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예수님이 성전을 저주하셨을까?” 여기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오늘 설교를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두 렙돈을 헌금한 여인의 이야기
여기에는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가 한 가지 나옵니다. 홀로 된 여인과 두 렙돈의 이야기입니다. 내용은 다 아실 것입니다. 홀로 된 여인이 자기 전 재산인 두 렙돈을 성전 헌금함에 넣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본문으로 어떤 설교를 들어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보통 이 본문은 헌금 설교로 이용되는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헌금은 액수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고, 낼 때 온 마음과 정성을 다 바쳐야 한다.”는 식으로 설교해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본문이 가진 원래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 본문은 헌금 설교보다는 교회의 본분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유를 설명해 드립니다. 우선 이 본문의 앞뒤를 살펴보십시오. 두 렙돈 이야기의 앞쪽인 막12:38절부터 40절까지 내용에 회당의 높은 자리 앉은 자들과 서기관들을 삼가라는 말씀과 함께 40절에 이런 말씀이 덧붙어 있습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과부의 가산을 삼킨 종교지도자들이 더 중한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다음 이야기가 44절까지 이어지는 두 렙돈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13:1부터 “성전의 돌 하나도 남기지 않겠다”는 예수님의 진노, 그리고 13:3부터는 세상의 종말과 심판에 관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 것일까요?
자, 두 렙돈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12:40 말씀을 보면, “서기관이 과부의 가산을 삼켰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당시 문화를 이해하면 빠를 것입니다. 당시엔 남편이 죽고 친족이 없는 경우, 그 재산을 서기관들이 관리했습니다. 그래서 “가산을 삼켰다”는 말은 과부의 재산을 서기관들이 탈취했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 당연하게 여겨졌던 악법입니다.
이 악습을 고발한 후, 예수님은 헌금함 앞에 자리를 깔고 앉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어떻게 헌금하는지 유심히 관찰하고 있습니다. 그때 많은 부자들이 헌금함에 많은 돈을 넣었고, 그사이 가난하고 힘없는 한 여인이 그곳에 와서 두 렙돈을 넣는 것을 보게 됩니다.
41절부터 이어지는 구절을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부자는 많이 넣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을 눅9:17을 참조해보면, 배부르고 남은 돈을 헌금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눅 9:17; 12:15 참조) 그러나 과부는 이미 부족한 중에서도 두 렙돈을 전부 넣게 됩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 쉽게 바꿔보면, 부자는 헌금하고도 쓸 것이 풍족히 남아있지만, 과부는 헌금 후에 남아 있는 돈이 없었다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이 여인이 헌금한 두 렙돈이 어떤 돈인지 아셔야 합니다. 렙돈은 당시 화폐 단위에서 가장 작은 동전입니다. 한 렙돈에 천원 꼴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두 렙돈은 2천원 꼴입니다. 당시에 두 렙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비둘기 한 마리 정도입니다. 어쨌든 여인은 이 돈을 헌금했습니다.
여인은 왜 두 렙돈을 헌금했던 것일까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이 여인이 넣은 헌금이 한 렙돈이 아니라 두 렙돈이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두 렙돈을 자발적으로, 감사가 우러나서 넣었다면 우리가 보통 말하는 좋은 헌금의 모범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 렙돈을 어쩔 수 없이 넣을 수밖에 없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실제로 당시 성전법에 따르면, 한 렙돈은 헌금할 수 없도록 원천 봉쇄되었고, 최소한 두 렙돈을 넣어야 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에 오면 반드시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제사를 드리기 위한 최저선이 바로 비둘기 한 마리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최소한 비둘기 한 마리를 바치든지 아니면 한 마리 값을 헌금해야 하는데, 한 렙돈으로는 비둘기 반 마리밖에 안 되는 것이기에 결국 두 렙돈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당시 성전법을 고려해서 이 본문을 읽어 내려간다면, 이 여인의 형편이 어떤 것인지 분명해집니다. 이 여인은 남편을 잃고 홀로 된 여인입니다. 홀로 된 여인이기에 그녀의 재산은 이미 성전에 빼앗긴 상태입니다. 게다가 가지고 있던 두 렙돈도 어쩔 수 없이 헌금했다는 말이 됩니다.
어쩔 수 없이 헌금했다는 말의 또 하나의 근거가 있습니다. 본문을 잘 읽어보시면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동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이런 헌금이 아름답고 복되다”, “이런 게 진짜 헌금이다”라는 칭찬의 말씀은 여기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은 43절에서 “이 여인이 헌금한 돈이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많다”고만 말씀하십니다.
이 내용은 누가복음 21:1-4절에도 똑같이 나오는 사건입니다. 앞뒤 문맥도 여전히 동일합니다.
종합해볼까요? 이 본문은 홀로된 여인을 모티브로 삼는 아주 특별한 말씀인데, 당시 성전의 부패를 고발하는 시사고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가 성전법과 권위로 가난하고 힘없는 자를 착취하는 것에 대한 고발인 셈이죠.
그런데 여기서 더 기가 막힌 것이 있습니다. 44절에서 예수님은 이 두 렙돈을 가리켜 “홀로 된 여인의 생활비”라고 언급하십니다. 이 말은 하루 벌어 살아야 하는 이 여인의 하루 품삯이라는 뜻입니다. 불쌍한 여인이 하루 온종일 일해서 번 모든 돈을 성전에 헌금으로 내야만 했습니다. 왜요? 당시 성전법이 그러했고, 서기관과 제사장들은 매일 같이 그렇게 헌금하도록 설교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그런 설교를 했을지도 생각해볼 만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지금 예수님과 이 여인이 있는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대왕이 46년간 백성의 고혈을 뽑아 세운 성전인데, 건축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이런 성전법을 만들었고, 이 법에 따르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설교를 했기 때문입니다. 말이 설교지 이것은 힘없는 자를 향한 협박입니다. 순진하고 불쌍한 이 여인은 오늘 끼니를 거르더라도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자기 일당을 모두 헌금한 것입니다.
이 사건 다음에 곧바로 13장으로 이어집니다. 무슨 이야기가 나옵니까? “바로 그런 성전을 돌 하나도 남김없이 다 무너뜨리겠다.”는 예수님의 진노가 바로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을 단숨에 읽어 내려가면 마가복음서 기자의 비통한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힘없는 여인의 동전 두 개가 성전을 무너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헌금하는 사람들을 관찰하였는가
제가 앞서 이 본문은 헌금 설교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린 이유를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또 한 가지 찾을 수 있습니다.
막12:41절 말씀입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헌금함에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이 구절의 원문을 풀어 읽으면 상당히 의아해집니다. “헌금함에 대하여 앉았다”는 것은 ‘헌금통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아있다’라는 말인데, 이것보다 더 이상한 것은 ‘보실새’라는 동사입니다. 원래 ‘뚫어지게 관찰한다’는 뜻이기 때문이죠.
41절 말씀의 상황을 여러분 머릿속에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이제껏 성전에서 여러 말씀을 하신 예수님이 헌금통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시더니 그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아 헌금하는 사람들을 뚫어지게 관찰한다는 내용입니다.
왜 이런 행동을 하셨을까요? 이제껏 천국에 대한 아름다운 말씀을 하시던 분이 갑작스레 돈에 관심이 생겼기 때문일까요?
어떤 분이 이 구절로 이렇게 설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헌금을 신앙의 척도로 보신다는 것을 이 행동을 통해 보여주신다. 왜냐하면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헌금 많이 하고 축복받으라.”라고 하더군요.
아니오. 절대 그런 것 아닙니다.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돈에 관심이 있거나 돈이 필요해서 그런 괴상한 행동을 보이신 것도 아닌 데다가, 헌금하는 만큼 복을 주겠다는 그런 값싼 장사치 속을 드러내는 장면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 낯선 행동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류의 낯선 행동을 구약의 예언자들에게서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이사야는 삼 년 동안 발가벗은 몸으로 지냈고, 호세아는 음란한 고멜과 결혼 생활했으며, 예레미야는 돈 주고 산 새 그릇을 사람들 보는 앞에서 산산 조각내버립니다. 에스겔은 갑자기 칼을 들어 자기 머리카락과 수염을 잘라내고 던지고 태워버리기도 하고, 390일 동안 왼편으로만 누워 자고, 40일 동안은 오른편으로만 자는 괴팍스러운 행동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예언자의 상징적 행위’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헌금함 앞에서 보여주는 행동도 이런 류에 속합니다. 이런 낯선 행위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헌금을 얼마나 하는지 관찰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목적은 성전이 해야 할 기능을 바르게 수행하고 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가치
성전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성전을 가리켜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전은 세상에 깃든 모든 고통의 눈물을 하늘로 맡기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하나님을 만나 깊은 교제를 하는 곳입니다. 이 집은 누구도 소외될 수 없습니다.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지식 있는 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할 것 없이, 누구나 평등하게 하나님 앞에 들어와 안식할 수 있는 곳입니다.
성전 안에 들어온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따뜻한 품을 누릴 수 있고, 우는 자의 눈물이 닦여지는 곳이어야 하며, 병든 자에겐 건강의 희망을 만들어 주는 곳이고, 배고프고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곳이 아니라 배불리 먹고 살아갈 힘을 만들어내는 곳이며, 죽음에 직면한 자가 영생의 소망을 만들어 내는 곳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성전은 세상을 위해 마련된 하나님의 대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들어가신 그 예루살렘 성전은 그런 기능과 전혀 상관없는 곳이었습니다. 오직 한 가지, 건축에 들어간 돈과 서기관과 제사장의 배를 불리는 데만 집중했던 것이죠. 이 때문에 예수님은 헌금통 앞에 자리를 깔고 앉으셨고, 눈을 부릅뜨고 집중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나오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일갈하십니다. 막13:2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이 큰 건물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성전이 필요 없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이 자기 기능을 못 할 때 무너뜨리겠다는 말씀입니다. 가난한 자, 배우지 못한 자, 집 없는 자, 힘없는 자, 어린아이와 노인, 홀로 된 여인, 사회적 소외계층을 품지 않고 업신여기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의 존재가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어떤지요? 이제 우리 교회는 곧 창립 50주년을 향해 달려갑니다.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위해 헌신하고, 헌신할 수 있는 그런 미래를 준비하며 힘을 함께 모으고, 그 일을 위해 세상으로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되지 않을까요?
끝으로, 오늘 본문 말씀을 돌아보면서 한 가지만 짧게 생각하고 마치겠습니다. 홀로된 여인의 두 렙돈이 성전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거꾸로 한 번 뒤집어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작은 두 렙돈이 무너져가는 성전을 다시 살릴 수 있습니다.”
두 렙돈, 아주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두 렙돈이 교회가 교회된 모습, 교단의 어른이라는 분들과 신학자, 목회자, 교회의 모든 제직들, 모든 성도들이 본분에 충실히 일상을 일구어낸 열매, 하나님의 뜻을 귀하게 여기며 살아간 감사의 결과물, 하나님 원하시는 대로 이웃을 위해 사용될 저와 여러분의 일상이라면, 이 작은 두 렙돈이야 말로 무너져가는 교회를 다시 세울 수 있는 기둥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렙돈은 성전을 무너뜨리는 저주의 화약고가 아니라 무너져 가는 교회와 세상의 회복제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겐 이미 두 렙돈으로 불릴 만한 일상의 위대한 선물들이 가정, 직장, 교회에 무수히 많습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일상 한가운데서 작은 것도 귀하게 여기며 교회다운 교회,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시는 복된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원문: 최주훈 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