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교회에서 헌금설교는 금기 아닌 금기다. 돈으로 은총을 거래하는 면죄부에 대한 반박에서부터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했으니 교회가 돈 걷는 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것도 이해할만하다. 그렇다면 당시 면죄부를 팔던 중세교회와 그것을 반대하던 개신교회, 헌금의 총량은 어떠했을까?
당연히 당시 로마-가톨릭교회가 많았을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실제 역사는 그 반대다. 오히려 종교개혁기 동안, 그리고 그 이래로 루터교회에 헌금과 기부, 자선이 훨씬 늘었다는 점은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여기서 우리는 왜 종교개혁 교회에 헌금과 기부 자선이 늘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당연히 중세에도 헌금, 기부 자선은 늘 있었다. 다만 ‘왜 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중세교회 교인들이 기부하고 헌금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나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돈 주고 구원을 구입하는 것이다. 거래 상대는 하나님이다. 죽은 다음의 생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중세시대 헌금의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1339년 뉘른베르크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콘라드 그로스(Konrad Gross)가 도시 한 가운데 직역해서 ‘성령병원(Heilig-Geist-Spital)’이라는 것을 세웠다. 이 병원설립 문서에 이런 글귀가 나온다. “나를 위해 현세의 것들을 하늘의 것과 교환하려 한다.” (물론 이 당시만 하더라도 일반인을 위한 병원이 아니었다.)
무슨 뜻일까? 죽은 다음 천국 가기 위해 이 땅에서 번 돈으로 병원을 세웠다는 말이다. 땅에 없어질 돈으로 영원한 생명과 교환하겠다는 이 생각이 바로 중세교회의 생각이었다. 당시 헌금과 기부, 적선은 바로 이런 생각에서 행해졌다.
헌금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영생으로 보답할 것이라는 이런 생각은 오늘날 개신교인들이 헌금을 내면서 하는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이처럼 구원을 ‘거래’ 또는 이 생의 것과 ‘교환’하려는 중세 헌금, 기부 사상은 종교개혁의 시작과 함께 최초의 위기를 겪게 된다. 헌금의 최고봉이며 일상이라고 할 수 있는 면죄(벌)부를 루터가 비판했기 때문이다.
당시 교권주의자는 개신교의 출현을 단순한 교리적 위험으로 보지 않았다. 한편 종교개혁 정신으로 인해 헌금이나 자선, 기부가 사라져 교회의 실질적 운영이 타격을 입게 될 것으로 보기도 했다. 이런 논리를 종교개혁을 감행한 개신교회에도 적용해보면 모든 개신교회는 운영을 못 하기에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종교개혁 교회는 이것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단적인 예다. 1523년 종교개혁 정신이 지배하고 있던 뉘른베르크에서는 시의회가 열렸고(뉘른베르크는 종교개혁 당시 비텐베르크 다음으로 꼽히는 제2의 종교개혁 도시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여기서 시 의회 서기였던 라자루스 슈펭글러(Lazarus Spengler)는 자선과 기부 헌금을 “위대한 신앙의 열매”라고 칭하면서 이렇게 기술한다.
이 사랑의 행위는 올바르고 살아있는 신앙에서 오는 열매들이다. 적선과 기부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행할 수 있는 선한 행위이며, 그렇기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웃을 위해 유익하고 선하게 사용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종말의 때에 하나님 앞에서 이런 선한 일에 관해 답변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궁핍하고 가난하고 고난받는 이웃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었는지,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약한 자들에게 옷을 입히고 방문하며 도와주고 섬겼는지 각자 답변해야 할 것이다.
우리와 달리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명령하지도 않은 많은 일들, 다시 말해 허다하게 많은 예배와 웅장한 교회 건축, 그리고 순례 여행 같은 (기독교와 상관없는) 유사행동을 했는지 심판의 때에 엄숙히 답변해야 할 것이다.
내세의 나의 구원 vs. 현세의 이웃을 향한 실천
종교개혁자들은 ‘사랑의 의’, 즉 사랑의 실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초기 개신교인들에게 헌금 기부와 자선, 선행은 죽음 이후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 또는 영혼의 안식처를 준비하기 위한 투자나 저축이 아니었다. 저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이었고,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약한 이웃을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헌금, 자선, 기부 같은 선행의 목적은 오직 이 땅의 이웃을 돌보는 것이며 처음부터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 눈물을 흘리는 자들, 과부와 고아들, 그리고 공부하며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한 일이어야 한다는 것을 종교개혁의 역사는 누누이 가르친다.
개신교회의 헌금 정신은 바로 이런 것이다. 개인 구원의 목표를 위한 기부와 자선, 헌금이 아니다. 공익을 위하고, 가난하고 우는 이웃을 위한 것, 즉 이웃의 짐을 함께 지는 것이며, 자라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며, 선한 미래를 위한 투자다.
21세기 한국 개신교회는 헌금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 종교개혁의 후예라고 하는 한국의 천만 성도가 운집한 교회엔 여전히 자기 영혼과 교회 건축을 위한 헌금이 넘쳐난다. 정작 가난한 자, 우는 자들, 그리고 우리 미래의 아이들을 위한 공익적 헌금은 기대치 이하다. 돈 쓰는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이웃사랑을 위한 회개의 실천이며, 종교개혁 정신의 실천이다.
덧
이 글은 헌금 정신에 대한 원론적인 글이다. 현실적으로 교회 운영을 유지하기 위한 경상비, 인건비 등은 중세시대와 환경이 다르다. 그럼에도 교회의 헌금을 어떤 방향으로 사용해야 할지 고민해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원문: 최주훈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