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는 암흑기가 아니다. 종교심이 충만했던 시기이다. 그러나 중세는 암흑기다.
한국교회는 암흑기가 아니다. 종교심은 여전히 충만하다. 그러나 암흑기다.
돌파구는 없는가?
1. 중세는 암흑기가 아니다.
중세는 거의 완벽한 종교세계였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교회가 책임지는 성례전 시스템은 중세인들의 삶의 기초가 어디에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중세인들의 종교적 열정과 열심은 대단했다. 예를 들어, 중세 초기 기독교는 무엇보다 수도원 중심이어서 경건의 삶과 예배에 대한 저술이 활발했다. 종교개혁기 직전이던 15세기만 하더라도 교회 건축프로그램들이 왕성했고, 순례 여행 역시 활발했으며, 성물 수집도 유행했다. 그 당시를 “신비 문학의 범람기”라고 한 것만 보아도 종교적인 열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2. 중세는 암흑기이다.
중세, 특별히 15세기는 ‘종교적으로 왕성한 시대, 그러나 암울한 시대’였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선 종교인들의 악폐와 타락상이다. 비판거리가 너무 많아서 교황부터 말단 수도사까지 예외 없었다.
교황? 15세기는 일명 ‘르네상스 교황시대’라 하여, 가톨릭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할 정도로 부패한 교황들이 줄을 잇던 시대다. 예를 들면 교황 알렉산더 6세(재위 1492-1503) 1492년 추기경단에 돈을 뿌려 교황이 되었다. 그런데 그는 교황이 된 이후로도 몇 명의 정부(情婦)를 거느리고 있었고, 알려진 사생아가 최소 7명에 이르렀고, 심지어 교황청 부근에 수도사를 위한 공창지역을 만들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군주론>의 위대한 저자 마키아벨리는 이와 같은 ‘부도덕한 시대의 원인은 바로 교황의 부도덕에서부터 시작했다.’고 일침을 놓기도 했다.
교황만 그런가? 매관매직은 성직에도 비일비재했다. 1451년 아마데오 8세는 교황청을 매수하여 8세였던 자기 아들을 제네바 시의 주교로 임명했다. 돈이면 주교도 될 수 있고, 교황도 될 수 있던 시대였다.
하위 성직자들도 문젯거리였다. 문맹인 사제들이 수두룩했고, 이로 인해 뜻도 모르고 앵무새처럼 나불거리던 라틴어 미사 경문들은 평신도들의 높아진 지적 수준으로 인해 점점 조롱거리가 되어 갔다.(15세기 도시의 경우에는 실제로 평민들의 문맹률이 점차 해소되기 시작했다) 성직자를 향한 이런 종류의 불만이 ‘불평문학’(grievance literature)이란 장르까지 만들어 낼 정도였으니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점차 한계를 드러냈다. 결정적인 역할은 교육을 통한 평민들의 지적 수준이 높아진데 기인한다. 여기에는 인문주의학자들의 공도 간과할 수 없다. 인문주의는 르네상스의 근간을 이루는 세계관이다. “원천으로 돌아가자”(ad fontes)는 그들의 구호는, 고전에 대한 유려하고 탁월한 교양만 추구한 것이 아니라, 성서 원문 연구에 대한 중요성도 부각시켰다.
에라스무스는 1503년 출간된 <그리스도의 군사에게 주는 안내서>에서 교육받은 평신도 남녀들에게 아래와 같이 강력하게 주장한다. “교회의 미래는 성서를 아는 평신도들의 등장에 달려 있다.” 단순한 주장이 아니었다. 평신도들의 자기 인식의 수준과 폭이 교회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그런 신념 하에, 에라스무스는 1516년 희랍어 신약성서를 출간하기에 이른다.
이 출간은 당시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여겨지던 라틴어 성서(불가타)의 권위를 정면으로 도전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는 불가타 성서의 필사본과 원문을 꼼꼼히 대조 확인하였고, 원문을 임의로 바꿔 놓은 곳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었다. 이는 불가타의 권위에 도전한 것 뿐 만 아니라, 교회 신학자들이 독점하고 있던 교리의 근간을 흔들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당시 신학자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옹호할 때 가장 근간으로 사용하던 불가타 요한일서5:7-8의 번역이 원문에 없는 내용이 임의로 삽입되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당시 불가타 역에는 “하늘에서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이는 셋이 하나니라”라는 구절이 있었다. 지금은 없다.) 원문을 읽을 줄 아는 인문학자들의 등장은 성서 해석의 독점권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던 로마 교회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성서를 원문으로 읽어야 한다는 요구는 서유럽 전역에서 폭넓은 지지를 얻었고, 르네상스가 표방한 이상향을 목표로 삼은 대학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그 대학들의 공통점은 ‘희랍어, 히브리어, 라틴어’에 능통한 교수를 채용하고, 그런 학생들을 길러내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에스파냐의 알칼라 대학교(1499),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교(1502), 옥스퍼드 대학교의 코르푸스 크리스티 칼리지(1517), 벨기에의 루뱅 대학교(1517), 파리의 왕립 콜레쥬 드 프랑스가 그 예다. 그래서 루터가 신생대학이었던 비텐베르크 대학을 종교개혁의 본거지로 삼고 있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3. 암흑기가 아니지만 암흑기인 중세, 그리고 지금
종교심으로 따지면, 15세기는 암흑기가 아니다. 그러나 지적 수준으로 보면 암흑기였다. 이 암흑기를 뚫고 나온 것은 단순히 몇 명의 지식인이나 개혁가들의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보다 깊은 이유를 찾아보자면, 평신도 스스로 성서를 읽고, 진리가 무엇인지 스스로 깨달아 질문하던 시도에서 그 원동력을 찾는 것이 맞아 보인다.
지금 한국교회는 어떤가? 종교심으로 따지면 암흑기가 아니다. 중세 유럽과 마찬가지로 21세기 한국은 종교심으로 넘쳐나는 곳이고, 각종 신앙 서적이 넘쳐나고, 교회 건축에 열을 올릴 정도로 열심이다. 그러나 ‘가나안 성도’가 상징하듯, 바른 진리에 목말라하는 암흑시대다.
해결책은 무엇일까? 역사에서 배워보자. 21세기 한국교회는 ‘르네상스 교황기’를 방불케 하는 수치스런 시기를 지나고 있다. 그렇다고 부패하고 윤리 의식 없는 목사들, 교권에 아부하는 신학대학만 욕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스스로 성서를 읽고, 종교적 권위에 질문을 던지는 용감한 신자가 많아져야 한다.
신앙의 이름으로 부패한 성직자를 추종하지 말라.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맹신이다.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할 줄 아는 계몽된 신자들이 늘어야 한다. 그래야 수준미달의 목사, 교권의 수액으로 연명하는 빈대신학자들의 자리가 줄어들고, 그 자리에 진짜들이 자리 잡을 수 있게된다.
원문: 최주훈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