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침공이 시작되기 전부터도, 스페인 귀족들과 국민들은 이 페르난도 7세를 적극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1808년 5월 2일의 마드리드 대봉기도 페르난도의 동생이 프랑스로 끌려가는 것을 막다가 일어난 사건이었고, 나폴레옹의 형인 신임 스페인 국왕 조제프에 대해 충성을 서약하라는 명을 받은 스페인 병사들은 모두 은근슬쩍 페르난도의 이름에 대해 충성을 서약할 정도였습니다. 페르난도의 별명은 “el Deseado” (the Desired), 즉 국민이 원하는 자였지요.
그러나 제가 지난 「아랑훼즈(Aranjuez)의 불협 화음」편에 썼듯이, 이 페르난도 7세(Fernando VII de Borbon)는 그리 명민하다고 할 수 없는 왕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 카를로스 4세가 국정을 너무나 엉망으로 말아먹었기 때문에,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다’는 심정으로 페르난도를 지지했던 것입니다. 또, 이 인간이 왕권을 잡기 전에는 사실 이 인간이 어느 정도의 말종인지 국민들은 알 길이 없었지요.
적어도 그의 측근들과 친구들은 그런 사실을 미리 알 수도 있었습니다. 1807년에 1차로 일어난 부왕 카를로스 4세에 대한 반역 모의였던 에스코리알 모반(Conspiracion-proceso de El Escorial) 사건에서 추궁을 받자 의리 없이 혼자 살겠다고 자신을 위해 함께 반역 모의를 했던 친구들을 다 팔아넘기는 뻔뻔함을 보여준 바가 있었거든요. 1808년 바욘 (Bayonne)에서의 강제 퇴위 사건 때 잠깐 이 남자를 만나 본 나폴레옹은 페르난도에 대해 “하루에 4끼를 먹고 아무 생각이 없는, 자기가 본 왕족 중에 가장 멍청한 왕족”이라고 평가한 바가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스페인 국민들은 그런 사실을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 자가 알고 보면 프랑스에서 건너온 부르봉 왕가의 자손이라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스페인 사람들이 이성보다는 감성에 충실한 면이 좀 있거든요. 종교적으로도 광적이고요.
아무튼 페르난도 7세가 나폴레옹으로부터 연금 50만 프랑을 받으며 탈레랑의 영지인 발렝세 (Valencay)에서 대단히 편한 생활을 하는 동안, 스페인 국민들은 그야말로 피칠갑이 되어 끔찍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웃기는 일은 정작 마드리드의 최고위 귀족들은 ‘너희 자리는 유지될 거니까 걱정 붙들어 매라’는 나폴레옹의 약속에 따라 프랑스에 협조한 반면, 사회 밑바닥 계층을 이루던 민중들과 가난한 하급 카톨릭 사제들이 프랑스에 대한 항쟁에 가장 열혈적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들이 대프랑스 항쟁에 나선 이유는 프랑스가 스페인을 접수한 가장 큰 이유, 즉 세금을 뜯기는 것도 있긴 했습니다만, 무엇보다 국왕과 카톨릭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이 매우 컸습니다. 어차피 세금이야 그 전에도 전제 군주인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 및 토착 귀족들에게 착실히 뜯기고 있었거든요.
물론 귀족들이 모두 친일파, 아니 친불파는 아니었습니다. 5월 2일, 스페인 민중들이 들고일어나는 것을 본 후, 스페인 귀족들 상당수가 입장을 바꿔 민중들과 함께 반프랑스 투쟁에 나선 것입니다. 바일렌 전투의 영웅인 카스타뇨스 장군도 그런 귀족들 중 하나였지요. 처음에는 스페인 민중과 귀족들의 일치된 힘이 프랑스군을 압도하여 그들을 에브로 강 동쪽으로 밀어내고 아예 피레네 산맥 너머로 쫓아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지요. 상대는 나폴레옹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1808년 11월부터 제대로 된 스페인 침공을 개시하여 프랑스군을 저지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던 스페인군들을 너무나 간단히 제압하고 마드리드를 재점령했습니다. 스페인 저항 세력은 마드리드에서 쫓겨나 점점 서쪽으로 퇴각하다 결국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곳까지 물러나야 했습니다. 스페인 남서쪽 끝인 스페인 최대의 군항 카디즈(Cadiz)에 들어가 농성한 것입니다.
다행히 이곳은 긴 반도 끝에 위치한 요새로 이루어진 철옹성인 데다 바다를 영국 해군이 지켜주는 바람에 프랑스군의 포위 속에서도 꿋꿋히 버틸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 저항 세력은 카디즈 성안에 쳐박혀 있기만 할 뿐 프랑스군을 몰아내기 위해 군사적으로 딱히 크게 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매우 중요한 일을 하나 합니다. 헌법을 작성한 것입니다. 이전까지 스페인에는 헌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스페인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이어 부르봉 가문의 전제 군주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국왕이 스페인이라는 국가나 민중을 위해 이로운 존재였기 때문에 받들어 모시는 것이 아니라, 스페인이 국왕 것이므로 당연히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쳤던 것이지요. 왕권은 신이 내려주신 것이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신의 뜻을 받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카디즈 성채에 포위된 스페인 임시 정부가 스페인에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개념을 도입합니다. 바로 국민주권이었지요. 여태까지 국가라는 것은 곧 국왕이었으나, 이젠 그게 아니라 국민이 곧 국가 권력의 주인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스페인 임시 정부가 선포한 헌법은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진보적 조항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페르난도 7세가 스페인의 적법한 국왕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국민대표의 존엄성과, 사유 재산의 절대성,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 심지어 모든 성인 남성이 보편적인 투표권을 가진다는 것 등이었지요.
스페인은 당시 유럽의 후진국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국가의 발전은 영토의 크기나 인구수, 보유한 황금의 양이나 총칼의 수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런 점들에 있어서 스페인은 결코 약하지 않았습니다. 근대 국가 발전의 시작은 계몽주의 등 사상의 자유에서 시작되는데, 스페인에 부족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영국이나 네덜란드, 심지어 같은 카톨릭 국가였던 프랑스 등이 과학과 산업이 발전하며 민주적인 통치 제도를 이룬 것에 비해, 스페인은 광적인 카톨릭 원리주의에 사로잡혀 최근까지도 이단심판을 집행하던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스페인이 나폴레옹의 침공을 받았다고 갑자기 왜 무엄하게도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진보적인 선언을 하게 된 것일까요 ?
간단합니다. 평상시 부르봉 왕가에 붙어 부와 권력을 누리던 기득권 즉 귀족 세력이 카디즈 임시 정부에 없었던 것입니다.
귀족들 중 일부는 마드리드의 조제프 왕에게 협력하고 있었고, 또 많은 수는 귀족이 아닌 지식인 출신들이 모인 임시 정부에 합류하기보다는 각자의 지방에서 프랑스군에 맞서 싸우거나 혹은 아예 은거하기를 택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임시 정부에 모인 소위 진보주의자들은 귀족들과 고위급 사제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1812년 카디즈에서 매우 진보적인 헌법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마치 귀족들은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 프랑스 측에 붙었고 진보주의자들은 스페인을 위해 피를 흘린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꼭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스페인에 원래부터 있던 소수의 지식인들은 스페인 사회의 낙후성에 대해 한탄하며, 개혁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프랑스의 계몽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이들은 아프란쎄사도(Afrancesado, 영어로는 Francophiles), 즉 프랑스주의자, 또는 친일파 아니 친불파라고 불렸습니다. 이들은 애비나 자식이나 한심하기 짝이 없던 부르봉 가문의 왕들이 프랑스로 잡혀가고 프랑스 혁명의 산물인 나폴레옹 가문의 왕이 부임해오자 이를 스페인 개혁의 희망으로 받아들이고 협력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원래는 뭐 나쁜 뜻은 아니었던 아프란쎄사도는 그야말로 매국노와 동의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아직도 친미파, 친중파는 그리 나쁜 말이 아닌데 친일파라면 천하에 없는 개쌍놈으로 치부되지요. 아무튼 카를로스 4세 밑에서 재무장관을 하던 우르퀴호(Mariano Luis de Urquijo)를 비롯하여 많은 귀족과 지식인들이 아프란쎄사도로서 조제프에게 협력했습니다. 스페인의 거장 화가 고야(Francisco Goya)도 아프란쎄사도로 분류됩니다. 조제프의 궁정에서도 그림을 그렸거든요.
이런 아프란쎄사도들은 그렇게 조제프 왕에게 협력할 이유가 나름 있었습니다. 조제프는 1812년 스페인 임시정부가 발표한 헌법보다도 훨씬 더 먼저, 우수한 나폴레옹 법전에 근거한 꽤 합리적인 헌법을 발표했던 것입니다. 1808년, 부르봉 가문의 못난이 왕들이 강제로 퇴위당한 바욘(Bayonne)에서 승인되었기 때문에 바욘 법령(Estatuto de Bayona)으로 불리는 이 헌법은 ‘주권이 국민에 있다’라는 등의 혁신적인 선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국왕의 권력을 제한하고 법률 앞에서의 평등, 사법부의 독립성, 그리고 온갖 중세적인 구습들을 철폐하는 등 꽤 합리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특히 스페인의 일부 지방을 아예 프랑스로 편입하려고 했던 나폴레옹의 야욕에 맞서 (주제도 모르고) 조제프 왕은 스페인 왕국의 독립성을 유지하려고 꽤 애썼기 때문에 일부 스페인 귀족들과 지식인들은 차라리 조제프에게 협력하는 것이 현실적인 애국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물론 조제프가 들고 온 바욘 법령은 실제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스페인 민중의 불굴의 저항 때문에 실제 프랑스의 통치는 프랑스 장군들이 휘두르는 무자비한 폭력뿐이었으니까요.
우리나라에서도 일제시대 때 일본군에 자원하는 등 친일 행각을 벌인 인사들을 근대화라는 미명으로 미화하고 옹호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나, 글쎄요… 최소한 스페인의 경우에는 저렇게 프랑스에 협조한 인사들은 귀족이든 지식인이든 대부분 프랑스로 망명하여 끝내 용서받지 못하고 빈곤 속에서 삶을 마감했습니다. 고야 같은 경우는 ‘자신은 그림을 그렸을 뿐 정치적인 행동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라고 변명하며 뒤늦게 ‘5월 2일 마멜룩의 돌격’ 등 프랑스의 침공에 항의하는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지요.
아무튼 아시는 바와 같이 결국 프랑스군은 영-스페인-포르투갈 연합군에게 패퇴하여 피레네 산맥 동쪽으로 물러났고, 나폴레옹은 1813년 말 발렝세 (Valencay) 조약을 맺고 1814년에 페르난도 7세를 스페인으로 돌려보냅니다. 스페인 민중이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고 저항한 덕분이었지요.
그런데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돌아온 페르난도 7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자신이 없는 동안 만들어진 이 헌법을 폐지하는 것이었습니다. 페르난도가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혼자 힘으로 예전처럼 절대 왕정을 간단히 회복할 수 있다고 본 것이었을까요 ?
아니었습니다. 마드리드로 돌아오는 화려한 행렬 중에, 많은 귀족들과 사제들이 그를 찾아와 저 가증스러운 친불파 놈들이 만든 빨갱이같은 헌법이란 것을 없애버리라고 부추긴 것입니다.
제1, 2신분인 사제와 귀족들이 천한 평민들과 평등하다니! 그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거든요. 페르난도 7세는 이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진보주의자들이 만든 헌법을 뒤집어 버립니다.
프랑스 침략자들과 피를 흘리며 싸운 댓가로 얻은 이 소중한 헌법이 무너지는 것을 본 스페인 민중이 가만있었을까요?
가만있었습니다. 원래부터 스페인 민중은 헌법이 뭔지도 잘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프랑스에 맞서 싸운 가장 큰 이유는 프랑스 놈들이 카톨릭 교회를 욕보이고 자신들의 나랏님을 잡아간 악마라는 사제들의 이야기였거든요. 더군다나 자신들과 함께 싸운 사제들이 ‘저 헌법이라는 것을 앞세운 진보주의자라는 놈들은 사실 아프란쎄사도, 아니 친일파와 한통속이다’라고 하는 말을 안 믿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진짜 친일파, 아니 친불파들은 조제프와 함께 모두 프랑스로 도망친 뒤였지만, 친불파라는 단어는 강력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진보주의자들은 당연히 제정 분리를 추구하는 소위 세속주의(secularism, 비종교주의)자들이었으므로, 사제들은 그들을 증오할 이유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프랑스와는 달리 스페인은 신문이나 언론의 발달은커녕 국민들의 문맹률이 높아서 국민들이 높은 수준의 국민의식을 가지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달라진 프랑스의 국민 의식을 파악하지 못한 루이 18세가 다시 전제 군주 노릇을 하려 들자 다시 나폴레옹을 불러들인 프랑스 국민들과는 달리, 스페인 민중은 예전의 예속 상태로 되돌아가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이라고 소위 ‘깨시민’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라파엘 리에고(Rafael del Riego y Nuñez)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다음 편에 소개할 1808년 11월의 에스피노사(Espinosa de los Monteros)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포로가 된 뒤, 나중에 석방되어 독일과 영국을 전전하다 1814년에야 스페인으로 귀국한 장교였습니다.
귀국한 뒤 중령 계급으로 군에 복직한 그는 페르난도 7세가 헌법을 헌신짝처럼 폐기해버리는 것을 보고 분개하고 있었습니다. 1820년, 그에게 남미의 독립 전쟁을 진압할 병력에 대한 지휘권이 주어지자, 그는 1820년 1월 뜻을 같이하는 동료 장교들과 함께 카디즈에서 1812년 헌법의 복원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리에고의 부대는 카디즈에서 마드리드까지 행군을 하며 자유의 깃발에 민중이 함께 일어나주기를 바랬으나, 정작 무지몽매한 스페인 민중은 ‘뭐라는겨’하며 무심했습니다. 헌법의 의미가 무엇이고 전제 군주정과 입헌 군주제의 의미를 알아야 호응을 하거나 말거나 하지 않겠습니까 ?
하지만 다행히 일부 지방에서는 호응이 있어서, 그는 2달만인 3월에 마드리드에 무혈 입성하며 페르난도 7세의 신병을 확보했습니다. 페르난도 7세는 신으로부터 직접 받은 왕권이 무색하게, 마치 1807년 에스코리알 모반을 발각당하자 아버지 앞에서 설설 기었듯이 이 진보주의자들의 요구에 벌벌 떨며 굽신거렸습니다.
하지만 당시 유럽은 메테르니히가 이끄는 비엔나 체제 하에 있었습니다. 진보주의자들이 정당한 국왕을 포로로 잡다시피 한 스페인 상황을 우려한 유럽의 열강들은 1822년 12월 이탈리아 베로나(Verona)에 모여 스페인 사태를 논의한 끝에, 프랑스가 총대를 매고 스페인의 정국을 원상 복귀시키기로 합의합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합의한 것은 전제 군주정을 가진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프랑스였고, 입헌 군주국이었던 영국은 이 합의에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따라 1823년 루이 18세가 보낸 프랑스군 6만 명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을 침공합니다. 정말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군대의 총사령관은 루이 18세의 조카이자 훗날 샤를 10세의 아들인 앙굴렘 공작(Louis Antoine d’Artois, duc d’Angoulême)이 맡았고, 그 휘하에는 우디노(Nicolas Oudinot)와 몽세 (Bon-Adrien Jeannot de Moncey) 등 나폴레옹 휘하에서 맹위를 떨치던 장군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몽세는 끔찍한 살륙이 벌어진 1809년 제2차 사라고사(Zaragoza) 포위전의 지휘관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이승만이 4.19혁명을 진압하겠다고 일본군을 불러들인 꼴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공할 때와는 달리 스페인 민중은 이 프랑스군에게 적극적인 저항을 하지 않았습니다. 스페인 귀족들과 교회, 그리고 재산을 가진 시민계급은 오히려 이 프랑스군에게 동조했습니다.
불과 10여 년 전 프랑스군을 벌벌 떨게 만들던 스페인 민중들은 그저 ‘아유 나랏님을 잡아 가둔 역적들을 치러 왔다지 뭐여’ 하는 정도였습니다. 카톨릭 교회가 프랑스군을 지지했거든요. 몇몇 도시들이 프랑스군의 포위 속에 버티다 항복하는 정도였지요.
혁명 잔존 세력은 이젠 저항의 상징이 된 카디즈 요새로 페르난도 7세를 끌고 들어가 농성했습니다. 그러나 8월 말, 카디즈 요새 앞을 지키는 요새인 트로카데로(Trocadero)가 함락되자, 결국 혁명 세력은 페르난도 7세에게서 ‘법률을 준수하고 혁명 세력에게 자비를 베풀겠다’라는 서약을 받고 그를 석방하게 됩니다.
하지만 페르난도는 석방되자마자 혁명 세력들을 이 잡듯이 뒤져 척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5만 명이 체포되고 그 중 무려 3만 명이 처형되었으며, 혁명을 최초로 일으켰던 리에고도 9월에 체포되어 결국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습니다. 석방되기 전에는 굽신거리며 사면을 약속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처사였고, 또 너무 잔혹한 숙청이었습니다.
이 잔인하고 뻔뻔스러운 행동에 질려버린 프랑스군 사령관 앙굴렘 공작은 페르난도 7세가 수여하는 훈장을 거부함으로써 페르난도 7세에게 간접적으로 망신을 주었습니다.
1812년 헌법을 작성했던 스페인의 진보세력도 자체적으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가령 조제프의 바욘 헌법에서도 인정한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의 동등한 시민권을 인정하지 않는 등 다분히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속셈이 엿보였지요.
무엇보다, 그들은 배경을 잘못 골랐습니다. 모든 혁명은 민중의 지지를 얻을 때 성공할 수 있는데, 카톨릭 원리주의에 물들어 있던 스페인 민중은 혁명 사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건 마치 이란이나 아프간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겠다고 선교 활동을 떠나는 개신교 신자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행동이었지요.
오히려 나폴레옹이 써준 조제프의 바욘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카톨릭 신앙을 국교로 지정하는 등, 스페인 민중의 수준에 부합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흔히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의 말로 오해를 받는 명언, 즉 ‘모든 국민은 자신에게 걸맞는 정부를 가진다'(Toute nation a le gouvernement qu’elle mérite)라는 말에 대해, 저는 정말 딱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이 말은 사보(Savoy)의 외교관이자 법률가인 메스트르(Joseph de Maistre)의 명언이었는데, 유시민 씨가 정계를 은퇴한 이유도 요약하면 이 말이더군요.
그래서 저는 우리 사회가 좀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원문: Nasica의 뜻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