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홍상수의 17번째 장편영화(기타 단편 <첩첩산중>,<베네치아70> 및 <리스트>가 있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보았다. 영화는 같은 설정에서 출발해 서로 다른 전개로 이어지는 두 편의 반복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두 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해보자.
첫 번째 이야기(이하 패턴a)는 <생활의 발견>(2002, 4번째) 이후 어느 정도 공식화된 ‘홍상수식 이야기’를 따른다.
영화는 남자주인공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저명한 예술영화 감독 함춘수(정재영 분)는 전직 모델이자 아마추어 화가인 윤희정(김민희 분)을 우연히 보고 (성적으로) 이끌려 접근한다–예컨대 <밤과 낮>(2008, 8번째)의 망상 장면에서 잘 드러나듯 종종 홍상수의 남자주인공들은 여성의 발과 다리에 페티쉬를 갖는 인물로 표현되는데, 윤희정 또한 발과 다리를 훑어보는 카메라의 시선에서 예외는 아니다.
자신의 재능에 확신이 없는, 지방의 소규모 커뮤니티에 갑갑함을 느끼는 아마추어 예술가가 유명한 예술영화 감독에게 갖는 호기심을 이용해 춘수는 희정의 화실에도 가보고, 단 둘이 술도 마시면서 서로 로맨틱한 감정을 품는 관계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생활의 발견>에서 예지원이 분한 명숙을 상기하면 이런 구도 자체가 이미 홍상수에겐 언제든 꺼내쓸 수 있는 카드패와 같은 셈이다).
희정은 자신이 속한 ‘예술적 취향이 공유하는’ 사교집단에 춘수를 데려가는데, 그곳에서 춘수가 희정의 그림에 관해 남겼던 코멘트가 사실 별다른 내용없는 ‘그럴듯한 말’이었음이, 나아가 춘수가 성적으로 문란할 뿐만 아니라 이미 결혼했음이 밝혀진다. 희정은 분노하고 실망하여 춘수를 외면하고, 욕망이 좌절된 춘수는 다음날 강연에서 엉뚱하게 분노를 발산한다.
두 번째 이야기(이하 패턴b)는 유사한 구도에서 출발하지만 춘수의 성격이 조금 바뀌었다[패턴을 정해두고 조금씩 뒤트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2012, 13번째)에서 이미 시도되었다].
패턴b의 춘수는 희정에게 이끌리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훨씬 더 진솔한 인물로 그려진다. 희정의 작업실에서 춘수는 희정의 그림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무례해보일 수도 있는 논평을 숨김없이 제출하며(‘맨스플레인’으로 볼 관람객들도 있겠지만, 어쨌든 희정은 불쾌함에도 불구하고 그 논평에 통찰력이 담겨있음을 인정한다), 둘만의 술자리에서 자신이 이미 결혼했고 아이도 있음을 밝힌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정을 정말로 사랑한다는 것도.
이어지는 모임 술자리에서 심하게 취한 춘수는 ‘예술가적인’ 기질로 인해 자신의 ‘답답함’을 벗어버리고자 문자 그대로 (희정을 제외한 여성들 앞에서) 벌거벗는다. 그는 희정에게 여전히 매력을 느끼지만 ‘선’을 넘지 않고 자제한다(그리고 희정은 춘수와 헤어지기 전 뺨에 입맞춤을 남긴다).
다음날 GV를 성공적으로 마친 춘수는 수원을 떠나기 전 춘수의 영화를 보러 온 희정과 다시 만나며, 두 사람은 깊은 여운을 남기고 헤어진다–춘수는 끝까지 애틋함을 표현하되 신사처럼 작별인사를 남기고 떠난다. 영화가 끝나고 희정은 홀로 눈오는 거리를 걸어 (아마도 집으로) 떠난다.
요컨대 반복과 변주가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분석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홍상수의 필모그래피 전반에도 마찬가지로 적용 가능하다. 앞서의 패턴a의 요약에서 군데군데의 인용으로 암시되었지만, 1996년부터 2015년의 20년 간 홍상수의 작업은 기본적인 도식을 완성하고 그것을 반복하되 계속해서 변주해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홍상수에 대한 한국의 대중적인 인식은 그 옹호자든 비판자든 마찬가지로 ‘홍상수식 상황’을 전제로 하는데, 이것은 홍상수가 자신의 상황설정을 거의 클리셰로 만들 정도까지 반복한다는 점에서는 타당성이 있지만 동시에 그 상황설정이 조금씩 바뀌어갔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주 적절하지는 않다. 따라서 나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 관해 더 이야기하기 전에 그것이 놓일 맥락, 즉 홍상수의 작업이 이어져온 흐름을 아주 거칠게 정리하겠다.
2.
반복과 마주한 해석자가 손에 쥘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도구는 무엇인가? 그것은 형식화하는 사고다. 유사한 사례들이 축적될 때 우리는 먼저 개개의 표현들이 공유하는 패턴을, 뼈대를 본다.
홍상수의 작품군에서 가장 흔하게 활용되는 패턴은 폭로 또는 드러냄이다; <자유의 언덕>(2014, 16번째)과 같은 예외적인 작품은 조금 뒤에 이야기하자. 사람들이 공유하는 ‘홍상수식 상황’의 얼개를 풀어보면 분명하다. 지식인 혹은 예술가가 있고, 이들의 내면에는 (주로 성적 욕망의 대상에게서 인정받고자 하는) 속물적인 욕망이 있으며, 결국 이들의 속물성은 어떤 형태로든 드러난다.
물론 이러한 도식 자체는 홍상수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정확히 말해 홍상수 작품의 핵심은 이러한 도식 자체의 활용을 통해 무엇을 드러낼 것인가에 있으며, 이것이 변해가는 과정이 곧 홍상수가 나아가는 매 단계를 거칠게나마 구별할 수 있게 해주는 기준이 된다. 나는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2013년까지의 홍상수 작품을 폭력, 속물, 여성이라는 세 가지 모티프에 따라 분류하고 싶다.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강원도의 힘>(1998, 2번째), <오! 수정>(2000, 3번째)의 초기작들에서는 공통적으로 ‘폭력 폭로의 플롯’이 발견된다. 폭로 플롯은 두 층위에 걸쳐 작동한다. 먼저 (우리가 ‘홍상수식’이란 수식어를 붙이는 것처럼) 남성인물은 사회적으로 어떠한 위치에 있든 그 내면의 핵심적인 동기가 인정욕구와 성욕이라는 사실이, 두 번째로 이러한 남성인물들에게 포위된 여성인물이 처한 세계 자체가 폭력적이라는 사실이 폭로된다. 다시 말해 인물의 폭로가 있고 이것으로부터 세계 자체의 성격에 대한 폭로가 이끌려나온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여성인물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음이 제시된다. 효섭(김의성 분)과 같은 위선적인 속물에게 성과 자본을 착취당하는 대상이 되거나, 영화 후반부에 스릴러적으로 재현된 장면에서 볼 수 있듯 양민수(손민석 분)와 같이 (낮은 사회적 지위에 따른) 열등감 및 분노에 찬 남성에게 살해당한다. 여성을 인간으로 대하지 못하는 남성인물의 진실에 대한 까발리기는 여성인물의 비극을 통해 남성들이 기거하는 사회의 진실에 대한 까발리기로 이어진다(여성주의적 시선을 갖춘 감상자라면 여성인물이 두 번째 층위의 폭로에서조차도 오로지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 또한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작들의 폭로 플롯에 관해 조금 더 이야기하자. 폭로 플롯은 ‘허위에서 진실로’ 나아가기에 무게중심을, 충격의 발생지점을 필연적으로 서사의 후반부에 두어야 한다. 실제로 홍상수의 초기작들은 이 사실을 준수한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민재(조은숙 분)와 효성의 끔찍한 피살장면을 공들여서, 마치 마술사가 관객을 한껏 긴장시킨 뒤 급작스레 결과를 공개하는 것처럼 영화의 최후반부에 제시하며, <강원도의 힘>에서 영화 전반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지숙의 내면은 그가 애인인 유부남 지식인 상권(백종학 분)에게 섹스를 거절하며 자신의 임신중절수술을 마침내 고백하는 종반부를 통해서 해명된다(90년대 후반까지 여성의 낙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땠는지를 추가로 설명하지 않겠다)–물론 상권은 대신 곧바로 펠라치오를 요구함으로써 그 자신이 어떠한 인간인지, 지숙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가책없이 드러낸다.
많은 이들이 홍상수의 가장 유의미한 작업으로 평가하는 <오! 수정>은 재훈(정보석 분)의 무난한 러브스토리를 한번 보여준 뒤 같은 줄거리가 수정(이은주 분)의 시선에서는 실제로 어떻게 보이는가를 충격적으로 제시한다. 수정은 자신의 삶이 방송작가라는 허울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궁핍과 남성들의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기에, 처녀성에 집착하고 자기중심적인 속물이지만 어쨌든 부유하고 멍청한 화랑경영자 재훈의 구애를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 인지하면서도 결국 받아들인다.
세 편의 초기작에서는 앞서 말했듯 남성인물의 실상에 대한 폭로가 사회에서 여성이 맞닥트려야 할 끔찍한 운명(폭력의 모티프)이라는 한층 더 ‘깊은’ 진실을 가리키는 도구적 위치를 갖는다. 홍상수 영화에 강렬한 거부감을 느끼는 사실주의 미학의 신봉자들이 홍상수의 초기작을 유의미하게 평가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시기의 작품들이 세계의 진실을 진지한/윤리적인 태도로 드러내는 것 자체를 아직 중요한 미학적 신조로 간직하기 때문이다.
3.
폭력 폭로 플롯과 그 사실주의적 미학에 대해 상술한 까닭은 바로 그것의 포기가 <생활의 발견> 이후의 홍상수 영화에, 혹은 흔히 이야기되는 ‘홍상수식’ 영화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생활의 발견>에서부터 <다른 나라에서>(2012, 13번째)까지 10년에 걸친 기간 동안 확립된 홍상수 스타일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남성인물들은 예술가 혹은 지식인 집단에 속하지만 자신의 신분에 따른 허영만 있을 뿐 내면은 텅 비었으며 그들에게 유일한 동력은 성적인 욕망이다. 이 점은 초기작과 마찬가지지만, 초기작에서는 이러한 욕망에서 출발하여 (특히나 남성 간 경쟁으로 인한) 여성에 대한 폭력적인 상황에 대한 지시로 이어졌다면 이후의 시기에 심각한 폭력의 모티프는 거의 사라진다.
물론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2004, 5번째)에서 언급되는 강간 사건이나 한밤에 문호(유지태 분) 및 여성제자가 머무는 모텔 방문을 난타하는 남학생의 주먹, <해변의 여인>(2006, 7번째)의 창욱(김태우 분) 등에서처럼 폭력의 모티프는 때때로 잔존하지만, <하하하>(2010, 10번째)의 길거리 싸움에 이르면 그것조차도 희화화된 소재로만 남는다.
폭력의 문제가 사라지면서 홍상수 영화는 여성인물의 재현양식에서도 변화를 겪는다. 물론 초기작의 여성인물들 역시 그 자체로 깊이 있는 내면을 가진 경우는 없었으나, 스스로를 포위한 폭력과 대면하기 때문에 마치 내면을 가진 인물인 것처럼 묘사될 수 있었다. <오! 수정>의 수정이 바로 이런 경우며, 초기작에서 그나마 가장 내면을 가진 인물에 가까운 <강원도의 힘>의 지숙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폭력이라는 외적 압력이 사라졌을 때, 홍상수의 여성인물들은 마치 지금까지 심해의 수압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지상에 내던져진 심해어처럼 존재의 외형을 상실한다. 남는 것은 피상적인 언어의 파편과 남성인물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신체, 남성의 욕망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태도 뿐이며, 그 인물의 내면은 텅 비어 있다. 여성인물은 오로지 남성인물의 한심함을 드러내기 위한 기능적인 도구로 등장한다. 예컨대 <극장전>(2005, 6번째)에서 갑작스럽게 애정을 고백하는 영화감독 동수(김상경)와 불쾌한 대화를 한 뒤에도 그와 섹스하며 무의미한 말들을 내뱉는 배우 최영실(엄지원 분)이 그 전형적인 사례다.
따라서 이 시기의 홍상수 영화에서 재현하는 세계란 남성인물들의 추잡함과 찌질함이 가득한 시공간일 뿐이며, 이 시공간은 더 이상 (숨겨진) 진실을 재현한다는 감각조차 상실한 ‘깊이 없는’ 세계, 그 시공간의 길이와 폭 모두에서 납작하게 찌그러진 세계다. 정성일의 <북촌방향>에 관한 평은 과도하게 진지한 감이 있지만 이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가 2004년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관해 남긴 글을 본다면, 7년 동안 본질적으로 바뀐 것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생활의 발견>에서 대략의 틀이 구성되기 시작해 아마도 <극장전> 또는 <해변의 여인>에서 완성된 형태에 도달한다고 할 수 있는 홍상수의 세계에 남는 것은 세계의 찌질함, 추잡함, 무의미함, 저열함을 포착하는 냉소적인 시선뿐이며, 사물 혹은 동물에 대한 그 특유의 줌인은 인물로부터 어떠한 존엄성 혹은 존중의 태도를 배제한 조롱에 가깝다. 그 조롱으로부터 발생하는 쾌야말로 이 시기 홍상수의 영화가 사람들을 끌어들인 힘일지도 모른다.
나는 어떠한 (김홍중의 용어를 빌려) ‘진정성(authenticity/sincerity)’조차 결여한 조소 섞인 관조를 긍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것이 동시대(2000년대) 한국문화에 지분을 확보한 감수성에 속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분명히 말해 이 시기 홍상수의 영화는 동시대 감수성의 일부를 대변하고 또 그것을 구성하는 텍스트다(김남석의 200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당선작은 이러한 감수성의 보유자들이 포스트모던의 기치 하에 자신의 미학을 어떻게 정당화하는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앞선 시기의 감수성을 포기하지 않은 사실주의적 미학의 지지자들이 홍상수의 영화를 견뎌내기 어려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예술이 시대정신과 부합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풍성함을 낳지는 않는다. 2000년대의 미학적 감수성의 일부를 구성한 홍상수 영화의 미학은 그것 자체로 막다른 골목에 직면한다. 우리가 세계로부터 보는 것이 오로지 세계의 동물성, ‘자연스러움’ 뿐일 때, 그래서 그것을 조소하는 태도 이외에 다른 태도를 가질 수 없다면, 세계를 관조하는 우리 자신의 의식 또한 사물 또는 ‘자연적인’ 무언가로의 전락이라는 경로를 회피할 수 없다.
10여 년에 걸친 기간 동안 홍상수는 (소수의) 대중들에게 자신의 스타일과 미학을 각인시킨 대신 그의 작품 모두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는 (심지어 그의 지지자들조차도 부인하기 어려운) 평판을 얻었다–섹슈얼리티 혹은 동물성의 문제에서 끊임없이 초월을 갈구한 김기덕의 작품들이 대중적인 악명을 대가로, 예컨대 거세가 4번이나 등장하는 <뫼비우스>(2013)처럼 여러 극단적인 지점들을 탐색할 수 있었던 것을 떠올리자(나는 김기덕 작품의 극단적인 표현에 사람들이 느끼는 불편함을 존중하지만, 그가 단순히 해외비평에 영합하여 ‘잘 팔리는’ 작품을 의식적으로 만든다는 평가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이 시기 홍상수의 영화는 개별 작품 내에서의 반복만이 아니라 여러 작품 자체가 서로의 반복에 가까우며, 마치 점차 속도가 줄어들어 종래에는 정지하는 진자처럼 마침내 반복되는 패턴의 묶음으로까지 축소한다. <자유의 언덕>(2014, 16번째)은 이러한 축소의 결정판으로, 이 영화는 서사의 순서를 뒤섞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당혹감 없이 편하게 감상할 수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그 영화에 나오는 거의 모든 패턴들이 홍상수식 영화에 익숙한 감상자에게 이미 클리셰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낯익은 인물, 구도, 전개들이 반복될 때 시간적 배치를 달리한들 어떤 새로움이 있을까? 사실상 지금까지 홍상수의 영화가 최소한의 감수성을 공유한다면 감상자가 별다른 노력없이도 손쉽게 감상/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면서도 ‘아트하우스’로 분류되는 기묘한 위치에서 발생하는 이점을 누려왔다고 말해도 아주 틀린 진술은 아닐 것이다.
4.
홍상수가 자신의 영화들이 천편일률적인 하나의 스타일로 쇠락해간다는 사실을 스스로 의식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만연한 ‘홍상수식’ 영화의 행렬 속에서도 새로운 시도가 미약하게나마 출현한다는 사실 또한 인정해야 한다. 2000년대 초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의 홍상수의 스타일이 인물만이 아니라 서사 자체로부터 깊이를 소거시키고 그것을 조소적인 감각으로 채웠다면, 2010년대 초반부의 작품들에서는 여성인물에게 깊이 있는 내면을 부여하려는 듯한 움직임이 출현한다.
물론 앞서 지적했듯, 이미 초기작 <강원도의 힘>에서부터 내적인 고민을 가진 여성인물의 맹아는 존재했다. 그러나 지숙의 내면은 본질적으로 외적인 폭력에 의한 상처에 가까우며, 그마저도 (비밀을 고백한) 대학강사 애인이 무신경하게 펠라치오를 요구할 때 곧바로 응하는 도구화된 면모에서 다시금 스러진다–<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선화(성현아 분)가 결국에는 텅 빈 도구일 뿐인 것처럼 말이다. <해변의 여인>의 문숙(고현적 분)에서부터 <북촌방향>(2011, 12번째)의 송예전(김보경 분)에 이르기까지 홍상수의 여성인물들은 몇 가지 개성적인 말버릇 및 행동양식의 결합체에 가깝다(감상자가 스스로의 경험에 기초하여 여성인물이 마치 내면이 있는 듯 상상할 거리들이 주어진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과 다소 다른 형태의 여성인물이 등장하기 시작한 최초의 사례는 단편 <첩첩산중>(2009)의 미숙(정유미 분)으로 잡을 수 있다. 미숙은 이후 <옥희의 영화>(2010, 11번째) 및 <우리 선희>(2013, 15번째)에서 좀 더 구체화될 여성인물의 원형이다. 아마도 홍상수 영화 최초로 나레이션을 통해 스스로의 속내를 (짧게라도) 표현하는 그는 남성인물과 애정으로 얽혀있을 뿐만 아니라 영화감독 지망생으로서 자신이 가진 자질에 대한 불확실함에서 기인하는 질투와 불안을 갖는다. <첩첩산중>은 결국에 통상적인 홍상수식 전개로 이어지지만, 미숙의 캐릭터는 <옥희의 영화> 및 <우리 선희>,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2, 14번째)으로 이어지면서 홍상수 영화에 새로운 인물형으로 등장한다(<다른 나라에서>의 이자벨 위페르가 분한 역할들은 다소 애매하다).
이 새로운 여성인물의 특징은 남성인물들의 욕망이 투과할 수 없는 고유의 내적 영역을 가지며 그 영역을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고전적인 문제의식이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일(예술창작)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 나는 어떠한 미래를 맞을 것인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이 옳은가와 같은 오래된 물음들, 하지만 이전의 홍상수 영화들이 대변해온 냉소의 시대에서는 촌스럽게 여겨졌던 물음들 말이다. 2010년대 초반의 홍상수 영화들은 분명 한심한 남성인물들에 여전히 의존하지만 어쨌든 고유한 내면을 가진 여성인물들의 등장을 통해 남성인물들을 향한 조소의 강도를 낮출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사에 나름대로의 ‘깊이’를 재도입할 수 있었다.
거의 정유미를 통해 전형이 확립되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분명 정은채가 분한 해원은 다소 다른 색채를 띠지만, 이는 정은채의 개인적인 매력에 기인한 면이 있으며 해원이라는 인물 자체는 정유미가 분한 인물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새로운 여성인물들은 그러나 그 자체로 완전한 탈출구는 되지 못했다. 앞서 지적했듯 홍상수가 남성인물을 그리는 방식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질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동물처럼 단순한 남성인물들 사이에 여성인물이 끼어있는 구도는 지속되었으며 단지 여성인물에 독립적인 영역이 생기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옥희의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우리 선희>를 이어서 본다면 남성묘사와 여성묘사가 각각 차지하는 비중을 두고 기묘한 긴장관계가 오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정적으로 이 영화들은 ‘정유미 캐릭터’, 즉 자기확신을 결여한 여성창작자라는 동일한 인물형 또한 자기복제적 반복으로 인한 클리셰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시킬 수 없었다. 실제로 자기 자신에 관한 물음들로만 내면을 꽉 채우고 있는 이 인물형은 그 자체가 클리셰로서 조롱당할 위험을 내포한다.
2014년의 <자유의 언덕>에서 모리(카세 료)가 보여주는 인물형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분명 흥미로운 점이 있다. 물론 모리는 영화의 상당부분에서 관찰자에 가깝게 등장하지만, 예컨대 (설령 그것이 모리 자신의 망상이라고 할지라도) 영선(문소리 분)과의 관계에서 볼 수 있듯 신뢰할 수 없는 애인 광현(이민우 분)과의 결별을 위해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영선과 섹스를 한 뒤 후회하는 장면 또한 상당히 희극적인 터치로 그려진다.
영화가 기본적으로 모리가 권(서영화 분)에게 보내는 편지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 또한 짚어야 한다. 서간체 소설장르에 관해 약간이라도 사전지식을 갖춘 감상자들이라면 곧바로 눈치챘겠지만, 모리의 편지=나레이션은 모리가 바라보고 겪는 세계의 메타레벨에서 그의 사고과정을 독립적인 공간으로 만들고 또 전시한다는 점에서 인물에 내적인 깊이를 부과하는 기법이기도 하다(여기에 비하면 편지가 뒤섞인다는 설정은 맥거핀에 가깝다). 요점은 모리가 보여주는 인물형이 이때까지 홍상수적 남성인물들이 보여준 스펙트럼 바깥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물론 홍상수식 클리셰들로 가득한 67분짜리 소품에서 모리가 보여줄 수 있었던 지점이 아주 많지는 않았고, 그것이 이 인물의 기능 및 성격 상의 모호함을 초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상수가 새로운 남성인물형의 탐색을 개시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패턴b에서 함춘수가 수행하는 기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5.
마침내 우리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로 돌아왔다. 지금까지 홍상수의 서사 및 인물이 변천해온 과정을 염두에 둔다면 홍상수의 17번째 장편을 구성하는 두 개의 이야기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패턴a가 2000년대부터 만들어진 ‘홍상수적’ 요소의 간추려진 버전이라면(그러나 그 길이는 1시간에 육박한다), 패턴b는 그것으로부터 어떤 형태로든 이탈하기 위한 답변에 가깝다(물론 좀 더 세밀하게 보자면 패턴a도 희정의 내면이 희미하게나마 들어가 있다는 점에서 ‘홍상수적’ 영화의 전적인 반복은 아니며, 2010년대 초반의 변주들의 흔적이 기입되어 있다). 따라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핵심은 패턴b가 어떻게 패턴a 혹은 ‘홍상수식’ 전형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별화하느냐에 달렸다.
감상자들이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차이점은 물론 함춘수다. 한 마디로 말해 패턴b의 함춘수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인물이다(공정하게 말하자면 4절 말미에서 언급했듯 <자유의 언덕>의 모리가 새로운 남성인물을 위한 첫 모델이긴 하다).
그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전의 남성인물들과 차별점을 갖는다. ‘홍상수적’ 남성인물들이 예술가적 외피, (그에 수반해야 할) 내면의 결여, 속물적 욕망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면, 함춘수는 자제되지 않은 동물적 욕망이 아닌 ‘사랑’의 감정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솔직하게 ‘예술가다운’ 방식으로 표현한다.
한편으로 (표현되어야 할) 내면을 지녔다는 점에서,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표현한다는 행동양식 자체에서 그는 홍상수가 지금까지 재현하기를 거부해왔던 ‘진짜’ 예술가의 상에 부합한다. 그는 예술작품에 대해 솔직한 평가를 숨기지 않고, 자신을 구속하는 한계를 상대에게 털어놓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감성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문자 그대로 ‘발가벗는다.’
패턴b에서 함춘수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로맨스의 변화 또한 가져온다. 두 이야기 모두에서 거의 동일한 성격을 갖는 윤희정은 패턴a에서는 자신이 기대했던 “낭만적 사랑”이 실제로 텅 비었으며 자신이 속아넘어간 것에 불과하다는 환멸섞인 진실에 부닥치지만, 패턴b에서는 실제로 “낭만적 사랑”에 도달한다–춘수와 희정은 섹스하거나 연애를 시작하는 대신 유부남이라는 춘수의 사회적 한계를 받아들이고 ‘아름답게’ 이별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낭만적 사랑을 완성한다.
춘수의 영화 상영이 끝난 뒤 홀로 걸어가는 희정의 모습을 담는 결말부는 희정의 심정을 극도로 확장한다는 점에서 니클라스 루만이 말한 “낭만적 사랑”에 해당한다(<열정으로서의 사랑>). 정성일은 홍상수와 에릭 로메르의 공통점으로 낭만적 사랑에의 거부를 꼽는 적확한 지적을 한 바가 있는데,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패턴b는 이런 점에서 홍상수 자신이 지금까지 거부해왔던 영역에 직접적으로 침투한다.
바로 그 진실된 예술가상, 낭만적 사랑의 재현 때문에 이 영화를 애정하고자 하는 감상자가 있다면 한 발짝 멈추고 다시 생각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우리는 홍상수가 자신이 재현한 대상에 대해 갖고 있는 태도가 여전히 모호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만약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가 뛰어난 점이 있다면 이 모호함이야말로 그에 해당할 것이다).
패턴b의 함춘수 및 춘수와 희정의 로맨스는 아주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가공물이다. 패턴a에서 춘수의 속물됨을 벗겨내는 역할을 하는 수영(최화정 분)과 영실(서영화 분)은 패턴b에서는 노골적으로 춘수의 진솔함을 칭송한다. 바로 이 노골적임에 주목하자. 패턴b의 춘수 및 로맨스는 한국에서 90-2000년대를 거쳐 환멸의 감성이 도래하기 전에 통용되었던 ‘예술가/지식인과의 낭만적 사랑’이라는 코드를 그대로 가져오고 있다(나는 이 관습에 익숙하지는 않은데, <젊은 느티나무>를 곧바로 떠올렸다).
한 마디로 말해 홍상수는 패턴b를 일부러 아주 공들인 클리셰 덩어리로 만들어놓은 셈이다–자신이 지금까지 줄기차게 거부하고 조소해왔던 바로 그 관습을 말이다. 이러한 관습에 대한 자의식을 갖춘 사람이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순진하게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만약 냉소적인 날카로움을 유지하고 있는 감상자라면, 이러한 사실로부터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가 진짜로 조소하는 대상이 춘수가 아닌 희정일 수 있다는 해석을 충분히 제기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그 자체로 희정의 꿈이다. 서울로부터 떨어진 수원에 살기에(수원과 서울의 거리는 실제의 가까움에 비해 의식적으로 매우 과장된다…춘수가 다시 보지 못할 사람인양 희정을 떠나갈 때처럼 말이다) 예술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자신에게 예술적 갈망이 있음을 알지만 자기확신을 가질만큼 재능이 있지는 않다. 지역커뮤니티의 예술애호가들과 어울리지만 그들을 진정한 친구나 동료로 간주하기에는 자기평가가 높고, 그래서 고독하다.
희정은 앞서 지적한 <생활의 발견>의 명숙, <하하하>의 여성인물들과 같은 ‘지방에 어울리지 않은 지방 여성들'(물론 이 계보는 김승옥의 <무진기행>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과 2010년대 ‘정유미 캐릭터’들의 융합물에 가깝다. 어느 쪽의 성분이 더 강하든 간에 이 인물형은 앞에 ‘유명한’ ‘진짜’ 예술가가 나타났을 때, 그리고 로맨스가 시작되었을 때 자기 자신이 처한 상황을 낭만적 사랑의 서사로 고양시키려는 유혹에 취약하다. 패턴a는 춘수의 좌절 이전에 희정의 좌절이며, 로맨스의 실패를 맛본 뒤 씁쓸한 환멸의 감정으로 집에 들어서는 그를 맞이하는 불당의 종소리는 ‘꿈 깨라’라는 지독한 조소를 담은 장치이기도 하다(<생활의 발견>의 마지막 장면에서 선영네 집 문 앞에 선 경수에게 쏟아지는 폭우를 떠올려보자). 로맨스의 꿈만이 아니라, 로맨스를 꿈꾸는 인물에까지 이어지는 조소 말이다. 2010년대 전반은 홍상수가 여성인물을 자신의 조소 한 가운데에 위치시키기까지 은밀한 포복 전진의 여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패턴b에서 불당의 종소리 이후에도 낭만적 사랑의 문법이 계속된다는 것 또한 짚어두자. 사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낭만적 주관의 힘은 더 강력하다. 패턴b는 그 자체가 낭만적 사랑의 클리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해 그것이 한갓 꿈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꿈을 완전히 거부할 수 없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꿈을 꾸는 상황이 그 자체로 상황의 비극성에 대한 낭만적 정념을 극도로 고양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좋아, 우리는 희정이 몽상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 하지만 이렇게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뻔한 꿈을 꿀 수밖에 없는 희정은 그 자체로 낭만적 인물이지 않아? 홍상수는 지금까지 남성인물들에게는 단 한번도 허락하지 않았던 이런 ‘여지’를 여성인물에게는 아직 남겨두고 있고, 그것이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미묘하게 만든다(바로 그 미묘한 지점에 멈추는 데서 홍상수의 이번 작은 분명 탁월했다).
낭만성이라는 오래된 클리셰를 이용함으로써 홍상수는 한편으로 특유의 조롱섞인, 벌레를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인물을 종이쪼가리로 납작하게 만드는 대신 깊이 있는 내면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홍상수가 <생활의 발견>에서 출발했던 긴 물음의 여정에 나름대로의 답변을 제출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6.
물론 이것이 끝은 아니다. 그가 낭만적 예술가, 낭만적 사랑의 관습적인 장치를 다시금 끌어올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막을 내리기 전에 한번 더 곱씹어야 한다.
여러가지 측면에서 홍상수 영화의 서사 전략은 관습과의 거리두기로부터 힘을 얻는다. 그는 이런 점에서 관습을 파괴하는 유형이라기보다는 역으로 관습에 가장 긴밀하게 의존하는 유형에 가깝다. 풍성한 관습의 보고가 있고 그것을 조소섞인 태도로 유희하듯 마음껏 휘두를 수 있을 때 홍상수적 서사는 가장 생산적인 결과를 낳는다.
2000년대는 두 가지 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는데, 하나는 홍상수가 비웃을 수 있는 관습이 너무나도 신속하게 형해화되어 그것에 대한 비판이 특별히 진지한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홍상수의 비웃음 자체가 하나의 관습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이른바 독립영화의 ‘홍상수화’에 대한 우려를 떠올리자). 그 귀결에 따라 2010년대 홍상수의 여러 시도들은 자기 자신이 하나의 관습이 되어버린 상황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출발했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결국 두 가지 방식으로 관습을 활용한다. 한편으로 관습화된 자기 자신을 서사의 디딤돌로 활용하며(패턴a), 다른 한편으로 자신이 비판해온 관습의 유령을 다시금 직접적인 재현의 대상으로 삼는다(패턴b). 통상적으로 홍상수의 방식이 패턴b와 같은 낭만을 패턴a의 환멸로 깨부수는 절차를 따랐다면,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이 순서를 뒤집음으로써 패턴b에 내재한 클리셰에 일시적이나마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패턴b를 내려다볼 수 있는 의식의 층위를 희끗 엿보임으로써 홍상수의 영화는 10여년만에 해석적 역동성을 획득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결책은 그가 앞으로도 자기가 묻어버린 관습을 다시 꺼내어 시체에 분칠을 하고 생명력을 부여해야 한다는 과제를 남겨둔다. 홍상수가 이 해결방식에 기댈수록 그는 더욱 더 사라져버린 전통에 의존하게 될 수밖에 없다.
어쨌든 현재로서 이 영화가 홍상수의 마지막 작품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가 시체와 어디까지 가까워질 수 있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