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의 말 한마디로부터 이 난리는 시작되었다. 그녀의 리터러시는 형편없을지 모르나 졸지에 한 영화를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탈바꿈시키는 능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녀가 갈라놓은 홍해의 양편에서 우리는 물고기처럼 많은 말들을 풀어놓았다.
그러나 <국제시장>을 보고 나니, 이 영화를 둘러싼 그간의 논쟁들이 그저 소음에 불과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영화를 둘러싼 소음의 풍경들은 한국 사회의 강고한 진영논리와 그에 의해 한 텍스트가 편의적으로 소비되는 방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가 진영논리에 의해 소비된 단적인 예가 <변호인>과의 비교다. 터무니없다. 굳이 <국제시장>을 다른 영화와 비교해야 한다면 그것은 <변호인>이 아니라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여야 한다.
두 영화의 배경이 모두 부산이라는 점은 차라리 부차적이다. 주목할 것은 두 영화가 모두 노인의 시선에서 지난날을 회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두 영화 모두 개인에 의한 과거의 서사화, 일종의 역사화 작업을 수행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내용은 상이하기 이를 데 없다. 가령 <범죄와의 전쟁>을 채우고 있는 것은 비리와 사기, 협잡과 폭력인데 반해 <국제시장>의 그것은 헌신과 인내, 금욕과 노동이다.
우리는 두 영화를 다음과 같은 물음에 대한 나름의 답변으로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는가?”
무엇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는가?
흥미로운 것은 두 영화의 공통점은 그 자리에 ‘국가'(혹은 공적인 것)을 놓지 않는다는 점이다. <범죄와의 전쟁>의 주인공 최민식은 비리 공무원이며 나라의 명을 받들어 ‘범죄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곽도원 역시 끝내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 부각되는 것은 공공적인 것의 담지자로서의 국가가 아니라 사적 폭력의 집합체인 조폭이다. 여기서 국가는 사적 이익 추구의 전략적 매개일 뿐 현재 우리의 풍요로움을 제공한 주체가 아니다.
<국제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를 국가주의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오히려 이 영화에서 국가는 철저하게 소거되어 있다. 흥남부두에서 그 수많은 사람을 살린 것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미국’이었으며 이후 스크린에 넘쳐나는 것 역시 덕수(황정민)의 개인적인 고생(줄여서 ‘개고생’이라고 하자)일 뿐이다. 주인공이 이렇게 ‘개고생’을 할 동안 나라가 한 것이라곤 광부를 모집해 보내고 전쟁에 참여할 용병을 팔아넘긴 일뿐이다.
결국 두 영화는 모두 대한민국이 <각자도생의 사회>였음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영악한 사람들은 온갖 비리와 불법, 협잡에 몸을 담갔고 그럴 주변머리가 없었던 우직한 사람들은 덕수처럼 ‘개고생’하며 힘든 시기를 헤쳐왔을 뿐이다.
그러므로 <범죄와의 전쟁>은 ‘리얼’이고 <국제시장>은 ‘환타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덕수처럼 개고생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범죄와의 전쟁>이야말로 철저한 환타지이며 <국제시장>이야말로 ‘리얼’의 전범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장년층의 열광을 ‘리얼’에 대한 감동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중장년층의 뜨거운 반응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실은 매우 쉬운 문제이다. 가령, 우리 아버지 세대에게 두 영화를 보여준 후 두 영화의 주인공 중 어느 인물이 자신의 삶과 더욱 비슷하냐고 묻는다면 설사 온갖 비리를 저질렀던 사람일지라도 <국제시장>의 덕수를 선택할 것이다. 자신의 삶을 비리와 협잡, 불법으로 점철하기보다는 노력과 인내, 근면과 검소의 결과로 서사화하고 싶은 것은 개인의 너무나 자연스러운 욕망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기역사화에 따르는 필연적인 편향
따라서 이 영화의 성공요인은 애국심 때문도 아니고 관객들이 국가주의의 노예이기 때문도 아니다. 그저 개인의 자기 역사화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편향 탓이다. 물론 이 편향을 극복하는 것이 윤리적 태도일 수 있겠으나 그것을 일반 대중들에게 요구하기란 어렵다.
우리 아버지를 보자. 군에서 33년을 부관으로 일하셨다. 얼마나 많은 문서조작과 물자의 빼돌림이 있었는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어두운 밤 아빠와 함께 어느 창고에 가서 군용 축구공을 몰래 가져 나왔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엄마 아빠와 함께 술 마시며 이야기할 때 나오는 것들은 고생한 이야기, 우리들을 위해 참고 일한 이야기, 근면성실했던 이야기들이다. 그 와중에 “아빠 뭐 비리 저지른 거 없어? 없을 리가 없는데. 다 얘기해봐요.” 이렇게 물고 늘어지긴 힘들다.
더 큰 문제는 이 둘이 선명하게 나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마 아빠는 온갖 문서조작을 통한 비리에 가담했겠지만 동시에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했다. 이 정도 선에서 받아들이면 될 문제라고 본다. 만약 이때 아버지의 비리를 의심하고 캐묻고 상상하는 편집증적 주체가 있다면 그 역시 별도의 분석이 필요하다.
그런데 당시에 덕수처럼 부지런하게 일했던 가장들이 얼마나 되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조금 황당하기도 하다. 물론 근면한 가장과 한량의 수를 조사한 통계자료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으니 실증하기는 어려운 문제겠지만 <국제시장>의 ‘고모부’와 같은 남편, 가장, 아버지들 역시 ‘쌔고 쌨다.’ 가령 <경숙이 경숙 아버지>에 나오는 아버지와 같은. 따라서 나는 이 영화에 대한 열광에는 상당수의 ‘무임승차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한편 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억압된 것의 귀환’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최민식은 하정우의 환청을 듣고 황정민은 정진영의 환영을 본다. 하정우의 환청은 최민식이 자신의 성공을 위해 치러야 했던 선택이 야기한 두려움의 결과이고, 정진영의 환영은 ‘가장’이라는 결코 짊어지고 싶지 않았던 짐을 부과한 대타자의 출현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 황정민이 노인에서 처음 가장의 짐을 짊어졌던 어린 아이로 변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황정민을 한국 현대사의 온갖 모순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일종의 트릭이다. 한갓 어린 아이에게 어떻게 그 세월 속에 벌어진 많은 죄를 묻겠는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실상 우리의 아버지들이 나약한 한 인간이었음을 강조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대사의 수많은 범죄로부터 그들을 분리시키는 효과를 노린다. 가부장의 ‘소시민화’와 ‘아동화’는 이 영화의 주요한 흥행 요인 중 하나로 보인다. (‘소시민화’야 이제까지 많이 나타났던 모티프인데 – 가령 <우아한 세계>의 송강호 – ‘아동화’는 희귀하다.)
지금 이 사회에 대한 중장년층의 인정투쟁
<국제시장>이 논란이 된 다른 이유로 이 영화가 인정투쟁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인정은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집합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다. 대다수의 중장년층은 이러한 인정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고 생각하고─실제 덕수가 가족 안에서 소외당하듯이─그에 대한 르상티망(원한)을 축적해간다.
<국제시장>에서 그 르상티망은 상상적으로 해소되는데 그것은 죽은 정진영이 어린 덕수를 안고 그 고생을 인정해주는 장면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이 영화는 이러한 세대론적 인정투쟁의 기묘한 버전이다.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치사한 게 공치사다. 칭찬해주고 격려해주고 싶다가도 공치사하는 사람 앞에서는 할 맛이 뚝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이 ‘거대한 공치사’에 의아하고 어이없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비화시키기보다는 그냥 ‘우쮸쮸 그래쪄여? 아이 고생이 많았네♡’하면서 인정해주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이라고 본다. (영화의 마지막에 덕수가 괜히 아이로 돌아간 게 아니다.)
우리에게 그 정도 여유가 없다면 그것 역시 문제다. 언제까지 민주화/산업화 나눠서 싸울 것인가. 언제까지 민주화의 영예를 산업화의 착취와 대립시킬 것인가. 이것이 그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노동자’들에 대한 올바른 역사화일까? ‘민주 노동자’가 아니었던 ‘노동자’들의 삶은 어떻게 이해하려 그러나? 우리에게 그들을 품을 여유와 이론이 없다면, 아마 당분간 정치적 가망성은 없다고 봐도 좋다.
완벽한 총체성을 지닌 영화는 없다
대한민국은 소시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범죄와의 전쟁>이 보여주듯 불법과 비리 협잡과 기회주의로 점철된 역사이기도 하고 <국제시장>이 보여주듯 인내와 근면, 헌신과 희생으로 점철된 역사이기도 하다. 또한 <변호인>에서 그려냈듯 국가폭력이 횡행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을 한데 꿸 수 있는 총체성을 지닌 영화를 만나기란 매우 힘든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각각의 편린들을 주워모으는 일일 텐데 나는 그 모든 편린들이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국제시장>은 그런 점에서 52%의 심성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좋은 텍스트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삶의 모습과 태도는 무엇인지 알 수 있으며 현재의 대한민국을 무엇의 결과라고 생각하는지 역시 알 수 있지 않은가.
여기에 대고 대한민국은 피와 오물을 흘리며 태어난 국가라고, 수많은 폭력과 불법과 비리가 자행되면서 만들어진 국가라고 말한들 학문적으로는 옳을지 모르나 정치적 지지를 얻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모순과 부조리, 그리고 국가의 폭력은 나보다 우리 아버지가 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삶과 대한민국을 노력과 희생의 결과로 채색한다. 자기 삶을 긍정적으로 역사화하려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이 욕망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접근하는 정치적 전략이 필요한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