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이지은이 노래하는 이야기보다 더럽게 길고, 재미없고, 우울하기까지 한 한지은, 그리고 수많은 다른 지은이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여자친구, 여동생, 딸이 있거나 또 다른 어떤 여성들을 사랑하며 살아갈 남성이라면 한 번쯤은 읽기를 부탁하는 글이다.”
1.
내가 피해자로서 기억하는 첫 성추행은 여섯 살 때였다. 혼날 것이 두려워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후 기억이 희미한 성추행들이 몇 차례 있었고, 용돈 준다며 길에서 따라오는 아저씨들이 또 몇 있었다. 내가 배우던 학원 강사가 아이들의 치마 속을 촬영하다 구속되었다. 몇몇 친구들이 초경을 시작하고 젖가슴이 나오기 시작할 즈음에는 이전보다 학교와 부모의 ‘몸단속’이 강화되지만, 성인들의 욕망어린 시선을 인지하는 능력은 그보다도 이후에나 생긴다. 그 때부터는 공포와 불편이 따라다니는 여성의 삶이 시작된다.
그런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 겨우 열 세 살짜리 여동생이 도서관에서 성추행을 당하고 줄줄 울며 집에 들어왔다. 왜 우냐는 말에도 벌벌 떨며 대답을 않다가, 이틀이 지나서야 부모가 아닌 언니에게만 “내가 괜히 교복치마를 입고 가서”를 시작으로 말을 꺼냈다. 열 세 살이 교활하게 교복치마를 입고 가서 아저씨를 자극했던 걸까. 스무 살의 나는 숨이 그만 턱 막혔다.
올해 4년차 과외선생으로 일하며, 어린 딸을 가진 부모들이 어떻게든 여교사를 찾는 그 심리를 누구보다 잘 안다. 또 그 아이들이 여선생인 나를 믿고 풀어놓는 일상의 이야기 곳곳에서 내가 느끼며 살아왔던 성폭력의 불편과 공포를 본다. 등교길의 변태들, 노골적이고 불쾌하지만 지적하면 예민한 년이 되는 그 시선들과, 길거리의 히죽거림과 음담패설, 몰카 공포. 왜 이런 것들은 10년이 지나도 무섭도록 그대로인지.
일베는 그렇게들 욕하는 남성들이, 교실에서 기지개하는 여학생들을 찍은 뉴스 사진에 (젖가슴이) 크고 아름답네, 발육이 좋네, 발기찬 아침이네 하는 댓글을 달고 추천을 누르는 걸 본다. 남학생의 교복과 여학생의 교복이 같은 함의를 갖지 않는 사회에 우리는 산다. 여자아이가 사라지면, 부모도 수사기관도 성범죄자에 의한 유괴부터 의심한다. ‘아청아청’, ‘철컹철컹’거리며 허술한 아청법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런 조롱으로나마 아이들을 성적 대상화하는 것에 대한 금기적 인식이 뿌리내리면 다행이라 나는 생각했다.
아이들이 원치 않은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고, 또 쉽게 범죄의 표적이 된다는 건 이제 이 사회의 슬픈 상식이 되어 버렸다. 소아성애나 그 표현이 위험하지 않다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차마 이를 부정하지는 못한다.
2.
내가 써 내려간 나의 경험이 누군가에게 충격일 수 있다면, 그건 대개 남성들에게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성인인 한국 여성 중 살면서 어떤 종류의 성폭력에도 노출되어 본 경험이 없는 여성이 있기는 할까. 그리고 대개 그 첫 피해의 경험은 아동일 때 시작된다. 남성들이 “피해자가 가상의 아이냐”, “비판자들 중 (진정성 있는) 소아성애 피해자가 몇이나 되냐”며 빈정거리는 것은 그들의 경험과 공감 부족을 여실히 드러낸다. 현재 성인인 여성 다수는 소아성폭력 혹은 그 위협의 생존자이고, 그것이 소아성애 표현에 대해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훨씬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이 여성에게서 구하는 성적 흥분은 늘 여성의 미성숙함에 한 발을 걸쳐 두는 듯하다. 어린 아이들에게서 섹스어필을 탐닉하고 요구하면서, 성인 여성에게는 아이같은 순종을 요구한다. 여자 아이에서 성인 여성으로 살아온 나는, 나에게 가해지는 후자의 폭력에는 이제 성인으로서 저항할 수 있다. 그러나 전자의 폭력에 대해, 나는 여성으로서의 아픔과 성인으로서의 죄책을 항상 함께 느낀다.
여성인 이상 높은 확률로 전자의 폭력을 겪으며 자랐을 테고, 후자의 폭력에도 적극적으로 저항하기보다 타협하여 살아가는, 나와 동갑내기인 한 여성 가수가 대단한 악인이라 생각지 않는다. 피해자의 자기 파괴적인 생존 전략 역시 그것이 구조에 부역한다는 이유만으로 질타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녀가 후자의 폭력에 타협하는 방식으로서 전자의 ‘가해’에 편승하는 것에 나는 지극히 분노한다. 성인인 그녀가 자신보다 약한 아이들의 성을 판매하는 것이, 피해자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나는 생각지 않는다.
대중문화가 후자의 폭력을 판매하는 방식을 볼 때마다, 나는 기만당하고 조롱당하는 기분이다. 갓 스물부터 스물 여덟아홉의 여성들이, 모로 보나 10대처럼 보이는 화장과 옷차림으로 섹스어필을 한다. 누군가 그에 대한 불편함을 내비칠 때 그 여성들의 주민등록 숫자를 보증서마냥 지적하며 발끈하는 남성들은, 정작 그 여성들이 그 숫자에 걸맞게 꾸미고 말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 여성들이 법적 성인인 것은, 그 여성들의 자유보다는 그녀들의 소아 흉내를 소비하면서도 스스로가 소아성애자나 범죄자로 낙인찍힐 일이 없다는 남성들의 만족에 더 기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상이다.
하지만 그래서, 그간의 불편함을 ‘젖병’이 등장하고 ‘그거 5살 아이에 관한 노래에요’라는 작사가의 인터뷰가 등장해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나는, 참으로 비겁한 어른이다. 전자와 후자가 결코 분리되지 않는 폭력임을 설득해 낼 능력이 없던 무능한 어른이다. 그런데 이제 “고작 젖병 갖고 시비냐”고 쉽게들 말하는 그 고작 젖병이, 내게는 내 비겁과 이 사회의 비겁이 밟고 선 마지노선처럼 보인다. 아무리 무능하고 비겁해도, 성인 여자가 립스틱 바른 입술로 젖병을 빨아대는 그림과 ‘다섯 살의 섹시한 유혹’을 연출하는 대중문화가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는 할 수 있어야 한다.
3.
소아성범죄자들은 늘 사랑이라 주장하고, 피해자들은 폭력이라 주장한다. 성인 피해자들조차 자책을 쉽게 떨치지 못하는데, 소아는 애초에 본인을 향한 욕망과 폭력을 분석하거나 규정할 능력부터 미숙하다. 거기에 더해 자신이 입은 피해를 언어로 구체화하여 전달하지도 못하고, 주변의 성인들에게 자신이 가해자를 사랑하거나 유혹하지 않았음을 입증할 부담에까지 시달린다.
성폭력을 당하고도 부모에게 혼날 것부터 두려워하는 아이들이, 가해자의 눈치를 보고, 경찰의 눈치를 보고, 이웃들의 눈치를 본다. TV와 인터넷을 통해 사회의 눈치를 본다. 가해자도, 경찰도, 이웃들도, TV와 인터넷, 사회에서 주도적으로 여론을 생성하는 것도 모두ㅡ 아이들보다 똑똑하고 말 잘하고 힘 있는 성인들이다. 성인은 그런 권력이다.
“어른 말을 공손하게 잘 따라야 된다”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된다”고 말해온 무책임한 어른들이, “아이도 섹시할 수 있고, 성인을 유혹할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하고 싶어한다. 아이들에게 적용되는 저 세 방향의 요구가 만나면, 아이들은 가장 (권한이) 약하면서 동시에 책임은 모두 떠안는 존재가 된다. 물론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 모순을 비판적으로 인지하지도, 어른에게 항의하지도 못한다.
소아성애 표현에 대한 논의마저도 “그런 표현을 (소비)한다고 소아성애자가 아닙니다”, “위험한 소아성애의 기준이 뭡니까”, “본능이냐, 치료 가능하냐”, “실패한 표현이었을지언정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라는 항변들에만 유독 머무르는 것은, 성인들의 이기적인 자기방어를 낱낱이 보여준다. 이런 항변들은 철저히 성인의 시각일 뿐이다.
성범죄자 뿐 아니라 “어린 게 벌써 색기가 줄줄 흐른다”, “범죄야 나쁘지만 요즘 애들은 영악해서 또 모른다”라는 소리가 아직도 너무 쉽게 나오는 사회와도 생존을 걸고 싸워야 하는 아이들을 두고, 자신들이 떠들 권리와 낙인찍히지 않을 틈을 찾는 데만 급급해 있다. 소아성애자가 아니니, 소아성폭력을 저지르지 않으니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건가? 아이들이 소아성범죄와 싸우는 건 그들의 문제니까, 범죄자가 아닌 자신에게는 어떤 의무도 들이대지 말라는 걸까?
4.
거듭 말하지만, 소아성애적 표현을 접한 성인들이 소아성애자가 될까봐, 성범죄를 저지를까봐 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성인들의 자기중심적인 착각이 아닌가.) 그런 표현이 만연한 사회는 이미 피해를 입은, 그리고 언제 피해를 입을지 모르는 소아들의 혼란과 부담, 자책을 가중시키기 때문에 하지 말라는 거다. 미숙한 소아에 비해 이미 권력 우위에 있는 소아성범죄자들과 그 옹호자들의 입지에만 편향적으로 힘을 실어주기 때문에 하지 말라는 거다.
성애에 관하여 소아의 주체적인 입장과 목소리는 발화 이전에 구성되는 것부터 힘들기 때문에, 균형을 위해서는 대신 성인들의 소아성애 표현에 제재를 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소아들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있다 한들, 그 역시 성인의 목소리이지 소아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다. 제 목소리를 내어 스스로를 변호할 수 없는 이를 위해 모두가 말을 하지 않을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그 이에 ‘대해’ 말하는 것은 삼가고 제한할 필요가 있지 않냐는 말이다.
이에 반대하는 이들은 소아성애 피해를 입은 아동이, 그런 피해 경험이 없는 성인 남성을 이해시킬 수 있는 언어로 자신의 피해를 개념화하여 설명하고, 성인들이 주장하는 권리에 맞서 자신의 권리를 쟁취해 내길 기대하는 건가? 그래서 성범죄자들이 선하면 되고, 아이들이 똑똑하면 될 일을, 왜 죄 없는 내 입을 막냐고 이야기하는 건가?
5.
성범죄자들이 당신의 소아성애 표현을 악용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소아성애 표현이 이미 기울어진 저울의 한 편에 필연적으로 올라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게 성인이 아이들에게 지녀야 할 최소한의 책임의식이다. 아이는, 당신의 무게까지 더해진 사회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성인 여성이 아니다.
아이들은 성애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을 두려워 하고, 그 폭력이 성애로 몰릴 것을 다시 두려워 한다. 그런 아이들 앞에서 소아성애를 묘사할 권리는 부득부득 주장하면서도, 고작 ‘소아성애자나 범죄자로 몰리는 마녀사냥’이 그렇게나 억울하고 두렵다는 이 나라의 어른들이ㅡ 나는 부끄러워도 너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
분노보다도, 시작도 끝도 모를 미안함에 며칠째 잠을 이루기 힘들다. 더 이상 비겁해지고 싶지 않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글을 끄적이는 것 뿐이다. 참담한 심정이다.
덧.
논란이 된 노래와 영상에 나 역시도 상처를 받았지만, 그런 표현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더 큰 상처를 받았고. 지금은 내 상처보다 나의 비겁함과 무력함이 두려워지는 시점이다. 내 삶에 꾸준히 신뢰와 위안, 행복과 용기를 주고 있는 극히 소수의 남성들에게, 진심어린 사랑과 감사를 보낸다.
원문: 한지은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