸이 독서대가 알려진 지 이미 5~6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 감고 만들기인가요?’하고 물었더니 좀 더 크고 새로운 걸 만들라는 주문이었다. 막막했지만 나에겐 새로운 도전이자 기회였다”
천신만고 끝에 정사면체 12개로 이뤄진 제법 튼튼한 테이블이 완성됐다. 얼마 전에는 더 나아가 한 건축가의 제안으로 2천 개의 옷걸이로 파빌리온을 만들어 전시회도 열었다.
남과 다르게 살기: 심심한 시간이 필요해!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특별한 직업 없이 2년의 세월을 보냈다. 남들이 취업 준비를 하고 면접을 보러 다닐 때 새벽 6시부터 커피숍에 나와 신문을 읽고 노트북을 펼쳤다. 인상 깊은 기사가 있으면 스크랩을 하고 기자들에게 e-메일도 보내고 책도 읽었다. 그러면서 그에게 맞는 새로운 일이 무엇일까 계속 고민했다.
“어느 날 신문에서 서울시 청년 창업센터가 생긴다는 기사를 봤다. 공간과 돈도 준다기에 지원했는데 경쟁률이 2대 1밖에 안 됐다. 당시 교통안전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았다. 2년 동안 일하면서 만든 아이템이 바로 옐로카드다. 책가방에 걸어두면 자동차 불빛을 반사해 운전자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는 안전용품이다. 현재 2만 명 정도가 달고 다니고 있다”
메모의 힘… 9년 동안 쓴 41권의 노트
청중들도 그의 뇌 구조가 궁금했다. 도대체 그의 남다른 생각들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는 특별한 타이틀도 정식 직업도 없지만, 지금의 자신을 만든 저력은 그가 메모한 41권의 노트에 있다고 당당히 밝혔다.
“지난 9년 동안 매일 생각나는 단상들을 노트에 적었다. 하루 일기부터 밤사이에 꾼 꿈, 아이디어도 적고 책을 읽다 좋은 구절이 나오면 받아썼다. 강의 내용도 모두 저장돼있다. 그렇게 쓴 노트가 어느덧 41권이 됐다. 이젠 버리기 힘든 습관이 됐다. 2~3개월이면 1권을 다 쓴다. 이젠 노트를 사러 가는 게 하나의 의식이 됐다. 비닐을 뜯고 새 노트에 이름을 쓰는 것으로 새로운 한 기간이 시작된다.”
그는 출판사의 제안으로 자신의 노트 이야기를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꿈은 한 가지가 아니더라
청소년기 그의 꿈은 기자였다. 문제 해결을 취미로 삼았다. 학교의 불편 불만 사항을 교장한테 찾아가 해결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불편해하는 선생님들도 있었다. 대학 시절에는 별명이 염 사장이었다.
“가족이 운영하는 피자가게의 명함을 들고 다니며 교수들한테 인사를 다녔다. 피자를 만들고 배달하고 전단을 붙이면서 외식업계의 CEO가 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줄의 글귀가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머릿속의 상상을 현실로 끌어내는 것이 디자이너’라는 구절이다. 그때부터 자신을 열정 디자이너라고 브랜딩 했다. 도메인도 사고 로고도 만들고 월간 디자인을 정기구독하기도 했다. 그는 먼저 원하는 그릇을 만들고 차츰 그 안을 채워 나갔다.
세상 경험이 중요한 이유
그는 중2 때 국제결혼 한 이모를 찾아 혼자 집을 떠나 영국에 40일간 체류했던 경험이 있다. 이모부를 따라 펍(Pub)에서 짐 나르는 일을 도왔다.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격의 없이 대하는 그들의 문화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때의 경험과 지나온 자신의 이야기를 엮은 포트폴리오로 유명 디자인스쿨인 영국 왕립예술학교 석사과정에 당당히 입학했다.
면접에선 “런던의 응급의료체계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법을 말해보라’는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았다. 국가가 의료비를 전액 지원하는 영국에선 앰뷸런스 이용자의 60%가 그리 위급한 환자가 아니어서 비용이 낭비되고 꼭 필요한 환자가 제대로 서비스를 못 받고 있다고 했다. 그가 내놓은 해결책은 오토바이 앰뷸런스다.
“오토바이 앰뷸런스를 먼저 보내 체크를 한 뒤 꼭 필요한 경우에만 버스를 부른다. 만일 현장에서 치료할 수 있다면 데리고 오지 않아도 되고 교통체증이 심한 런던에서 빨리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라고 답했다. 피자 배달을 하면서 오토바이를 타 본 경험이 큰 역할을 했다. 염 씨는 이런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요즘 초중고등학교와 기업체에 강연을 나간다.
학교 밖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늘 학교와 학교 밖의 경계를 들락날락했다고 했다. 마크 트웨인의 말을 인용해 정규학교 교육만으로 공부가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고등학교 때 야간자율학습을 안 하겠다고 해 선생님께 숱하게 야단맞았다. 나는 그 시간에 영어학원엘 갔다. 아저씨들과 회화 수업을 듣는 게 좋았고 결국 대학 진학에도 도움이 됐다.”
그는 왕실 디자인 학교도 2학기만 마치고 중도에 돌아왔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보다 좌판을 벌여놓고 옷걸이 워크숍을 하고 여러 사람과 만나면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지역 도서관을 찾아가 도서관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독서대 보급운동도 펼쳤다.”
삶에 있어 중요한 요소는 물음표다. 왜 이렇지? 왜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지? 물음 자체가 권위를 깨는 것이다.
“ 사람뿐 아니라 사물에도 권위가 존재한다. 사물들을 내 마음대로 부수거나 꾸며도 되는데 겁을 먹는다. 원작자의 의도대로만 가면 그다음 것은 없다. 창조적 파괴란 말도 있지 않은가! 부숴보는 것 특히 내 방식대로 부수어 보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역설했다.
불확실한 미래에 너무 쫄지 말라
불확실한 미래는 누구에게나 두렵다. 그도 마찬가지라고 털어놓았다.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정기적인 수입도 없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실현하기 위해 제안서를 만들고 후원을 받으러 열심히 뛰어다녔다고 했다. 그는 석사 공부를 위해 70여 명으로부터 학비 5,500만 원을 모았다. 앞서 실행한 남극 탐사도 펀딩을 통해 2,000만 원을 모았다.
“단순히 도와달라고 것이 아니다. 제 경험을 함께 누리는 것이고 이를 통해 배워 온 일들을 세상에 널리 이롭게 쓰겠다는 것에 동참해주는 것이다.”
그는 “경쟁이라 생각지 말고 세상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이 연결점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라”고 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자기 시간을 컨트롤하고 자기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라고 했다.
안전지대에만 머물지 말았으면
자녀의 진로 때문에 고민하는 부모님을 향해 그는 부모님이 너무 가르치려 한다면 성공하지 못할 것 같다고 운을 뗐다.
“여기 부모님과 함께 토크 콘서트 현장에 온 게 좋은 일이긴 하지만 이보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밖에서 고군분투하는 애들이 더 크게 성공할지도 모른다. 안전지대에만 머물지 마라. 난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그 시간의 경험이 좋은 약이 됐다.”
만일 자기가 정의하는 성공을 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자신만의 지식의 지도를 그리라고 충고했다.
서점을 가고 도서관을 찾아라
“ 내겐 책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는 부모님이 계셨고 그래서 한 단계 한 단계 성취해가고 있다고 본다. 책을 많이 사는 것도 좋지만 책의 제목만 읽는 것도 방법이다. 도서관에 가면 전 세계의 지식이 분류기호에 따라 쫙 나열돼 있다. 책 제목을 훑다 보면 관심 있는 제목이 눈에 들어오고 꺼내 보고 싶어진다. 내가 무엇이 부족한지도 보인다. ”
그는 돈이 없어도 책을 산다고 했다. 어느 순간 만남 같은 책이 있는데 그때를 놓치면 그 한 줄 때문에 못 하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단호하게 꿈을 키우고 싶다면 이 강연이 끝나는 대로 당장 서점이나 도서관으로 달려가라고 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그는 “지난 9년의 노트를 정리하다 보면 자신의 또 다른 10년의 모습이 그려질 것”이라 대답했다. 그의 꿈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원문: 이로운넷 / 글: 백선기 / 사진: 이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