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목표 국민소득 1천 불, 수출 100억 불
72년 유신체제가 선포될 때 정부는, “10월 유신, 100억 달러 수출, 1,000달러 소득” 을 되풀이하며 강조했다. 그리고 73년 1월 12일 유신 첫해, 박정희는 연두교서를 통해 국민들에게 이런 공약을 했다.(오원철, 『한국형 경제건설』 7권, 559쪽.)
박정희
“앞으로 중공업을 육성하여 경제발전에 박차를 기하도록 할 테니, 지금은 좀 더 허리띠를 졸라맵시다. 그렇게만 한다면, 80년대 초에 국민소득 1,000달러,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이후로 ‘국민소득 1천 불, 수출 100억 불’은 대한민국 선진화의 상징과도 같았고, 지상목표이자 희망의 메시지인 동시에
국민
“국민소득 1천 불, 수출 100억 불 시대가 되면 우리나라도 선진 대열에 낄 수 있다나 뭐라나…”
“그때가 되면 모두가 자동차를 몰고 다니게 된다지, 아마?”
‘억압’을 정당화하는 구호로도 사용되게 되었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임금인상 타령이야!”
당시 국민소득 1천 불과 수출 100억 불의 목표 시점은 81년. 언론을 통해 하도 들어서 귀에 더께가 앉을 정도라서, 국민들은 이때가 되면, 정말로 이상향이라도 건설되는 것처럼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실현 시기는 예상보다 빨랐다. 8년 후로 생각되었던 달성 시기가 그 절반인 4년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77년 말, 대망의 목표였던 수출 100억 달러와 1인당 소득 1천 달러의 고지를 동시에 점령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77년 12월 22일에 있었던 수출의 날 행사는, 전에 없던 성대한 팡파르가 울려 퍼지며 국가적인 축제로 행해졌다. 이날 박정희는 이렇게 말했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70년대 편』 3권, 102~103쪽.)
박정희
“1964년 1억 불, 1970년 10억 불, 그리고 올해에 드디어, 100억 불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그동안 정부와 우리 국민들의 피땀 어린 노력과 의지의 결정이요, 승리인 것입니다. 10억 불에서 100억 불이 되는 데 서독은 11년, 일본은 16년이 걸렸지만, 우리 한국은 불과 7년이 걸렸습니다.”
외신들도 한국의 고도성장에 일제히 찬사를 보내고 있었으니…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춘 지는 77년 9월호에서 이렇게 말했다.
포춘
“한국의 1인당 GNP는 지난 15년 동안에 무려 8배 이상 증가했다. 이러한 성장은 무엇보다 내핍적이고 수출 지향적인 정책에서 이룩된 것이었다. 한국인은 주당 50.7시간을 일해, 지구 상의 다른 어떤 국민들보다 더 많이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100억 불 수출 공약
그렇다면 왜 하필 100억 불 수출 공약이 나왔던 것일까? 유신의 구호로 외쳤던, ’10월 유신 1,000불 국민소득’과 함께 이왕에 ‘100억 불 수출’ 이면 입에 쫙쫙 달라붙기는 했다. 그런 상징적인 효과와 더불어, 박정희는 ‘중화학공업’이라는 혁신 산업에 내심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1972년 5월 서울에서 무역확대진흥회가 열리던 때의 일이다.
(오원철,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 강국을 만들었나』, 135~144쪽.)
박정희
“이봐, 오 수석. 80년대 초까지 수출 56억 불을 목표로 한다고 했지?”
오원철
“실적으로 그렇게 될 듯합니다.”
박정희
“그거 가지고 선진국 될 수 있겠어? 한 100억 불 정도 수출할 수는 없어?”
당시 100억 불이면 우리나라 전체 GDP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오원철
“중화학공업 생산품을 수출하면 됩니다. 일본도 57년 중화학공업으로 전환하면서 10년 뒤에 수출액 100억 달러를 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빠른 수출 성장을 위해서라면 중화학공업으로 전환해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정부는 ‘중화학공업 정책’을 선포하고 각종 세금 우대, 특혜 금융 등의 막대한 지원을 하게 되었다, 수출, 그것도 이왕이면 중화학공업 관련된 사업이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막대한 특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특혜는 재벌의 ‘문어발식 경영’만 키웠다
박정희는 한정된 자원을 ‘선도 기업’에게 밀어줘서 먼저 성장부터 시키고 분배는 나중에 생각해보자는 식의, 경제학에서 흔히 말하는 ‘불균형성장론’의 신봉자였다. 때문에 노동자들에게는 희생을 강요하고 쥐어짜면서도 재벌에게는 막대한 혜택을 베풀며 정부가 쳐준 우산 속에서 무럭무럭 성장하기만을 바랐다.
“좀만 더 기다려봐. 곧 낙수효과가 있을 거야.”
그래서 박 정권의 경제정책은 곧 ‘재벌 육성정책’이기도 했다. 실제로 유신 전후로 매년 한 건씩 메가톤급 정책을 터뜨리며 열심히 재벌들에게 퍼줬던 정부였다.
① 72년 8.3 긴급경제조치 ☞ 참고
“기업들은 사채 빚 당분간 갚지 마!”
② 73년 중화학공업화정책 ☞ 참고
“중화학공업 사업하면 각종 특혜를 주겠다능!”
③ 74년 5.28 특별조치
“모든 기업들은 제도 금융시장을 이용하라능!”
④ 75년 종합무역상사 제도
“수출 열심히 하면 대출금리 팍팍 줄여주겠다능!”
어떻게 말인가? 먼저 ‘5.28 특별조치’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정부는 8.3 긴급조치로 지하금융인 사(私)채 시장을 때려 부순 만큼 그걸 대신할 기구로 ‘투자신탁’, ‘신용협동조합’ 따위의 전문적인 투융자 기관을 만들어서 이용하도록 했다.
정부
“자, 앞으로 돈놀이하고 싶은 큰손들은 명동의 불법 사채시장 같은 곳에 기웃거리지 말고… 앞으로 투신사를 통해 돈을 맡기도록 하라능. 또 돈을 꾸고 싶은 사람은 투자신탁을 찾아가면 되겠다능.”
하지만 투신사들은 함부로 돈을 꿔주는 법이 없었다. 대기업들이야 간판을 믿고 쉽게 돈을 꿔줬다지만, 중소기업에게는 까다로운 요구가 있었던 것이다.
중소기업
“저 돈 좀 꾸러 왔는데염.”
투신사
“회사 상태가 어떤지 알아야 하니 먼저 재무제표를 보여주세요.”
사실 당시 중소기업들은 대부분 막대한 빚을 지고 사업을 하던 상황이라서 회계학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대부분 ‘부실기업’의 꼬리표를 떼기 어려웠다.
투신사
“헐! 무슨 부채비율이 이리 높은 거죠? 우린 돈을 꿔줄 수 없겠네요.”
때문에 돈을 꾸지 못한 중소기업들은 줄줄이 휘청거렸고, 재벌들은 이런 중소기업들을 하나둘씩 합병하여 계열사를 늘리거나 자신들의 하청기업으로 만들어 버리곤 했다. 그리하여 중소기업체 중 하청관계의 업체는, 66년 12.6%에서 80년 30.1%로 크게 늘어나게 된다. (역사학연구소, 『강좌근현대사』, 340쪽.)
정부의 또 다른 선물은 75년에 선보인 ‘종합무역상사 제도’였다. ‘종합상사제도’는 일본의 것을 베낀 것이었다.
정부
“수출을 전문으로 하는 종합상사로 지정받으면, 시중 금리(15~19%)의 절반도 안 되는 싼 금리(7~9%)로 돈을 꿔주겠다능.”
하지만 아무나 ‘종합상사’가 될 수 있겠는가? 천만의 말씀! 이것도 ‘돈’을 가진 재벌들만 가능한 일이었으니, 재벌들이야 특혜를 얻기 위해 너도나도 수출에 매달려 ‘종합상사’라는 타이틀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지만, 중소기업들에게 그것은 그림의 떡과도 같았다. 재벌이 승승장구하는 만큼 중소기업들은 빠른 속도로 몰락할 수밖에 없었고,
“이미 대출 금리부터 달랐으니 시장에서 공정한 게임이 될 수 없었지.”
그렇게 휘청거리다 보면 재벌들이 날름 합병해버렸다. 그 결과 78년 기준으로 10대 종합상사 그룹들이 거느린 기업군은, 럭키 47, 대우 41, 삼성 38, 현대 33, 쌍용 20, 국제 24, 선경 27, 금호 10, 삼화 30 등 모두 304개 업체에 달했다. (역사학연구소, 『강좌근현대사』, 339~340쪽.)
그러니 빈부 격차가 얼마나 심각해졌겠는가! 73~78년간 GDP 성장률은 연평균 9.9%였지만 같은 기간에, 46대 재벌사의 성장률은 무려 ‘연평균 22.8%’에 달했다. 6년 동안 재벌들은 평균 3.5배씩 덩치가 커진 셈이다. 그 결과 GDP에 대한 46대 재벌 비중은, 불과 6년 사이에 73년 9.8%에서 78년 17.1%로 높아졌다.
같은 재벌이라도 상위에 속한 재벌일수록 더 빨리 성장했으니, 하위 25개 재벌의 연평균 성장률은 12.8%인 데 비해, 상위 5대 재벌의 성장률은 연평균 30.1%에 달했다. (사공일, 『세계 속의 한국경제』, 88~89쪽)
현대, 삼성, 럭키, 대우 등의 재벌들은 6년 만에 덩치가 5배씩 더 커졌다.
중동특수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정권의 ‘중화학공업 육성책’은 한동안 빛을 발하기 어려웠다. 73년 말에 터진 ‘석유파동’과 그에 따른 ‘글로벌 경기 침체’로 75년까지 오히려 이전보다도 더 중화학공업의 성장세는 주춤했기 때문이다.
“아놔, 상황이 이런데 무슨 중화학공업에 투자하라는 거야. 회사 거덜 날 일 있어?”
하지만 그런 위기의 정권을 구원했던 것은, 전혀 예기치도 않게 ‘오일달러’로 벼락부자가 된 중동의 왕족들이었다.
“하하하. 오일 달러 때문에 배 터지겠다.”
“그런데 국민들에게도 나눠줘야 하지 않겠음?”
“어떻게 하면 될까?”
“보여주기 용도라면, 제일 티 나게 할 수 있는 건 다리, 도로 놓고 아파트 지어주는 거임.”
“좋은 생각인데, 그거 다 만들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잖아.”
“소식 못 들었어? 한국이 뭐든 빨리 만든다잖아.”
“한국? 거기서 만든 고속도로가 날림공사라는 소문이 있던데?”
“뭐 어때. 일단 빨리 만들고 나서 보수공사를 하면 되는 거지.”
덕분에 한국은 예상치도 못한 엄청난 달러벌이를 하게 된다. 한일협정이 8억 불, 월남특수가 10억 불이었는데, 중동특수는 무려 400억 불이었다. 75년 건설 수주액이 7억 5천만 달러였는데, 78년에는 81억 달러로 늘어나게 되었으니, 당시 우리나라 수출 총액의 40~60%에 달하는 엄청난 수치였던 것이다. (김영사, 『세계 속의 한국경제』, 21쪽.) ☞ 참고 (해외건설수주는 경상수지 중 서비스수지에 속한다)
그러니 수출액 100억 불 신화는 중동특수가 없으면,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울러 수출액 100억 불이 달성되던 당시, 누적 적자액이 총 160억 달러에 달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정권은 수출 100억 불 달성을 화려하게 치장했지만 2년 뒤 수입액은 200억 불을 돌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빚을 져서 매출을 늘렸던 셈.
수출금융의 맹점, 율산 그룹 사건
당시 워낙 ‘수출 기업에 대한 특혜’와 ‘중동 특수’가 엄청났기 때문에, 자본금 100만 원을 가지고 시작한 벤처기업이 3년 만에 자본금 100억 원과 14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재벌’로 성장하더니 갑자기 모래성처럼 무너져버린 희대의 사건도 있었다.
한국 경제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흥망사를 썼던 기업은 바로 20대 젊은이들이 모여 만든 ‘율산 그룹’이었다.
이들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중화학공업 특혜와 수출 기업 특혜, 그리고 종합상사 특혜라는 정권의 각종 특혜만을 쫓아 단물을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말인가?
먼저 율산그룹은, 쿠웨이트에 시멘트를 팔아 짭짤한 돈을 만지더니, 종잣돈이 생기자 그 돈으로 아예 화물선을 사서 자신들이 직접 시멘트를 운송하면서 막대한 폭리를 챙겼다.
수출 관련 사업에 중화학공업 관련된 것이라 ‘금융혜택’에 ‘세제혜택’까지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현금이 모이기 시작하자 당시 여느 재벌들이 그러했듯이 율산은 건설, 의류, 전자 시장으로 문어발식 확장을 시작하게 되었고 78년에 ‘종합상사’로 지정되면서 재계를 깜짝 놀라게 하게 됐다.
하지만 승승장구는 딱 거기까지였다. 막대한 빚을 져서 이룩한 기업인지라 수입선이 막히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으니, 만기가 된 어음을 결제하지 못해 자금난에 허덕이다가 결국 그룹을 채권단이 공동관리하게 되면서 그동안의 은행 부채가 1,523억 원에 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현재가치로 2조 원이 넘는 돈이다)
“뜨아! 이거 순 빚으로 쌓은 모래성이었네.”
“뭐, 종합상사가 되고 나니 너무나 쉽게 돈들을 꿔줘서리.”
7년형을 선고받았고, 율산은 계열사 전체가 부도처리 되었다. 당시 재벌들이 얼마나 쉽게 부를 축적할 수 있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 하겠다.
국민소득 1천 불의 의미: 1인당 소득을 늘리기 위해
한국에서 가족계획은 군사정권이 들어선 1962년부터 시작되었다. 60년대의 슬로건은 “덮어 놓고 낳다 보면 거지 꼴을 못 면한다”였다.
하지만 유신정권 들어서 가족계획은 단순한 슬로건에서 벗어나 ‘국가의 정책’으로 적극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때 슬로건은 좀 더 구체적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80년대에 들어서면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로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구호 뒤에 국가는 남자들에게 정관 수술을 강요했다.
“예비군 훈련받기 귀찮지? 이번에 안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정말요?”
“정관 수술을 받아.”
“…”
또 새마을운동 사업과 연계되어, 시골의 마을회관에서는 지도 요원들이 나와서 연일 ‘가족계획’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각종 피임 방법을 가르쳐 주곤 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농촌의 인식은 자식은 다다익선이라는 고정관념이 많았던지라 마을의 노인들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가족 요원들을 쫓아내는가 하면, 피임 학습을 받으러 나온 며느리를 시어머니들이 손 붙잡고 데려가기 일쑤였다. (여성신문사, 『20세기 여성 사건사』, 181쪽.)
“시방 남의 집 귀한 대를 끊으려는 겨 뭐여?”
때문에 정부의 뜻대로 원활히 이루어지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왜 정부는 이토록 인구정책에 집착했던 것일까? 당시 경제기획원 담당 사무관 조남홍의 말이다. (주태산, 『경제 못 살리면 감방간데이』, 83쪽.)
조남홍
당시 인구증가율이 연 2% 이상이어서 1976년까지 1.8%로 낮추겠다고 계획했더니, 부총리가 1.3%로 낮추라고 호통을 쳤어요. 그래야 1인당 소득이 높일 수 있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연구 용역을 맡았던 서울대 측은 1.5%도 힘들다고 했어요.
그래서 결국 1.5%로 낙착이 되었고 그 목표를 지키기 달성하기 위해서… 정관 수술 시 보상금 지급, 콘돔 무료 배포, 산아제한 홍보 등의 각종 프로그램이 시행됐습니다.
가족계획운동의 여파
그 결과 70년대 우리나라의 인구증가율은 급격히 낮아지게 되었다.
당시 가족계획의 홍보를 위해 TV 드라마에서도 부부는 두 자녀 이하만을 갖도록 설정이 되어야 했고, 우표·담뱃갑·극장표·통장·주택복권은 물론 버스·택시·지하철·기차 구내 등 일상 공간마다
“적게 낳아 잘 키우자”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내일이면 늦으리! 막아보자, 인구폭발”
등의 가족계획에 관한 표어가 부착되었다. 또 도시마다 ‘인구 탑’을 세워 매일 증가하는 인구수를 보도록 했었다.
76년부터는 두 자녀가 있는 가구에는 소득세를 감면해 주었고, 둘 이하를 낳고 영구 불임수술을 한 경우에는 공공 주택 할당 및 금융 대출에 우선순위를 주었으며 그 자녀들에게는 취학 전까지 의료혜택을 주었다. 심지어 영세민들이 불임수술을 받을 때는 금전적인 혜택까지 주었다. (여성신문사, 20세기 여성 사건사 p.177)
다만 당시 가족계획 요원들은 군 보건소로부터 정해진 목표량을 달성해야 했기 때문에, 실적으로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곳곳에서 잡음이 많았다. 하지만 결국 군사정권 특유의 밀어붙이기식 정책 덕분에 우리나라의 출산력은 빠른 속도로 감소할 수 있었고 전두환 정권에서도 이를 고스란히 답습했기 때문에, 80년대 후반 우리나라의 인구증가율은 재생산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 재생산 수준이란?
재생산율은 한 여인이 평생 여아를 몇 명 낳는가 하는 것으로, 한 나라의 인구가 장기적으로 유지되려면 최소한 재생산율이 1은 넘어야 한다.
9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인구 증가율은 1% 미만으로 감소하였으며 출산율로는 1.6으로 떨어졌다.
- 출산율이란?
한 여성이 15~49세 가임기간에 낳은 평균 출생아 수.
그리고 2001년의 출산율은 1.30으로까지 낮아졌으니, 이는 미국(2.13), 영국(1.64), 일본(1.33)보다 더 낮은 수치였다. (한국일보, 2002년 8월 28일 자 30면)
장래를 생각하지 않은 근시안적인 정책
이러한 가족계획은 정권의 바람대로 ‘1인당 소득’을 빠르게 끌어올릴 수 있어 공약 실천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 1인당 소득증가율 = 경제성장률 – 인구증가율
또 자식이 적어지다 보니 딸에게까지 교육의 혜택이 돌아가 여성의 취학률이 급격히 높아져 1970년 남자 37%, 여자 24%였던 고등학교 진학률이, 1990년에는 남녀 모두 97%로 증가하게 된다. (여성신문사, 『20세기 여성 사건사』, 184쪽.)
하지만 그보다 잃는 것이 훨씬 컸다. ‘인구증가율 감소’는 산업화가 진행되면 자연스레 나타나는 현상이거늘, 그걸 인위적으로 건드려서 20년 뒤에나 찾아올, 저출산·고령화 현상을 미리 앞당겨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을 크게 깎아버렸기 때문이다.
자고로 ‘인구 1억’은 있어야 오타쿠 같은 마니아층을 위한 전문 산업도 나타날 수 있고, 수출 의존도에서 탈피하여 ‘내수’로 살아갈 수 있다고들 하는데, 5천만의 한국 소비시장으로는 기업이 제대로 성장하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다.
“에잇! 우리나라 인구밀도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모르는 소리. 우리나라의 90%의 인구가 국토 2%의 땅에 몰려 살고 있다능.” ☞ 참고
“아!”
“우리나라 평균 인구밀도의 33배가 넘는 서울에 살면 많이 불편함?”
“…”
사실 인류 역사가 도래한 이래로 인구는 곧 국력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초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인구는 세계 10위였다.
1820년 한반도 남쪽의 인구만 계산해도 전 세계 인구의 약 1%를 차지했었다. 하지만 현재는 0.67%로 줄어들었고, 2050년도에는 0.45%로 비중이 줄어들게 된다. ☞ 참고
그만큼 한국의 미래 국력도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한국? 우리 인구의 1/3밖에 되지 않은 나라잖아.”
“한국? 우리보다 경제규모가 낮은 나라?”
미국 달러의 약세 효과
어쨌든 ‘가족계획’의 효과와 ‘중동특수’에 힘입어 우리나라는 예상보다 4년 빨리, 대망의 국민소득 1천 불을 달성했다. 하지만 정부가 호언 한 대로 선진국이 되었는가?
“어림 반푼도 없는 소리!”
여전히 한국은 경제적으로 부족했다.
1인당 국민소득의 순위는 73년에 84위에서, 78년에 78위로 겨우 1년에 한 계단씩 상승했을 뿐이다. (경향신문, 1978년 5월 3일)
한국이 4년 만에 420달러에서 1천 달러를 넘겼을 때, 일본은 3,900달러에서 8,700달러로 상승했다. 당시 전 세계 대부분 국가는 모두가 폭발적으로 1인당 소득이 상승했다.
그 이유는 오일쇼크 이후 미국의 경제가 심각하게 나빠져서 미 달러에 대한 기피 현상으로 달러화가 약세를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72~78년 기간 중, 미 달러의 가치는 영국 파운드화에 비해 27%, 일본 엔화에 비해 20% 이상 떨어졌다.
반면에 당시 원화 가치는 지나치게 고평가되고 있었다. 어떻게?
73~77년 동안 연평균 인플레이션율은 미국은 7.8%, 한국은 15.2%였다. 때문에 한국의 원화는 미국의 달러에 비해 매년 7.4%씩 가치가 떨어져야만 했다.
한해 15%씩 물가가 상승했다는 말은 돈의 가치가 15%씩 떨어졌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1973년도의 100원은 1977년에는 50원의 가치밖에 안 된다. 그런데 1973년의 1달러 400원의 환율은 1977년에는 484원으로 20%밖에 오르지 않았다. ☞ 참고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경제 성장이 전혀 없었다 하더라도, 1973년에 총 1,000억 원어치 물건을 생산해냈다면
“흠, 1달러 400원이니 GDP는 총 2.5억 불이겠군.”
1977년에는 총 2,000억 원어치로 평가되어
“흠, 1달러 484원이니 GDP는 총 4.1억 불이겠군.”
1.6억 불 소득이 늘어나버리는 괴상한 일이 발생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74년에 환율을 484원으로 정한 뒤, 79년까지 전혀 변동시키지 않았다.
“지금 석유값이 금값인데 환율을 높여봐. 기업들 죽어난다능. 수출이야 뭐 대부분 중동 특수가 해주고 있는데 뭘…”
그런데 만약 이러한 ‘거품’을 뺀다면, 즉 환율을 현실에 맞게 조정했더라면 실제로 1977년 한국의 1인당 소득은 774달러가 되어야만 했다. 73년부터 77년까지 한국의 물가상승률이 미국보다 1.43배 더 높았으니 말이다.
역시 마찬가지로 수출액 100억 불은 실제로는 70억 불이었던 셈이다.
국민소득 1천 달러 시대인데 왜 달라진 게 없는가?
77년 그렇게 국민소득 1천 달러를 넘겼는데, 사람들은 도저히 실감할 수 없었다.
“뭐지? 1천 불 시대가 오면 선진국이 될 거라고 하지 않았어?”
“그러게…”
“누구나 자동차를 몰고 다닐 거라며?”
“젠장, 국민소득 1천 불 아무것도 아니었네…”
당시 언론들도 미 달러 약세의 영향으로 예상보다 빨리 찾아온 국민소득 1천 달러 시대가 뻘줌했는지, 이러한 기사들을 싣곤 했다. (동아일보, 1978년 2월 21일 자)
“작년 말 우리나라는 국민 소득 1천 달러를 넘긴 것으로 밝혀졌다. 프랑스는 53년, 서독은 54년, 일본은 66년, 대만은 2년 전에 1천 달러를 넘긴 바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각기 그해의 달러 가치로 1천 달러를 넘어선 것이고, 가치가 크게 떨어진 지금의 미화로 따지면, 각국의 소득액은 이보다 훨씬 높은 것이다. 거꾸로 그때의 달러 가치로는 따지면 우리의 소득은 1천 달러가 훨씬 안 되는 셈이다.”
다른 신문은 우리나라의 환율을 현실에 맞게 올리자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매일경제, 1979년 9월 4일 자, 1면)
“우리나라는 74년부터 1달러 484년으로 환율을 고정하고 있는데, 이는 현실적인 수치보다 43%가량 낮게 평가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구체적으로 우리나라는 75년부터 올해 5월까지 물가가 총 66.2% 올랐지만, 주요 선진국들은 같은 기간 중 평균 22.5%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니 1달러 695원이 타당하다.”
하지만 정권은 환율을 조정하지 않았다.
원문: 만쭈리님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