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5일 우리는 한국전쟁 휴전 60년 만에 다시 맞은 전쟁 위기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판문점을 바라봤다. 북한이 최후통첩과 준전시 상태를 선포하고 숨돌릴 겨를 없이 전쟁으로 치닫던 순간들과 판문점에서 이루어진 60여 시간 피 말리는 남북 간 회담을 보며, 나는 분단국가이자 휴전 상태의 한반도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한반도가 전쟁이냐 평화냐의 긴장감으로 피를 말리던 그때, 사실 미국 시민들은 한반도 전쟁위기보다 다른 전쟁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전쟁이냐 평화냐를 두고 또다른 회담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982년부터 무려 33년간 미국 본토를 비롯해 전 세계 곳곳에서 계속해 온 전쟁, 매년 수백만 달러의 전쟁 비용을 소모하고 있는 바로 그 전쟁.
왕과 광대의 전쟁
이른바 ‘왕(King)’과 ‘광대(Clown)’간의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맥도널드와 버거킹 간의 햄버거전쟁이다. 미국 양대 패스트푸드 체인점 간의 피 튀기는, 아니 케첩 튀기는 마케팅 전쟁은 벌써 30년 넘게 단 한 번의 휴전도 없이 계속됐다. 그 오랜 햄버거전쟁에 휴전을 제안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판문점에서 남북 고위급 회담이 40시간 넘게 지속되고 있던, 8월 25일. 뉴욕타임스와 시카고 트리뷴지에는 버거킹의 전면 광고가 실렸다. “맥도널드에게 보내는 버거킹의 공개서한”이라는 제목의 전면 광고에는 “안녕, 맥도널드”라는 첫 문장을 시작으로 이른 아침 신문을 읽던 사람들 눈을 휘둥그레하게 만드는 획기적인 제안이 담겨 있었다.
“안녕, 맥도널드”
버거킹은 이 공개서한을 통해 맥도널드와 오랜 햄버거전쟁을 잠시 멈추고, 평화로운 햄버거 세상을 위해 협력하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해왔다. 무슨 햄버거 빵 찢어지는 소리일까? 잘 보면 지뢰 폭발과 남측 군인 부상에 ‘유감’을 표명한 남북 합의문보단 훨씬 말 되는 소리다.
다가오는 9월 21일 UN에서 제정한 “세계 평화의 날 (International Day of Peace)”을 맞아 이날, 버거킹과 맥도널드는 서로를 공격하는 모든 마케팅 활동을 중단하고 평화를 상징하는 버거킹-맥도널드 합작 햄버거를 판매하자는 것이다.
맥도널드 대표메뉴 ‘빅맥(Big Mac)’과 버거킹의 대표메뉴 ‘와퍼(Whopper)’를 합쳐서 평화의 햄버거인 ‘맥와퍼(McWhopper)’를 세계 평화의 날이자 햄버거 평화의 날에 같이 판매하자는 제안이다.
버거킹의 이 제안은 아주 구체적이었다. 일단 맥도널드 본사가 위치한 시카고와 버거킹 본사가 위치한 마이애미의 정확히 중간지점인 애틀랜타에서 양자가 만나 맥도널드-버거킹의 합작 매장을 세우자는 것이 첫 제안이다.
그리고 그 매장에는 양측에서 같은 수의 인원을 매장직원으로 파견한다. 직원들은 양측의 브랜드 색깔과 로고가 모두 들어간 복장을 착용해야 한다. 물론 햄버거 포장과 가게 인테리어도 양측 브랜드 색이 절반씩 공평하게 드러나는 디자인을 제안했다.
맥와퍼를 먹고 싶다
기대감은 버거킹에 대한 찬사로 이어지기도 했다. 매년 서로 비방하느라 쓰던 수백만 달러의 판촉 비용을 평화의 햄버거로 소비자에게 선물하자는 버거킹의 대범한 제안에 버거킹에 대한 소비자 인식은 매우 긍정적으로 바뀌어 갔다.
버거킹은 진짜 휴전을 원했을까?
햄버거전쟁의 휴전 여부를 떠나, 사실 이런 버거킹의 과감한 휴전 제의가 가능했던 배경과 목적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버거킹은 정말 버거전쟁을 끝내고 휴전을 원했을까? 현상만 보면 본질을 제대로 알 수 없다. 북한이 먼저 회담을 제안했다는 현상만 가지고 북한이 궁지에 몰렸다든가 북한이 평화를 더 선호한다고 판단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마찬가지로 버거킹의 제안에 어떤 배경이 있는지, 숨은 목적은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버거킹의 마케팅 전략을 보면 이번 휴전제의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30년간의 버거전쟁에서 불안과 갈등을 먼저 일으킨 쪽은 버거킹이기 때문이다. 맥와퍼라는 그럴듯한 휴전 제안 뒤에 숨은 버거킹의 또 다른 모습을 살펴보자.
끊임없이 상대를 도발하는 노이즈마케팅
위 광고들을 한 번쯤은 봤을 것이다. 버거킹에서 몰래 와퍼를 사는 로널드 맥도널드의 모습이 당시 소비자에게 큰 웃음을 줬다. 버거킹의 비교광고는 맥도널드를 끊임없이 자극하며 소비자 머릿속에 버거킹이 맥도널드의 경쟁자라는 인식을 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제품 간 경쟁구도는 소비자에게도 큰 관심사 중 하나다. 나이키와 아디다스, 코카콜라와 펩시콜라, 밀러와 버드와이저 등 소비자 머릿속에 경쟁관계로 떠오르는 제품들이 있다. 이 경쟁관계의 리스트에 맥도널드와 버거킹이 추가됐다.
맥도널드는 버거킹과의 경쟁구도가 매우 불편하고 억울한 일이다. 매출이나 매장 규모 면에서 버거킹이 맥도널드의 상대가 되기에는 사실 자격 미달이었다. 2012년 매출 자료에 따르면 맥도널드는 연 매출 280억 달러, 버거킹은 20억 달러로 10배 이상 차이가 났다. 직원 수도 맥도널드는 42만 명, 버거킹은 3만4천 명으로 서로 대등한 경쟁자라고 말하기에는 체급 자체가 달라 보인다.
하지만 버거킹은 끊임없는 노이즈 마케팅으로 규모와 상관없이 소비자 인식에 두 회사가 경쟁자로 굳어지게 했다. 버거전쟁이라는 말도 사실 버거킹이 만들어 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저렴한 복제메뉴 출시와 독자제품의 성공
이런 경쟁 구도는 2010년 미국의 경기 악화와 함께 더욱 심화됐다. 소비가 위축하고, 소비자들이 가격에 민감해지기 시작하면서 버거킹은 맥도널드의 대표 제품들과 유사한 제품들을 출시하되 더 저렴한 가격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로 버거킹의 ‘Satisfrie’는 맥도널드 감자튀김보다 40% 지방이 적고 낮은 칼로리에 가격도 절반 수준이었다. 또, 맥도널드의 대표 메뉴인 ‘맥립(Mc Rib)’에 대항해 ‘BBQ Rib sandwich’를 단돈 1 달러에 출시했다. 심지어 맥도널드의 자존심인 빅맥을 직접 공략하는 ‘빅킹(Big King)’을 출시하기에 이른다.
맥도널드의 대표 메뉴를 유사하게 따라 하되, 더 저렴하게 판매하는 전략은 미국 경기불황기에 매우 성공적인 전략이었다. 소비자는 더 저렴하면서도 푸짐한 버거킹 메뉴에 매료됐다.
하지만 버거킹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독자적인 메뉴를 개발하는 데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맥도널드 유사 제품을 싸게만 파는 전략은 후속 경쟁자들에 의해 다시 쉽게 모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버거킹이 독자 개발한 대표 메뉴 중에 하나가 바로 ‘치킨 프라이 (Chicken Fries)’다.
2005년 처음 개발해 소개됐던 치킨 프라이는 제품명 그대로 닭고기를 감자튀김 모양으로 길쭉하게 튀긴 제품이다. 한시적으로 출시한 이 제품은 판매가 중단되자 재출시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이 일어날 정도로 마니아층에게 사랑받았다. 그 이후로도 계절상품으로 출시됐다가 올해 3월부터는 정식 메뉴로 미국 전역에서 판매 중이다.
뒤이어 출시된 ‘Extra Long Pulled Pork 샌드위치’도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 두 신제품은 올해 상반기 버거킹 매출을 끌어올리며 작년 대비 매출 8% 증가라는 놀라운 성과를 만들었다. 반면 맥도널드는 같은 기간 2% 매출이 감소했을 뿐 아니라 해외시장에서도 0.2% 성장이라는 매우 부진한 성과를 보였다.
맥도널드 대표메뉴들은 복제메뉴 출시로 가격경쟁을 하고, 동시에 신메뉴 출시로 새로운 고객층을 공략하는 버거킹의 상품전략은 투자자들에게도 호평받으며 앞으로 버거킹의 성장을 예측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집 비운 맥도널드
맥도널드는 왜 버거킹의 이러한 공세에 적극 대응하지 않는 걸까? 버거킹의 공세에 대응하는 것 자체가 버거킹 의도대로 둘 사이 경쟁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이라 자제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맥도널드는 패스트푸드 시장에서 벌어지는 전쟁보다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대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건강한 음식에 대한 소비자 관심이 점점 높아져 가고, 반면 패스트푸드 유해성에 대한 소비자 반감은 갈수록 높아져 갔다.
맥도널드는 패스트푸드만으로 더이상 성장할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슈퍼사이즈 미(Super size me)’ 등 다큐멘터리와 각종 뉴스 보도로 맥도널드는 패스트푸드 외에 다른 시장으로 사업을 확대하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경쟁자가 방심할 때 빈집을 털자
맥도널드는 새로운 시장을 공략하고 있었다. 바로 커피와 아침식사 시장이다. ‘맥카페(McCafe)’라는 스토어명으로 스타벅스와 던킨도넛이 장악하고 있는 커피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해서 지금은 전 세계에 300여 개 매장으로 확장해 나가고 있다.
스타벅스보다 저렴하지만 스타벅스만큼 좋은 품질의 커피라는 포지셔닝으로 점차 규모를 확대해 나가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스타벅스를 제치고 시장점유율 1위를 지키고 있다. 또한, 맥도널드 매장에서는 신선하고 건강한 아침식사 메뉴를 판매하는 데에도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시장은 이미 타코벨(Taco Bell), 던킨도넛 등이 장악하고 있어 맥도널드는 아주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버거전쟁에 이어 ‘Breakfast War’라고 까지 불리는 이 시장은 현재 심각한 가격경쟁으로 수익성이 좋지 않다 여겨진다.
맥도널드가 이렇게 커피전쟁과 아침식사전쟁으로 정신없을 때, 버거킹은 패스트푸드 시장에만 집중하며 기존 맥도널드 고객을 빼앗고 있다. 다른 패스트푸드 업체들도 점차 패스트푸드 외에 다른 시장에 투자하고 있는 반면, 버거킹은 오직 패스트푸드 시장에 모든 자원을 집중하고 있다. 마치 빈집털이범과 같은 전략이다.
맥도널드의 마스터 플랜
올해 1월 맥도널드의 CEO 돈 톰슨(Don Thompsom)이 실적 부진의 책임으로 물러나고, 스티브 이스터북(Steve Easterbook)이 새 CEO로 취임했다. 스티브는 버거킹에 잠식당한 맥도널드의 패스트푸드 사업을 재건할 마스터 플랜을 발표하지만, 맥도널드가 발표한 “Modern progressive burger company”라는 계획은 누가 봐도 엉성하고 구체적이지 않았다.
젊은 소비자를 타겟으로 맥도널드의 명성을 되찾겠다는 계획도 현실적이지 않다. 이미 젊은 소비자는 ‘Shake Shack’, ‘Panera’, ‘Chipotle’ 같이 캐주얼한 준 패스트푸드로 이동하고 있는데, 맥도널드가 과연 뒤늦게 어떤 전략으로 이를 되돌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버거킹의 화전양면전술
버거킹은 그동안 맥도널드를 경쟁상대 삼아 노이즈마케팅, 복제제품전략 등을 펼치며 패스트푸드 시장에서의 점유율을 높여 왔다. 이를 고려할 때 버거킹의 최근 휴전 제안은 그동안과 너무 상반된 모습이다. 평화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전쟁을 준비한다는 뜻의 단어 ‘화전양면전술’이 떠오른다. 남북고위급 회담이 이뤄지는 와중 언론에서 지겨울 정도로 반복하던 단어 또한 화전양면전술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아니 버거킹은 이번 햄버거 전쟁 휴전 제안을 통해 무엇을 얻었을까? 예상했겠지만, 제안 자체가 각종 미디어와 SNS에서 화제 되면서 버거킹은 맥도널드의 대등한 경쟁자로 인식을 굳혔다. 맥도널드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든 말든 버거킹은 잃을 것이 전혀 없다.
오히려 맥도널드에게 휴전을 가장한 펀치를 날린 격이다. 맥도널드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버거킹과의 대등한 경쟁관계를 인정하는 꼴이고, 거절하면 이 명분 있는 이벤트를 날려버린 옹졸한 이미지를 얻는다.
맥도널드의 수락 여부와 상관없이 버거킹은 이번 제안을 통해 엄청난 브랜드 노출 효과를 거두며 전쟁의 승리자가 된 것 같다. 버거킹의 화전양면전술에 다시 한 번 휘말린 맥도널드는 과연 어떤 선택을 내렸을까?
버거킹이 제안하고 하루 후, 맥도널드 CEO 스티브가 페이스북에 올린 답변이다. 아쉽게도 맥도널드는 제안을 거절했다. 맥와퍼를 기다리던 수많은 이의 안타까운 탄식이 들리는 듯하다.
33년 동안 끝나지 않은 햄버거전쟁, 그리고 버거킹의 화전양면전략. 나는 이 전쟁이 끝나지 않고 계속됐으면 좋겠다. 이 전쟁이 더 치열하고 격렬해질수록 우리는 더 맛있는 햄버거를 더 저렴한 값에 먹을 수 있으니까. ‘맥와퍼’ 같은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는 덤이다.
참, 마지막으로 나 역시 맥도널드가 버거킹의 제안을 거절하여 맥와퍼를 맛볼 수 없게 된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다.
원문: 세상을 풀어보는 두루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