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우리는 ‘국민교육헌장’을 누가 빠른 속도로 암송할 수 있느냐를 두고 시합하곤 했다. 빨리 외느라 막판엔 혀가 얼얼하고 숨이 차 오르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박정희 유신독재 아래서 중고등학교를 다녔으니 영롱하신 그분의 존엄성과 영도력만 배웠다. 그리고 독재가 가장 효율적이며 적절한 정치체제라고도 배웠다. 나아가 경제성장과 조국근대화의 역사적 사명 앞에서 무력과 폭력은 항상 정당화되었다.
‘평등’과 ‘사회’는 가장 불온한 언어였고, ‘민주주의’란 배부른 놈들이나 하는 몽환적 언어일 뿐이었다. 학교는 물론 대중매체마저 그러하니 온 사회가 보수꼴통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아무도 ‘진보’를 말할 수 없던 시절이다. 나아가 진보를 입에 올리면 가차 없이 처단해 버리니, 사람들은 진보를 두려워하였다. 아무런 도움이 안 되며 개인에게 해를 끼치기만 하니 사람들은 급기야 진보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보수적 언어의 시장 독점
그러니 시장(market)은 진보적 언어 대신 성공, 이윤, 경쟁, 기회주의, 무관심, 무자비, 차이 등 차가운 보수의 언어를 공급했다. 독재정권은 보수적 언어의 시장을 육성하고 보호하였다. 진보공포증에 시달리는 소비자의 보수적 언어에 대한 수요도 폭증하였다. 그러자 너도나도 보수언어의 공급자로 변신하였다. 시장적 주체들은 보수적 언어를 ‘자유롭게’ 공급했다. 진보적 언어와 경쟁할 필요가 없는 ‘독점시장’에서 보수적 언어의 공급자는 번영을 구가하였다.
시장은 진보적 언어를 공급하지 않았다. 언어시장에 대한 진입이 차단되었기 때문이지만 더 중요하게는 시장의 소비자 중 아무도 대가, 곧 가격을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장은 진보적 언어의 공급에 실패하였다. 왜 그런가? 자신에게 상업적 이윤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 평등, 연대, 박애, 인권, 민주와 같은 진보적 언어들은 인간의 삶에 필수적이다. 이것 없이 인간적 삶은 달성될 수 없다. 시장이 공급에 실패한 이 언어들은 ‘비시장적’ 주체들에게 맡겨졌다. 대학생, 기자, 작가 등 1970~80년대 지식인들이다. 많은 시장 수요자들이 이를 외면하고 조롱하였다. 독점적 장벽은 강화되었다. 이 공급자들은 갇히고, 생활터전마저 잃었다. 시장에서 퇴출되자 시장 밖에서 그들은 먹고살 길이 막막하였다.
하지만 엄혹할 뿐 아니라 돈마저 안 되어 희망조차 없어 보이는 이 환경에서도 이들은 공공의 이익과 공공의 선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갖고 진보적 언어에 대한 공급을 중단하지 않았다. 살인마 전두환 정권 아래서도 이들은 진보적 언어를 공급하였다. 상업적 이윤 동기와 무관하게 ‘시장 밖에서’ 그것을 공급하였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하자. 덕분에 시장 ‘밖에’ 서 있던 사람들도 이 언어에 내재해 있는 고품질의 ‘진보적 가치’를 점차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진보적 언어의 시장 진입, 그리고 한겨레신문의 창간
1987년 6월 항쟁으로 독재정권이 물러났다. 진보적 언어의 수요자들도 소비의 자유를 되찾았다. 진보적 언어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였다. 수요자들은 가격을 기꺼이 지불하고자 하였다. 드디어 진보적 언어에 대한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진보가 상품화되다! 엄혹한 세월을 견뎌 온 진보적 언어의 공급자들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1988년 5월 15일 이들은 한겨레신문을 창간하였다. 그들은 드디어 시장을 통해, 시장 안에서 먹고 살게 된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모든 조직은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학교가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삼듯이 신문이나 방송은 대중에게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객관적 사실’을 보도한다. 이 중 진보적 매체는 진보적 언어로 이 목적을 수행한다. 이 모두 ‘시장 밖에’ 있는 목적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보적 매체의 종사자들은 언어를 ‘상품’으로 공급하며 ‘시장 안에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장 저편의 목적을 추구하면서도 시장을 벗어날 수 없다! 이 모순은 진보를 지향하는 자들이 스스로 짊어진 멍에다. 벗어던질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를 누리지 않는다. 온갖 고난을 감수하고서도 말이다. 인생은 참으로 부조리하다. 그리고 한 가지로 간단히 환원하기 힘들 정도로 이처럼 다원적이며 복잡하다.
요즘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세상이 난리다. 반대주장을 희석시키기 위해 정부가 여론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주요 일간지에 교육부가 국정화 찬성 광고를 실었다. 인터넷신문에서 우연히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했다. 한겨레신문이 이 광고를 실었는데, 거기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다. 페이스북을 넘겨보니 몇몇 페친들도 이에 분노하고 있었고, 어떤 분은 MBC에서 해고된 이상호 기자의 한겨레신문에 대한 분노를 공유하고 있었다. 이 기자는 오늘부터 한겨레신문을 끊고 경향신문을 구독하기로 했단다.
한겨레신문의 정부 광고에 대한 문제제기에 반대한다
그런데 나는 거기에 별 공감이 가지 않는다. 누군가 말한다. 광고도 기사의 일부라고. 하지만 말이면 단가? 왜 광고가 기사의 일부인지 아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 광고는 광고고 기사는 기사 아닌가? 광고를 기사로 환원시키는 방법론은 ‘깨끗한 일관성’을 보여줄 순 있어도 현실적 유용성은 없다. 현실 세상은 그처럼 깨끗하지 않고 누추하다.
진보적 가치를 지향하기 때문에 광고의 게재범위가 무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진보적 매체라도 상품인 이상, 항상 시장의 저편에만 서 있을 수는 없다. 나는 진보적 지식인들이 시장에서 항상 패배함으로써 풍찬노숙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시장 안에서도 최소한 ‘재생산’되기를 바란다. 더 나아가 크게 성공했으면 좋겠다. 이 경우 ‘진보’와 ‘시장’의 공유공간을 개척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유럽의 ‘사회적 시장’이나 ‘사회민주주의’는 이런 고민의 결과이며, 진보가 이루어낸 일종의 ‘혁신’이다.
나아가 정부의 정책을 광고로 싣는 행위가 공분하여 신문을 끓을 정도로 진보적 가치를 훼손하는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사실 나는 한겨레신문이 이 광고를 싣지 않았더라면 정부가 국민의 혈세로 그런 못된 활동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사기업의 매매춘광고나 부동산투기광고, 무기판매광고가 아니라면 정부기관에 관한 이 정도 광고는 내게 경영난에 처한 진보신문의 일종의 ‘혁신’이라고 보인다(내가 좀 오버했나?).
이 부조리하고 복잡한 세상사를 하나의 원인으로 섣불리 환원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일보의 전진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안다면 그리 분노할 게 못 된다. 나는 한계 상황에서 번민하는 한겨레로부터 오히려 연민을 느낀다.
한겨레, 끝까지 살아남아라! 적어도 내 자식에게까지는 평생 독자 되게 설득해 볼 테니. 음, 내 조카들에게도 권유해봐야겠다. 그래야 기자들이 시장 밖에서도 굴하지 않고 진실을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정의와 민주주의는 물론 자유, 평등, 박애, 연대, 인권, 휴머니즘의 따뜻한 언어가 냉혹한 시장의 동토(凍土)도 녹여 줄 것이기 때문이다.
원문: 한성안의 경제학 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