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산과 에루크산 4:1로 배합, 1992년 닉 놀테와 수잔 서랜던이 주연한 영화를 통해 널리 알려진 ‘로렌조 오일’입니다. 희귀난치성질환인 부신백질이영양증(ALD)에 걸린 아들을 살리기 위해 오도니 부부가 시행착오 끝에 개발한 후 지금까지 이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500㎖ 한 병에 19만 8,000원, 한 달 평균 4~5병을 복용해야 하기 때문에 오일값만 한 달에 100여만원이 듭니다. 다른 치료도 병행하면서 오일을 구매하는 것이 큰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안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은 매년 ALD환우 15명에게 로렌조 오일을 15병씩 지원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로렌조 오일을 구하고, 병과 싸워 나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세상에 없던 로렌조 오일을 개발한 오도니 부부의 마음으로 한국의 ALD 환자와 가족들에게 로렌조 오일을 소개하고 병을 이겨 나가는 가족들을 격려해주고 정보를 나누어주며 용기를 건네는 사람이 있습니다.
20년 넘게 병과 싸우고 있는 민석 씨의 어머니, 배순태 씨의 이야기입니다.
“도와주세요, 제발”
“아드님이 앓고 있는 병은 아주 희귀한 질환이에요. 고칠 수는 없지만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긴 한데요…”
의사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 배순태 씨는 그날 이후 지금까지 그 방법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평균 수명 2년이란 시간을 22년 넘게 늘려놓았습니다. 방법이란 바로 ‘로렌조 오일’이에요. 희귀난치성질환인 부신백질이영양증(ALD)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겐 생명줄과 같은 거죠.
지난 1월 중순, 부신백질이영양증모임 홈페이지 게시판에 “도와주세요, 제발”이란 제목의 글이 하나 올라왔습니다.
이 간절한 제목의 글을 쓴 사람은 올해 7살이 된 한 아이를 둔 어머니였습니다. 그녀는 아이가 ALD라는 확진을 받고 막막함과 두려움에 도움을 받고자 글을 올렸다고 합니다.
ALD는 몸 안에서 분해되지 못한 지방산이 뇌로 흘러들어 신경세포를 파괴하는 희귀병으로, 첫 증상이 나타난 이후 각종 신경에 이상이 생기면서 보통 2년만에 식물인간이 돼 사망하는 무서운 병이죠.
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인구 4만 5,000명 중 1명 꼴로 나타나는데, 주로 7세부터 10세의 유소년에서 발병한다는군요. 이 병은 환자 부모가 직접 치료약물을 개발한 실화를 다룬 영화 <로렌조 오일(Lorenzo’s Oil)>을 통해 널리 알려지면서 ‘로렌조 오일병’으로도 불리고 있지요.
간절한 요청에 답글이 하나 달렸습니다.
“부신 호르몬제를 잘 복용해야 하고, 로렌조 오일도 같이 복용하면 도움이 되리라 믿어봅니다. 이 아이와 같은 사례가 지금 우리 모임에 3명 정도 있는데,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잘 이겨내봐요. 우리.”
ALD의 유일한 생명의 끈, 로렌조 오일을 들여오다
아이 어머니의 손을 덥석 잡아준 사람은 ALD 부모 모임의 회장인 배순태(63) 씨입니다. 지금은 다른 ALD 환우를 도울 정도로 이 병의 전문가지만, 그도 처음에는 7살 아이를 둔 어머니와 같은 처지였습니다.
배씨는 1988년 첫째 아들을 하늘나라로 떠나보냈습니다. 당시에는 병명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 둘째 아들 민석(37) 씨가 ALD 진단을 받았습니다.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아이의 말수가 부쩍 적어져 사춘기인가 보다 했습니다. 하루는 종아리에 멍이 시퍼렇게 들어서 돌아왔기에 물었더니, 선생님이 아이가 질문에 대답하지 않자 반항한다고 생각하고 매를 든 겁니다.”
민석 씨는 증상이 전두엽에서부터 시작돼 말을 서서히 잃어 간 것이였습니다.
“제가 의사에게 도대체 무슨 병이냐고 묻자, 『뉴스위크』라는 잡지에 로렌조 오일이라는 영화에 대한 기사가 났는데, 그 병과 같은 병이라고 하더라고요. 『뉴스위크』를 사서 번역을 부탁해 읽고는 정말 하늘이 무너졌습니다. 그래도 로렌조 오일만이 살 길이라니, 이걸 꼭 먹여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의사에게 달라고 했더니 구할 수 없다는 겁니다.”
로렌조 오일이 막 연구를 시작한 터라 국내 수입허가가 나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담당 의사는 배씨에게 “의사인 나는 구할 수 없으니 어머니가 한번 구해보라”는 말을 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ALD병을 앓고 있는 아들을 둔 어머니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포기해도 저는 포기할 수 없는 이유죠. 저는 그 길로 로렌조 오일을 구할 방법을 수소문했습니다.”
배씨는 미국에 있는 친척의 도움으로 두 달여간의 승강이 끝에 1993년 3월 ALD의 유일한 치료제인 로렌조 오일을 한국에 들여왔습니다. 당시 로렌조 오일 500㎖ 한 병의 가격은 관세를 포함해 30만원이나 했어요.
배씨 부부는 국내 제약사에서 로렌조 오일을 판매하기 전까지 수 년간 개인 차원에서 들여오다, 오일에 붙는 관세가 부당하다고 여겨 관세청에 여러 차례 면제 신청을 요청한 끝에 ALD 치료제에 대한 관부가세 면제라는 성과를 얻어냈습니다.
로렌조오일 500㎖ 한 병에 19만 8,000원
이제 로렌조 오일은 국내 제약사를 통해 구할 수 있게 됐습니다. 문제는 500㎖ 한 병에 19만 8,000원에 이르는 비싼 가격입니다. 환자마다 차이는 있지만, 한 달 평균 4~5병을 복용해야 하기 때문에 오일값만 한 달에 100여만원이 듭니다. 오일이 이렇게 비싼 건 의약품이 아닌 특수식이제품으로 분류돼 국민건강보험의 지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라는군요.
배씨는 보건복지부에 오일 비용에 대한 보험 적용을 수 차례 건의했지만, 환자수가 적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수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나마 희귀난치성질환자에게 필수적인 특수식이와 의료보조용품 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는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의 도움으로 매년 ALD환우 15명이 로렌조오일을 15병씩 지원받아 큰 힘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민석이가 아파서 응급실에 가면 병원비가 50~60만원이 나옵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로렌조 오일을 지원받아 비용을 아낄 수 있는 건 ALD 환우 가족들에겐 단비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15병이면 어린아이들은 1년을 두고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배씨는 둘째 아들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다 보니 어느새 ALD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일부 의사 중에는 ALD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는 환우 가족들에게 배씨를 소개시켜 줄 정도니까요. ALD 환우 가족들의 끈질긴 요청으로 배씨는 1998년 ALD 모임을 만들어 지금까지 이끌어오고 있습니다. 현재 ALD 모임을 함께 하고 있는 환우는 50명입니다.
“민석이 덕분에 다른 아이들을 살릴 수 있어서 행복”
배씨는 ALD 부모 모임을 이끌어오면서, 조기치료를 하면 병의 진행을 늦출 수 있어 건강하게 살아 갈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실제로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에는 로렌조 오일 덕분에 건강하게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감사의 편지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습니다.
배씨는 이런 내용을 근거로 2009년부터 보건복지부와 규제개혁위원회에 신생아 선천성대사이상질환검사에 부신백질이영양증을 포함시켜 조기발견의 길을 터줄 것과 로렌조 오일 지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6년간의 끈질긴 도전 끝에 지난해 말 규제개혁위원회는 현재 개발중인 ALD 검사법의 진행상황에 따라 신생아 선별검사에 ALD 포함 여부를 신중하게 검토해보겠다는 의견을 보내왔습니다. 미흡하지만 진일보한 답변에 ALD 환자 가족들은 실낱같은 희망에 부풀어있습니다.
배씨가 이렇게 ALD 환우들을 위해 뛸 수 있는 건 모두 22년간 버텨준 민석 씨 덕분입니다.
“민석이가 제 옆에서 20년 넘게 버텨주고 있는 게 다른 환우들을 도우라고 그러는 거 같아요. 민석이를 통해 ALD 환우들을 도울 수 있어 정말 행복합니다.”
원문: 이로운넷
글: 정혜선 이로운넷 리포터
사진: 강승원(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