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렇게 설파하였다.
인간이 자신의 정부를 결여한 순간 그들의 권리는 최소한으로 축소되고 어떤 권위도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남지 않았으며, 어떤 기구도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국가 없는 이들에게 소수자들로서 국가적 권리의 상실은 인간적 권리의 상실과 동일시되었다.
그녀는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는 길은 특정한 ‘정치공동체’에 속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으며 실제 역사에서도 한 집단에 속해 시민의 권리를 가지지 못하면 아무런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국가 혹은 국민국가는 인간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 그토록 중요하다는 것이다. 유태인이 나치의 야만성 앞에 속수무책 당한 이유도 그들에게 국민국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민족국가가 탈취당했을 때 한국의 민중은 이중의 착취에 시달려야 했다. 민족국가를 상실한 자들의 고통은 극에 달하였다. 그들은 최소한의 ‘인간의 조건’마저 누리지 못하였다. 그러니 일제 치하의 민중들이 민족국가를 그토록 열망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된다. 징용에 끌려간 우리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들께서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던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를 부를 때, 그들의 열망은 제대로 된 국민국가였다.
이런 열망은 의병운동, 동학농민운동, 3.1독립만세, 나석주,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자발적 희생은 물론 이름 없는 투사들의 독립운동으로 표현되었다. 오로지 하나의 열망! 국민국가(nation-state)의 설립, 바로 그것이었다.
나라 없는 설움이 사무쳤다. 중국 애들이 우리를 ‘고려노예’라거나 망국노(나라 없는 노예)라고 놀려대면 싸우기도 했다.
이런 여성독립운동가 오지선 지사의 말도 같은 맥락이다.
근대사회에서 국가(state)는 민족(nation)의 기반 위에 확립되었다. 그 때문에 근대사회 이후의 국가는 주로 민족국가 혹은 국민국가(nation-state)로 불린다. 민족은 다양한 이유 때문에 형성되었다. 동일한 혈연집단이 민족의 출발점이 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하지만 강, 산맥, 바다 등 지리적 조건 때문에 형성되기도 하고 동일한 문화로 인해 형성된다. 오랜 세월 역사적으로 굳어져 온 문화도 있지만 특정 지배세력에 의해 갑자기 조작된 문화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처럼 경제적 이유 때문에 민족이 된 경우도 있다.
내가 민족에 대해 이리 장황하게 설을 푸는 이유는 비록 실재하는 사회단위이긴 하지만 민족, 그리고 민족국가를 영원불변의 뭔가 거룩한 존재로 착각하지 말 것을 당부하기 위함이다. 민족은 실재하는 ‘문화적 단위’며, 민족국가는 인간의 조건을 위해 필요한 ‘정치적 단위’다. 하지만 실재하고 필요하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불변하거나 무조건 정의롭고 선한 현실은 아니라는 말이다.
한 민족은 다른 민족에 대해 ‘고유성’을 갖는다. 고유성은 구성원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성’으로부터 도출된다. 공통성이 강조되면 ‘우리’ 의식이 집단을 지배하게 된다. ‘우리’는 배타주의와 침략을 정당화한다. 히틀러의 독일 ‘우리주의’는 ‘우리’가 인류를 불행하게 만든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뿐이 아니다. 민족의식에 눈이 멀면 가진 자에 의한 착취, 지배자의 악행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그들에 의해 ‘우리 안’에서 자행되는 불평등과 불의, 몰염치에 대해 눈 감게 된다. 우리가 남이가? 그냥 넘어가자! 민족이 이런 배타성, 침략성, 맹목성을 내포하고 있으니 많은 이들이 민족, 민족국가에 대해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것은 참으로 당연하며 그들의 태도는 실로 과학적이라고 볼 수 있다. 실재하는 민족 안에서 실재하는 불의도 함께 보자는 말이다. 민족과 민족국가는 이 정도만큼 ‘상대화’되어야 한다.
민족을 이렇게 상대화시키는 연구방법은 새로운 사실에 눈뜨게 한다. 우리로 인해 고통받는 ‘우리 밖’의 눈물을 볼 수 있고 ‘우리 밖’에서 나부끼는 ‘정의’의 깃발에 주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숱한 독립운동가들이 스러져간 서울 서대문형무소. 이곳에서 숨진 순국선열 165명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 앞에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2009~2010년)가 무릎을 꿇었다. 구두를 벗고 추모비 앞 제단에 국화를 올린 그는 무릎을 꿇은 채 10여 초간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두 차례 절을 올리고서야 무릎을 뗐다. 그는 “진심으로 죄송하다.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며 잔혹했던 일제 식민지배를 사죄했다.
우리 밖에서 이처럼 힘차게 펄럭이는 정의와 양심의 깃발은 우리 안에서 자행되고 있는 불의와 양심불량과 심히 대조된다.
박수를 받으며 등단해 ‘먼저 가장 급한 일은 반도 민중에게 고루고루 일본 정신문화의 진수를 확실히 통하게 하고, 진정한 정신적 내선일체화를 꾀하여 이로써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고 말하며 구체적 방책들을 제안한다.
누가 한 말일까?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의 아버지 김용주가 1943년 10월 일제의 조선 청년 징병제를 찬양하면서 한 말이다.
물론 여기서 끝낼 내가 아니다. 몽매한 보수정당 지지자들은 극구 외면하거나 모르고 있지만 잘 알려진 사실을 한 번 더 언급하자. 우리나라, 곧 ‘민족국가’를 통치하고 있는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는 일본 제국주의를 위해 개와 말이 되도록 충성하는 혈서를 쓰고 일본군 장교로 활약하였다. 그도 우리 안에 존재한다.
1939년 3월 31일 만주국에서 일본인들이 발행하는 <만주신문>에 희한한 기사가 실렸다. 이 신문은 7면에서 ‘혈서 군관 지원’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렇게 보도했다.
’29일 치안부 군정사 징모과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교사) 박정희(23)군의 열렬한 군관 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 합격증명서와 함께 ‘한목숨 다 바쳐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담당자를 감격시켰다.’
또, 이 신문은 박정희 훈도가 편지에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라고 적었다고 전했다.
민족은 실재하는 문화적 집단이다. 민족국가는 필수적인 정치적 공동체다. 하지만 우리 밖에서 힘차게 펄럭이는 정의와 양심의 깃발과 달리, 우리 안에 이렇게 못된 양심불량자들이 활개치며 우리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광목 70년, 뜬금없이 야단이다. 그래도 괜찮다. 이왕 그렇다면 쉬고 있는 박근혜에게 ‘우리’를 성찰해 보자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차기 대통령에게는 김구 선생님이 열망한 진정한 우리나라, 진정한 민족국가를 건설해보자고 조언하고 싶다.
원문 : 한성안 교수의 경제학 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