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글이 매력적인가 자주 고민합니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면서 더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제가 쓴 글이 매력적이지 않다는 불만 때문이지요. 뭐랄까. 너무 건조하다고 할까요? 직업상 건조한 글을 계속 써서 그런지, 아니면 사람 자체가 매력이 없어서인지 제 글에는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읽고 좋아해 주는 글이 꼭 좋은 글이라 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글을 통해 소통하고자 하는 저로서는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글이 좋은 글일까요. 아니, 조금 세분화해서 어떤 글이 매력적인 글일까요? 연암 박지원의 문장론에 관해 예전에 썼던 글을 다듬으며 제 글쓰기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호불호가 갈리긴 하지만 연암 박지원은 당대 사람들이 모두 인정하는 문장가였습니다. 기존 틀을 벗어난 그의 글은 당송의 일부 문장만 최고로 치던 시대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런 대문장가인 연암이 생각했던 좋은 문장이란 어떤 것일까요?
정민 선생의 『비슷한 것은 가짜다』에 소개된 연암의 글 「종북소선자서(鍾北小選自序)」에서 연암은 좋은 문장의 조건으로 ‘성색정경(聲色情境)’을 강조합니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라는 말에서 강조하듯 연암은 다른 이를 흉내 내기보다 자신의 것을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남을 닮지 않는 나만의 것, 즉 정체성이 담긴 글을 중요시했습니다.
그렇다고 다름 자체가 최고의 선은 아닙니다. 다르되 법도를 갖추어야 합니다. 좀 까다롭죠? 그 법도가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성색정경이 그 법도 중의 하나가 아닐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성색정경은 연암의 말이고 이에 해석은 정민 선생의 『비슷한 것은 가짜다』에 기반 뒀으되 제 표현으로 풀어쓰고 제 생각대로 가감했음을 알려드립니다).
1. 문장에는 소리(聲)가 있어야 합니다. 이는 과거 어떤 이의 말이 지금 옆에서 들리듯 생생해야 한다는 것일 수도 있고, 문장이 마치 대화를 나누듯 부드러워야 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울림이라 생각합니다. 소리는 울림이 있어야 전달이 됩니다. 울림이 크기 위해서는 파장이 맞아떨어져야 합니다. 반대로 어떤 경우는 울림이 상쇄되어 아무리 큰 소리라도 종래 잦아 들어갑니다.
문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글 안에 담겨있는 글자 하나하나가 읽는 이의 마음을 때림으로 울림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공감이지요. 읽는 이가 공감할 수 없는 글은 소리가 안 납니다. 나더라도 잡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2. 문장에는 색(色)이 있어야 합니다. 색에는 화려한 색도 있고 은은한 색도 있습니다. 화려함은 은은함이 받쳐줄 때 더 빛을 발하고, 화려함에 대한 실증을 잠재워 줄 수 있는 것은 은은함의 끈기입니다. 문장에도 색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화려한 문장의 기교로 말하고자 함을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순간에는 평이한 문장으로 오히려 더 강한 효과를 낼 수도 있습니다. 강조하고자 맘껏 드러낼 수도 있고, 강조하고자 살짝 감추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 둘 사이의 미묘한 저울질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문장의 색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능력. 그 능력이 필요합니다.
3. 문장에는 정(情)이 있어야 합니다. 굳이 외롭다 구구절절 표현하지 않아도 가을 하늘 날아가는 외기러기의 울음 하나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깎지 않아 길어진 손톱으로 시간의 흐름과 또 처해있는 곤궁함을 알릴 수 있습니다. ‘뚜벅뚜벅’ 말아먹는 비빔밥 한 사발로 슬픔과 의지를 동시에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자연과 사물은 그대로지만, 그 위에 ‘내’가 비추어짐으로 내 마음을 대신 말해줍니다. 열 마디 말보다 더 진하게 감정을 나타내 주는 그것. 문장 안에 그것을 담을 줄 알아야 합니다.
4. 문장에는 경(境)이 있어야 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의 얼굴에는 눈코입을 그리지 않는 법입니다. 하지만 초상화에는 눈썹, 입술, 얼굴의 표정까지 자세히 그립니다. 눈앞의 광경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고 좋은 그림이 될 수는 없습니다. 미묘한 저울질. 생략할 것은 생략하고 강조할 것은 강조함으로 사물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문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햇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다채로운 빛깔로 나타나듯이, 사물은 작가의 눈을 통하여 제각금의 빛깔을 드러내야 합니다. 수십 가지의 이야기들이 작가의 마음을 통하여 생략과 강조를 거쳐 하나의 경치로 나타나야 합니다. 할 말을 다 해 버리면 경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아픈 사랑의 이별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시를 쓰지 말라’는 다소 상투적인 표현을 연암도 사용합니다. 하지만 그는 아픔을 아프다고 쓰지 말라고 말합니다. ‘사랑을 말하되 그 사랑을 담담히 감정의 체로 걸러 사물에 얹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정신의 귀와 마음의 눈을 통해 농축된 정밀한 표현, 그것이 연암이 말하는 좋은 문장의 조건입니다.
휴, 다시 연암의 성색정경을 곰곰이 씹어 보니 아직 갈 길이 멀다 느껴지네요. 시인은 타고난다고 하잖아요. 아무리 노력해도 다다를 수 없는 영역이 있지나 않을까 지레 마음을 사리게 됩니다. 그래도 욕심부리지 않고 한 번에 한 발자국씩 걸어가다 보면 얼추 흉내는 내지 않을까 싶네요. 그러다 1년에 한두 번 정도 제 글에도 소리와 색과 정과 경치가 담길 때가 있겠지요. 그때를 기대해 봅니다.
원문: 쉐아르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