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베테랑>으로 천만관객을 돌파한 류승완 감독은 공식석상에서 자주 ‘학력’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그의 최종학력은 고졸이다. 류 감독은 이런 문화에 대해 “굉장히 촌스럽다. 그런 질문이 사라지는 시대가 와야한다“고 했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일수록 이름 앞의 수식어에 의존한다.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고향이 어디인지,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 밑에서 일을 해왔는지 등 말이다.
‘진학’은 선택일 뿐 성공의 열쇠 아니다
교육부가 주관하고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주최한 ‘별별진로콘서트’ 현장에서 류 감독은 수식어를 뺀 ‘나는 누구다’로 당당하게 살아갈 것을 주문했다.
“아내는 대학졸업자이다. 난 고졸이고 배우인 동생은 고등학교 중퇴다. 그런데 우리 집의 성공은 역순이다. 중퇴자가 가장 재미있게 살아가고 있고 나는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산다. 아내는 아이들한테 자주 이야기한다. 대학 나와 봐야 소용 없더라고…”
진학은 선택일 뿐 성공의 열쇠가 아니라는 것이다.
“난 중학교 때부터 소년가장이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동생은 부모님 얼굴조차 기억 못한다. 우리 형제는 학창시절 특별한 점이 없는 그저 조용한 아이들이었다. 내가 만일 중산층의 안정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 영화감독이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특별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일에 더 매달렸던 것 같다. 나의 분출구는 영화였다.”
대학을 가지 않았지만 류 감독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그야말로 못 말리는 수준이었다.
“70년대 동시상영관에 가면 한 번에 영화 2편을 연달아 볼 수 있었다. 필름을 돌리던 시절, 서울에서 먼저 영화가 상영된 후 그 필름이 내가 사는 지방 구석에 까지 오면 스크래치가 많이 나고 너덜너덜해지는 수준이었다. 우리는 비가 온다는 표현을 썼고 소리는 지글지글 거렸다. 그래도 좋았다. 난 그렇게 헐리웃과 홍콩영화와 친해졌고 또 열광했다”
지식은 ‘책’, 기술은 ‘현장’에서
그는 당시 월간영화잡지였던 ‘스크린’과 ‘로드쇼’를 참고서로 삼았다. 전문가들이 좋다고 평한 영화들을 찾아가서 봤다. 그들이 분석해 놓은 기사나 창작자들의 인터뷰를 보면서 자신의 취향을 확인하고 안목을 넓혔다. 구체적인 영화에 대한 학습은 ‘독립영화협의회’라는 작은 단체에 들어가 필름 워크숍에 참여하면서부터 시작됐다. 20살에 첫 단편영화를 찍었다.
“처음 연출부 조수로 일할 때 150만원을 받았다. 5-6개월을 일한 보수다. 당시는 직업으로서가 아니라 감독으로부터 사사를 받는 개념이었다.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난 영화 현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1년의 6개월은 다른 일을 해서 돈을 모아야했다. 첫 단추를 끼우는 게 퍽 힘들었다. 자주 엎어졌다. 몇 개월을 준비했는데 중단되는 일들이 부지기수였다.”
류 감독은 28살에 데뷔했다. 운 좋게도 흥행에 성공했다. 그는 감독에게서 “흥행성공이란 돈을 많이 벌었다가 아니라 다음 작품을 또 찍을 수 있다는 안도감을 주는 것” 이라 평했다. 관객은 쉽게 돌아서고 투자자는 냉정하기 때문이다.
“재능 있는 사람들은 계속 나오고 유행은 수시로 바뀐다. 그 흐름 안에서 버텨 살아날 수 있을까 하는 공포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모두에게 있다.”
그는 청중들에게 “영화감독하면 떠오르는 이름을 대보라”고 했다. 아마도 채 20명이 안 될 것이라 했다. 현재 영화감독조합에 가입해 활동하는 감독은 300명이 넘고 조합에 가입하지 않는 숫자까지 포함하면 500명 넘는 감독들이 새로운 영화를 만들겠다고 준비 중이다. 만일 대중적 성공과 직업적 성공만 노린다면 패배자로 전락하기 쉬운 게임이다.
“한해에 개봉되는 한국영화중 기억되는 작품은 10%밖에 안 된다. 90%가 잊혀지는 것이다. 흥행만 생각해 접근하면 본인이 힘들어진다. 숫자로부터 자유로와져야 한다.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하면서 그렇게 나의 길을 묵묵히 걸어 갈 수 있다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꿈’이 곧 ‘직업’이어야만 할까?
그 물음에 ‘직업’과 ‘꿈’을 동일시하면 자신의 삶을 더 다양하고 재미있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뉴욕아시아영화제 수석 프로듀서인 내 친구의 직업은 전기공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친구 5명과 함께 뉴욕 차이나타운에서 쿵푸영화를 즐겨봤다. 그의 관심은 차츰 일본 사무라이 영화와 한국영화로까지 확산됐다. 드디어 5명이 의기투합해 ‘뉴욕아시아영화제’라는 작은 행사를 기획했는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차이나타운의 후미진 극장가에서 시작한 이 영화제는 매년 여름 뉴욕중심부 링컨센터에서 열리는 큰 영화제로 성장했다. 그는 영화제를 이끌고 가기 위해 전기공을 직업으로 삼았다. 연월차 휴가를 모았다가 아시아각국을 돌며 영화제에 참석하고 감독들을 만난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삶을 위해 일을 한다.”
한국에도 그런 감독들이 많다. <다섯은 너무 많아>라는 영화를 만들어 해외영화제에서 호평을 받고 국내 비평가들에게도 평판이 좋은 안슬기 감독은 학교 선생님을 하면서 주말마다 영화를 만든다. 예술은 재능이 필요하다. 그러나 재능이 없다고 꿈을 포기하지는 말라고 당부했다.
“모두가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빛을 낼 자질을 갖고 있지는 않다. 재능이 없는 것은 죄가 아닌데 왜 하고 싶은 걸 포기하는가? 요즘 직장인들 사이에 밴드가 유행하는데 좋은 현상이다. 음악을 좋아한다면 직장에서 일을 마친 후 밴드로 활동하거나 동호인들끼리 작은 클럽에서 연주하면서도 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진로는 부모가 아니라 ‘ 나 스스로’ 선택해야 후회없다
“여러분이 행복해지는 게 중요하다. 여러분이 아침에 눈을 떠야 세상이 있다. 세상을 위해 여러분이 눈 뜨는게 아니다”라며 청년들에게 삶의 주인 의식을 갖을 것을 권유했다.
“부모님 말씀 듣지말라. 여기 콘서트 장에 오신 분들도 부모님 말씀 듣고 부모된 사람 없다. 나중에 애가 커서 부모 말만 듣고 이렇게 살았는데 잘 안 되었다고 원망 할 수도 있다. 부모가 아니라 내가 선택해서 가야 한다. 그래야 그 선택에 대한 결과가 어떻든 원망이 없다.”
자녀 셋을 둔 류감독은 자신의 육아법을 공개했다.
“우리집은 맨날 싸운다. 첫째가 18살, 둘째가 6학년, 셋째가 4학년이다. 어느 날 차 안에서 공소시효제를 두고 5식구가 토론을 벌였는데 끝까지 갔다. 우리 애들은 싫은 것은 싫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집 가훈이 ‘자식 이기는 부모 되자’는 거다. 이기려고 대화한다. 자는 애 깨워서라도 한다. 가급적 친구처럼 대한다. 어른으로서, 선배로서 말하되 인간적 예의가 없을 때 혹은 위험한 걸 할 땐 기합을 준다.”
‘나’만 행복하면 될까?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파 할일이 아니라 박수칠 일이다. 내 맘의 짐이 될 수 있었는데 걱정거리를 하나 덜어주었기 때문이다. 교육이란 수능점수를 높게 받는 게 아니라 내 친구들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배워나가는 과정이다. 내가 배부르기 위해 누군가를 착취하거나 내가 편하기 위해 누군가를 힘들게 하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류 감독은 더불어 행복하려면 관심사와 시야를 넓히고 풍부한 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세상을 보는 자기의 눈이 있어야한다. 단순히 영화를 많이 보고 기술을 익히기 보다는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을 갖고 주변사람들을 돌아봐야 한다. 인터넷 정보에 의존하기보다는 문학을 가까이 하라. 완결된 맥락을 갖고 있는 글을 통해 누군가의 생각을 접해야 한다. SNS를 줄이고 가급적 실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라. 좋은 영화란 누군가의 삶의 이야기이자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는 토크콘서트 말미에 서로의 삶을 존중해주면서 무슨 일을 하든 내 삶의 주인으로서 당당함을 잃지 말자고 거듭 강조했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영화 ‘베테랑’에 나오는 대사이자 류 감독이 관객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원문: 이로운넷 / 글: 백선기 / 사진: 이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