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이효리 선생은 말했다. 내 이름은 이효리, 거꾸로 해도 이효리.
마감도 마찬가지다. M-A-G-A-M, 마감은 거꾸로 읽어도 마감이라서 도대체 끝이 안 난다. 하나 간신히 막았다 싶으면 어김없이 다음 것이 찾아와 끝이나 시작이나 결국엔 똑같아지는 이 빌어먹을 회문(回文) 구조.
나 같은 글쟁이만 그러겠는가. 그림 그리는 자, 홍보회사 다니는 자, 디자인업계에서 일하는 자, 코딩하는 자, 심지어는 조별과제 PPT 만들어야 하는 자까지. 마감이란 언제 해도 즐겁지 않은 일이다. 도저히 끝이 안 난다는 점만으로도 마감은 인류에 유해한 일인데, 결과물이 폭망을 피해갈 확률이 매우 적다는 점까지 꼽으면 마감이야말로 감기 바이러스와 함께 인류가 정복하지 못한 최악의 적(敵) 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만들어 봤다. 무엇이 마감을 망하게 하는지, 마감이 망할 거라는 징조를 미리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다음은 본인이 다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본 ‘마감 폭망 징조 빙고’다.
- 일을 하려니 책상이 너무 더럽다.
- 5분만 자고 일하면 살 것 같은 기분이다.
- 노동요로 틀어둔 라디오에서 들은 CM송이 중독적이다.
- 너무 졸려서 커피를 진하게 타 먹었는데 이젠 심장이 너무 빨리 뛴다.
- 개/고양이/동거인이 잠에서 깼다.
- 밖에서 누가 함을 판다.
- 거의 완성된 단계라 Ctrl+S를 눌렀는데 화면이 얼어붙으며 상태표시줄 ‘응답없음’이 뜬다.
- 엉덩이가 저리다.
- 클라이언트에게 야심차게 완성작을 보냈더니, 문자로 “네, 이런 느낌으로 진행해주세요”라고 답이 왔다.
- 설사의 기운이 몰려온다.
- 데드라인이 어제였음.
- 만족스레 작업하다 한 숨 돌리고 돌아와 작업 중인 물건을 다시 열어봤더니 웬 흉물이 있음.
- 구 남/여친이 톡을 보냄.
- 참고자료를 찾다가 존잘님이 이미 나와 같은 주제로 엄청난 결과물을 남겨둔 걸 발견함.
- 너무 배고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맥 딜리버리 시켰는데 최소주문이 팔천 원이라 가격 맞춰 시키고는 배달온 걸 다 먹었더니 이젠 졸리다.
- 어디서 본 건진 모르겠는데 내가 방금 만든 물건이지만 이상하게 구면 같다.
SNS에 올리자 열화와도 같은 반응과, 빠진 게 있다는 제보가 잇따라 개정판도 만들었다.
- 메모해뒀던 아이디어 스케치를 찾다가 예전에 읽다가 만 만화책을 찾았다.
- 트위터/페북 알림ㅊ망에 뜬 숫자 1이 자꾸 신경쓰인다.
- 작업하다 보니 애초에 지녔던 작업의도가 뭐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 샤워하고 싶다.
- 볼펜이 잘 나올 때까지 신문 위에 낙서를 시작했는데 도저히 멈출 수 없다.
- SNS에서 드립배틀에 돌입했다.
- 해가 떴다.
- 쒸프트키까 뜰어까 또쩌히 빠찌찌 않아써 찌씪IN예 끌을 올렸는뗴 따뜰 웄끼만 한따.
- 이런 걸 만든다.
이미 개인 SNS를 통해 유포해 인터넷을 한 바퀴 돌았으므로, 영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오래 된 떡밥을 새 것처럼 다시 포장해 던지는 까닭은, 그저 이런 징조가 보인다 싶으면 국번 없이 111… 아니,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마감에 돌입하시라는, 한 마감노동자가 다른 마감노동자에게 건네는 형제애의 윙크를 한 분이라도 더 보시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해두자.
탄광 안에 카나리아를 데리고 들어가 가스가 새는지 아닌지를 살펴보았던 광부들처럼, 이러한 징조를 발견하면 침착하게 어디서부터 뭐가 망하고 있는지 짚어보아 마감 폭망을 피하시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물론 이 글을 클릭하시고 이 빙고를 하고 계신 시점에서 이미 글러먹었단 생각을 지울 수가 없지만… 뭐, 내 마감 아니니까.
출처: 이승한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