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 논문 쓸 때였다. ‘허균의 불교시’를 주제로 논문 초고를 써서 선생님께 보여 드렸다.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에 있는 한시를 읽고선 ‘불교적’이라고 생각할만한 시 30여 수를 뽑았다. 본문 중에 이런 글이 있었다.
“위의 시는 허균의 ○○적 취향을 보여주는 유일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선생님은 차분하게 말씀해 주셨다.
“자네 이것 좀 보게. 논문에선 ‘유일하다’는 말을 쓰면 안 되네.”
“왜요?”
“나중에 후속 연구자가 다른 작품을 찾아낼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이 작품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연구자도 있을 것이고. 자신 있게 쓰는 건 좋지만, 늘 이런 걸 조심해야 하네. 가능성을 열어 둬야 하는 거야.”
“아. 그렇군요. 주의하겠습니다.”
“아닐세. 처음이라 의욕이 앞서고, 작가한테 애정이 있다 보니 그런 거야.”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럽다. 이때부터 ‘단정 짓는’ 글쓰기는 하지 않게 되었는데 대중서를 쓰다 보니(대중서는 논문 쓰는 방식과 조금 다르다) 탁탁 끊어서 매듭짓는 버릇이 다시 들었다. 어쨌든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그나마 논문 한 번 써 봤다고 석사과정 후배들의 글에 구멍이 보이기 시작했다.
구멍이라고 해 봐야 별거 아니다. 예전에 내가 했던 실수를 그대로 하고 있었다. ‘유일하다’는 자주 보였고 글을 써 놓고 ‘큰 의의가 있다’는 식으로 매듭을 짓는 경우도 있었다. 그야말로 ‘큰 의의’가 있으면 좋으련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렇게 ‘큰 의의’가 있다면 선배 연구자들이 건드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희박하게 마련이다. 딴에 선배라고 후배한테 이렇게 말해 줬다.
“너 이 작가한테 애정이 있지?”
“네. 그렇죠.”
“‘크다’고 하는 건 네 생각일 뿐일 수도 있잖아. 이 논문에 의의가 없다는 게 아니고, 네가 근거를 확실하게 제시를 했어도 연구자들이 읽고선 ‘크지 않다’고 판단하면 어떡할 거야?”
“그럼 어떻게 써야 돼요?”
“‘이러한 이유로 의의가 있다고 본다’ 정도로 쓰는 게 낫지. 움츠러드는 게 아니라 ‘크다’ ‘작다’는 건 읽는 사람이 판단하는 거야. 작가한테 애정이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게 글에 반영되면 자기도 모르게 편파적으로 서술될 가능성이 높아. 과도한 해석이 나올 수도 있고… 연구자들은 너의 ‘애정’을 보려고 하지 않아. ‘네가 연구한 작가의 문학’을 보는 거지.”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는 건가요?”
“사람이 쓰는데 어떻게 감정이 안 드러날 수 있겠어. 그런데 논문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쓰는 글이잖아. 감정이 드러나는 표현은 쓰지 않는 게 좋지.”
“그렇군요.”
“나도 잘 안 돼. 노력하는 거지 뭐.”
“또 다른 주의사항이 있을까요?”
“방금 말한 거랑 비슷한 건데… 어떤 발표문을 보면 자기 작가에 대한 애정이 지나쳐서 “아무개의 문학이 지금껏 연구되지 않은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고 하는 경우가 있잖아.”
“네. 그렇죠.”
“그러면 거의 백 퍼센트 선생님들 지적이 이렇게 나와. ‘연구 안 할 만하니까 안 했겠지. 그게 왜 안타까워?’ 어떡할 거야, 하하하. 그렇게 대단한 작가면 박사들 눈에 안 보였겠냐? 다 보이라는 법은 없다만 연구가 안 된 거엔 또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지.”
“그래도 좀 너무하네요. 하하하.”
“좀 그렇지? 그러니까 ‘안타깝다’고 하려면 왜 안타까운지 그 이유가 확실해야 하는 거야. 그런데 이유를 대더라도 그 안타깝다는 건 그 사람의 마음일 뿐이잖아. 읽는 사람이 ‘이게 뭐가 안타까워’ 이러면 끝인 거야. 거기다 대고 ‘이게 왜 안 안타깝냐’고 물을 거야? 다시 말하지만, 논문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쓰는 글이잖아. 필자의 주관을 쓰되 감정을 드러내면 설득력을 잃어.”
“…….”
“쉽게 말해 ‘감상문’을 쓰면 바로 퇴짜를 맞는다는 거야. ‘나는 이 작품이 좋다’ 이러면 안 돼. ‘이 작품은 어떤 배경에서 지어졌으며, 작가의 어떤 면이 드러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무엇을 알 수 있다’고 쓰는 거지. 좋다 나쁘다를 쓰면 그건 논문이 아니라 수필이겠지. 그건 또 다른 문제겠고….”
요 며칠 스트레스가 쌓여서 옛 생각을 하며 스트레스를 푼다. 글로 쌓인 건 글로 풀어야겠지.
원문: 김재욱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