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의 배신
1976년 11월 어느 늦가을, 전남 함평군의 한 시골 마을. 포대에 담긴 고구마가 길거리에서 썩고 있었다. 그런데도 농민들은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으짜쓸까…”
그해 함평에서 생산된 고구마는 전년보다 25% 더 수확량이 많았다. 농협에서 이렇게 꼬드겼기 때문이다.
농협: 작년에 고구마가 크게 흉년이 들어서 올해는 고구마 수요가 많아질 거라고 허니. 올해는 안심들 하고 고구마 농사 많이들 지으쇼잉. 수확한 건 빼깽이로 맹글지 말고 걍 고대로 넘기시고들.
농민: 아 그럼 좋지라. 근디 얼마나 쳐줄랑가요?
농협: 고로코롬만 혀면, 가마니당 1300원 씩 쳐줄랑게요.
농민: 으따, 1300원이면 솔찬히 좋구마요잉.
‘빼깽이’는 얇게 썰어 말린 건고구마를 말했다.당시 수확된 고구마는 주로 에탄올(술)을 만들기 위해 소비되었기 때문에 장기간 보관하기 위해 빼깽이로 만드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76년, 농협에서는 이례적으로 높은 값을 쳐주겠다며 생고구마를 원했던 것이다.때문에 이를 곧이곧대로 믿은 농민들은 빼깽이로 만들지 않고 포대에 생고구마 그대로 담아, 운송하기 편리하게 도로변에 쌓아뒀다.
소식을 듣고 상인들이 고구마를 사겠다고 찾아왔지만,
상인: 저기요. 고구마 좀 팔면 안 되나요?
농민: 얼마나 쳐줄랑가요?
상인: 가마당 1200원 어때요?
농민: 1200원? 아따 농협에서는 1300원 쳐준다고 했어라. 그냥 가보쇼들.
그렇게 농민들은 상인들의 부탁을 들은 체 만 체했다.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정작 수매일이 되고 보니, 농협은 수확량의 40%만을 겨우 사들인 것이다.
농민: 시방 이것이 머당가요?
상인: 올해 고구마가 지나치게 풍년이라서…
농민: 아니, 이제 와서 그딴 소리혀면 어떡한데요? 농협만 믿고 안 팔고 그동안 버텨왔는데, 시방 장난하는 거요, 뭐요?
그렇게 시장에 내다 팔 마지막 기회마저 놓친 농민들이었다. 때문에 노천에 방치한 고구마는곧 썩어들어가기 시작했고, 농민들은 푼돈이라도 건져보겠다고 가마당 400원씩의 헐값으로 넘기기 시작했다.
신고를 한 농민들은 적었다
농민들의 피해 소식을 듣고 당시 우리나라의 유일한 농민운동단체인 가톨릭농민회(가농)가 찾아와 ‘피해보상대책위원회’를 꾸렸다.
(박세길,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2권 p.281)
농민: 시방, 우리 군(郡)의 피해가 총 얼마나 되능가요?
가농: 글쎄요. 계산을 좀 해봅시다. 고구마 농사를 짓는 집이 총 7천여 가구… 한 가구당 50 가마니씩 수확했다고 치고, 농협에서 제대로 수매해주지 않은 고구마가 가구당 30가마니 정도라고 할 때… 30가마니 중 20가마니가 헐값에 팔리고 나머지 10가마니는 썩혀서 버렸으니, 그렇게 따지면 한 집 당 2만원씩은 손해본 것 같네요.
그러면 7천가구가 피해를 입은 건 총 1억4천만 원이 될듯해요. ☞ 참고
농민: 아따 겁나게 많구마요잉.
하지만 정작 피해를 신고한 농민들은총 160가구,총 액수 309만 원에 그쳤다.
사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농협에서 ‘마을 이장’ 등을 앞세워 피해 농가를 찾아다니며 확인증을 반강제로 받아 갔기 때문이다.
이장: 김 씨 할아버지. 이번에 고구마로 피해봤다고 혔죠?
김 씨: 시방 말도 말랑게.
이장: 할아버지, 그란다고 너무 뭐라 하지 말더라고요.
김 씨: 뭐셔?
이장: 농협한테 밉보이면, 우리 마을이 우수 마을로 뽑히지 못한다는 거 몰라요? 고로케 되면 지원금도 떨어져뿔고 비료도 안 나온당게요. 교회놈들이 찾아와서, 피해 액수가 뭐니 물어보면 절대로 없다고 하더라고요.
김 씨: 아따… 뭔 놈에…
이장: 그럼, 여그다 확인증 좀 찍어주더라고요.
그런가 하면, 이미 피해보상을 밝힌 이들에게는 농협 직원들이 직접 찾아와 회유와 협박을 했었으니,
농협 직원: 이봐요. 박 씨 아저씨. 이번에 피해보상 대책위에 가입했다면서요.
박 씨: 피해봤응게, 가입한 건데 그게 뭐가 잘못이라요?
농협 직원: 아놔, 정말 모르시네. 그런데 함부로 가입하면… 나중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잡혀갈 수 있다는 거 몰라요?
박 씨: 그게 뭔 말이라요?
농협 직원: 가농인지 뭔지 하는 애들 걔네들 알고 보면 순 빨갱들이에요. 선량한 농민들 이용해서 반정부 시위하려는 거라니깐요.
박 씨: 흐미! 진짜라?
농민들의 시위와 정부의 비협조
사태 해결이 지지부진하자 가톨릭농민회는 77년 1월, 보고서를 작성해서 정부에 제출하는가 하면, 77년 4월에는 피해 농민들을 불러모아 광주의 한 성당에서 대대적인 규탄 시위를 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무책임한 농협은 당장 농민들의 피해를 보상하라!”
“보상하라! 보상하라!”
그러자 그제야, 당황한 농협이 반응했다.
농협: 으따! 자꾸 왜들 이러시는 거요? 직접적인 보상은 해줄 수가 없당게요. 그라면 우리(농협) 입장은 뭐가 되는겨? 대신 피해 농민들마다 15만 원씩 융자금을 지원해줄 수는 있는디…
하지만 농민들은 단박에 거절했다.
농민: 돈은 그동안 허벌나게 많이 꿔 써서 빚이 산더미나 되는데, 또 뭔 돈을 꿔 쓰라는 건지… 시방 우리는 직접적인 보상이 아니고는 아무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당게요.
농협: 아놔, 그럼 맘대로들 해보슈!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열받은 농민들은 농협 전남 도지부로 몰려가 도지부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이제 더 이상 참을 없응게, 어여 도지부장 조 나와보슈. 우리랑 면담 좀 해야 쓰겄소.”
하지만 기동경찰대가 투입되어 농민들을 향해 공봉을 휘둘렀으니, 농민들은 강제로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때의 시위가 정부로 알려지게 되어 정부는 서둘러 조사반을 파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이들이 조사한 피해액은 당초 가농에서 예상한 액수보다 컸다. 또 농협 전남지부장이 TV를 통해 전량수매를 약속하고도 이를 이행하지 않았던 사실까지 추가로 밝혀냈다.
때문에 조사 결과에 농민들은 크게 고무되었지만,
“거봐. 농협이 잘못을 혔당게.”
“그라제. 곧 보상금이 나오겠구먼.”
정작 농수산부와 농협중앙회는 대책 해결에는 미온적이었다.
농민: 조사 결과가 나왔으면 얼릉 피해를 보상해 주랑게요. 지금 뭐다는 거라요?
정부: 어허, 이 사람들이! 지금 계속 조사 중이니, 소란 피우지 마세요.
농민: 시방 1년이 넘어가요. 언제까지 기다리라고만 혀는 건지.
정부: 그럼 100만원을 줄 테니 그걸로 타협을 보는 건 어때요?”
농민: 뭐여? 100만원? 시방 우리는 309만 원어치 피해를 봤다고 분명히 말을 했어라!
정부: 아놔, 그럼 기다려요.
77년 한 해는 그렇게 흘러갔다.
단식투쟁과 농민들의 승리
아무리 해도방법이 없었기에 가톨릭농민회는좀 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게 된다. 78년 4월,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하고 광주의 한 성당으로 피해 농민들은 물론이고, 천주교·기독교 교인들과 사회운동가들까지 합세하여 700여 명의 인원으로 시위에 들어갔다.
“벌써 1년 반이 지났다.”
“농협은 피해 농민들을 외면하지 말고 정당한 보상을 해달라!”
이어서 시위대는 거리 시위를 계획했지만, 경찰의 진압에 막혀 실패하고 말았고, 결국 성당 뜰에 앉아서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가기로 했다.
농민: 좋아! 정 그렇다면… 시방 우리들의 요구를 들어줄 때까정 단식 투쟁을 하겠구마잉!”
경찰: 아놔, 뭔 단식투쟁이야…
이에 경찰은 성당 출입문을 폐쇄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혹시 미사를 보기 위해 성당을 찾은 신도들이 새롭게 합세하여 시위 규모를 늘릴까봐 염려했던 탓이었지만, 덕분에 시위대는 완전 고립 상태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단식 5일째가 되자, 단식자 중 5명이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갔다.
경찰: 아놔, 이제 그만하고 해산들 하세요. 몸만 상합니다.
농민: 피해보상이 이뤄질 때까정 시방 우리는 절대로 단식을 멈추지 않겠어라.
그리고 단식 8일 째, 결국 당국은 농민들에게 손을 들고 말았다. 농협 전남지부에서 피해보상금 309만원을 가져온 것이다.
농협: 자요. 돈 줄 테니 얼른 받아 가지고 가세요.
그렇게 해서 78년 5월, 농민들은 8일간의 단식농성을 풀고 농성 20개월 만에 1인당 19,300원씩을 받을 수 있었다.
309만 원 vs 80억 원
유신정권 시대, 정부는 ‘새마을운동’을 강조하며 ‘추곡수매제도’를 통하여 농가 소득을 보장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추곡수매가 뭥미?”
“농민들이 추수한 농산물을 시장에 내다 파는 게 아니라, 농협에게 직접 파는 것.”
하지만 이를 통해서 정부는 교묘히 농촌의 생산을 통제하고 ‘저곡가정책’을 시행할 수 있었다.
“농산물 가격이 전년보다 10% 올랐어도 물가는 15%씩 오르고 있었으니깐…”
그리고 그런 와중에 터졌던 ‘함평 고구마 사건’은 당시 파행적으로 운영됐던, 정부의 추곡수매 정책의 폐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농민의 이익에 앞장서야 할 농협이 오히려 농민들에게 손해를 입히고도 자신들에게 책임을 물을까 봐, 피해보상 요구를 묵살하고 회유하는 행태는 농민들의 분노를 폭발시키기에 충분했다.
사실 농민들이 20개월 동안 시위를 하면서 겨우겨우 받아냈던, 1인당 19,300원의 돈은 결코 큰 돈이 아니었다. 당시는 초코파이 1개에 50원, 라면 1개 50원, 공무원 월급 10만원, 버스 안내양 월급 6만 원이던 시절이었다. (78년 기준)
그런데도 농민들은 그 돈을 받겠다고 그토록 처절하게 투쟁을 했던 것이다.
한편 사건이 외부로 크게 알려지자 감사원의 감사가 이뤄졌는데, 이게 웬일인가! 농협이 양조회사와 결탁하여 고구마 수매를 이용해서 엄청난 돈을 유용했던 사건이 밝혀졌으니, 그로 인해 농협 공무원 658명이 줄줄이 옷을 벗게 된 것이다.
“농협은 고구마를 농민들에게서 직접 헐값에 수매했음에도, 중간 상인들에게 높은 값에 수매한 것으로 장부를 허위 날조해서 총 80억 원의 엄청난 폭리를 취했던 것임.”
“80억!”
“그런데도 309만원을 보상해주는 게 아까워서 저랬었다니…”
참으로 부조리한 사회였다. 참고로 함평고구마사건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농민이 공권력에 맞서 승리한 최초의 ‘농민운동’이었다.
‘정치적 도구’였던 새마을운동
‘잘 살아보기 운동’으로 알려진 새마을 운동은 실제로 농촌의 발전을 우선적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사실 당시의 경제성장 방법이란,
2차 산업이 선도적인 역할을 하면
3차 산업이 따라와 주고
1차 산업은 다른 산업을 위한 ‘퇴비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었다.
즉 1차 산업은, 저곡가정책을 통해 다른 경제구성원들에게 낮은 생계비를 보장해주는 한편, 도시로 값싼 인력을 공급해주기 위해 몰락한 농민을 양산해야만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새마을운동은 실제로는 ‘잘 살아보기’운동이 될 수가 없었다.
“농촌이 잘 살아봐. 그러면 도시는 구인난으로, 임금이 오르지, 그러면 물건 값이 오르지… 값이 오르면 수출이 줄어들지, 결국엔 경제성장률이 떨어지게 된다능.”
때문에 새마을운동은 경제적인 측면이 아닌, ‘정치적인 측면’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정부가 농촌이 가난한 이유를 구조적인 문제가 아닌, 농민의 무지와 게으름, 안일과 타성이라고 시도때도 없이 주입시켰던 이유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70년대편 3권 p.124)
“농촌이 가난해? 그건 바로 농민들이 그만큼 무식하고 나태해서임.”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농민들의 자책감은 곧 훌륭한 ‘동원 이데올로기’로 활용되었으니. 정부는 농촌의 인프라를 닦는 일까지도 공짜로 농민들에게 강제 부역을 시킬 수 있게 된다.
“정부가 국민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치안·국방·공공투자와 같은 공공 서비스를 도맡아서 하라는 이유에서인데… 그런 일까지도 농민들에게 떠넘겼던 것임.”
그런데도 당시 농민들은 커다란 불평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새마을운동이란 가히
탁월한 ‘정치도구’였던 것이 분명하다.
‘외화내빈’의 새마을운동
하지만 정치적 목적이 과잉된 나머지 ‘외화내빈’이 되어버린 부작용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초가 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꾼 사업이 그러했다.
겉으로 보기에, 빨갛고 파랗게 페인트 칠이 된 지붕은 농촌 근대화의 상징과도 같았다. 하지만 당시의 주택 개량 사업은 꼴랑 지붕만 바꾼 것이었지 초가집의 낡은 흙벽은 그대로였다.
흙벽이 슬레이트 지붕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집이 기울어지고, 그걸 받치기 위해 처마 밑에 장대를 세우는 식의 거추장스러운 모습들이 여기저기서 속출하고 있었다.
(역사비평 1995년 여름호 p.94)
하지만 그렇더라도, 농민들은 대부분 지붕을 바꿨다. 낙후함의 상징이던 초가 지붕을 없애지 않으면, 공무원이 강제로 벗기던 시절이었으니 지붕 개량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붕을 바꾼 자체가 소득 증대에 어떤 기여을 했단 말인가? ‘슬레이트 지붕’을 구입하려다가 농민들은 오히려 빚만 늘어났다. 이렇듯 농민의 실질적인 삶과는 동떨어진 채, ‘정권의 치적’을 드높이기 위한 전시행정의 사례는 당시 새마을운동의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수확량이 좋다고 통일벼를 심으라고 강요하더니… 비닐 하우스며 농약에 비료까지 오히려 예전보다 벌이가 줄어들었다능.”
‘통계 기만’을 통한 새마을운동 홍보
박 정권은 새마을운동을 통해 농촌이 도시보다 더 잘 살게 되었다는 선전 공세를 집요하게 해왔다. 특히 농가소득과 도시근로자 가구 소득을 비교해 볼 때, 1970~73년에는 농가 소득이 낮았지만, 74년 이후로는 농가 소득이 더 높아졌다는 통계 자료를 정권의 홍보 수단으로 사골처럼 우려먹었다.
그러나 과연 사실인가? 조금만 파헤쳐 봐도 허점 투성이다. 정부가 제시한 소득은 1인당 소득이 아닌, 가구당 소득이었고
“읭? 시골은 대가족인데 도시는 핵가족이잖아.”
통일벼 흉년으로 농가가 휘청거리는 78년 이후로의 자료는 쏙 빠졌기 때문이다.
1인당 실질소득으로 볼 때, 농민들은 도시의 근로자 소득의 2/3에 불과했지만, 그런 소득계산 방식마저 엉터리였다.
김주숙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유신시대 농가 소득은 그야말로 엉터리 발표였다. 농가 소득에는 농업소득 뿐만 아니라 자산 소득까지 다 포함시키면서, 도시 근로자 소득은 오직 노동소득(월급)만 포함되어, 부동산 소득이나 금융소득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던 것이다.
또 도시 근로자의 경우 월수 35만원 이상의 고소득자를 제외했으면서, 농민 소득은 300평(1단보) 이하의 저소득층은 제외했다.”
(김주숙, 한국 농촌의 여성과 가족 p.79~81)
그러면서도 1인당 소득에서 도시 근로자가 훨씬 앞섰으니, 실제로 당시 농촌은 얼마나 가난했었단 말인가! 괜히 70년대 후반이 되어 1년에 70만명씩이나 되는 엄청난 이농인구가 발생하는 게 아니었다. 1년에 우리나라 인구의 2%씩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했었다.
원문: 만쭈리님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