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가 된 법정
인혁당이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시선 집중을 받은 것은 두 차례에 걸쳐서였다. 1964년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 지하 조직으로 국가 변란을 획책”했다는 어마어마한 ‘인혁당’ 사건의 개요를 발표한 것이 그 첫 번째였다.
중앙정보부장까지 나서서 발표한 ‘대규모’는 총 57명이었다. 1개 소대급의 지하 조직으로 국가 변란을 획책하려 한다는 대한민국 공안당국 특유의 허장성세의 전통은 이토록 유구하거니와, 이 사건 당시까지만 해도 기개가 살아 있었던 대한민국 검사들이 중앙정보부의 요구대로는 기소할 수 없다고 사표를 쓰고 나올 정도로 무리한 사건이었다.
두 번째로 인혁당의 이름이 사람들의 귓전을 강타한 것은 을씨년스럽다 못해 살천스러운 동토의 유신 공화국이 콸콸 독기를 내뿜던 74년 4월이었다. 민청학련 사건을 수사하던 중앙정보부는 인혁당 재건위원회가 민청학련의 배후라고 주장하며 관련자 240명을 쓸어담았다. 그 가운데 최종 기소된 것은 38명이었고, 그 가운데 8명에게 대법원은 사형을 선고한다.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을까, 대법원장의 선고 목소리는 모기 소리보다 작았다 했다. 1975년 4월 8일이었다.
사형, 그리고 선고 24시간만의 집행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어디에 폭탄을 터뜨린 것도 아닌데 사형이라니! 피고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가족들 모두가 공황에 빠졌다. 재판부는 판결에서 “피고인들의 이 법정에서의 전부 또는 일부 부합되는 각 진술 부분”을 근거로 모든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했지만 당최 검찰의 공소사실을 시인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1심과 2심, 3심에 이르도록 사형 선고를 받았던 그들은 면회조차 이루어지지 않았고 변호사도 기관원 입회 하에 만나야 했다.
형용할 수도 없고 상상도 어려운 분위기에서 사형이 확정된 것도 기가 막힌 일인데 다음 날 기절도 모자랄 충격이 인혁당 피고인들과 가족들을 덮친다.
사형 판결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4월 9일 새벽 전격적으로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것이다. 사형 선고 다음 날, 그때까지 한 번도 성사되지 않았던 면회라도 하려고 구치소를 찾은 가족들은 온몸이 부서질 듯한 비보에 그만 정신을 놓고 말았다. 고문의 흔적으로 뒤덮인 시신을 보여 줄 수 없기 때문이었을까. 야만의 극치를 달리던 유신 정권은 시신조차 유족들에게 내 주지 않고 화장터로 직행시킨다.
이 말도 안되는 비극을 가로막고 나선 이들 가운데 두 사람을 기억하자. 제임스 시노트 신부와 문정현 신부.
시노트 신부와 문정현 신부의 분노
제임스 시노트 신부는 1961년 영종도 성당 주임 신부를 맡음으로써 한국과 인연을 맺은 평범한 신부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야만적이라는 형용사도 부족한 유신 체제를 겪으며 한국 민주화 투쟁의 일선에 서게 된다.
“대사관 직원과 술을 먹는데 조만간 대규모 간첩 사건이 터질 것인데 얼마나 거짓말을 잘 꿰어맞추는지 보라고 하더군요. 이런 일을 지켜보아야 하는데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었는지 술을 많이 먹었습니다. 얼마 후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발표를 하는데 나도 깜빡 속을 만큼 거짓말을 능란하게 하더군요. 그도 카톨릭 신자였습니다 .”
시노트 신부는 악다구니 칠 기력도 사라져 버린 가족들을 제치고 거칠게 항의하다가 마치 개처럼 경찰에 들려 나오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사형 선고를 들으며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는 그는 실제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소식에 정말로 미쳐 버린 듯이 분노했다.
사형 집행 뒤 화장터로 달리는 차 앞에서 실랑이하는 또 한 명의 신부가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 악을 쓰고 절규하며 시신이라도 가족 품에 돌려달라 외치던 신부는 그 와중에 자동차 사고를 당해 무릎을 다쳐 평생 다리를 절게 된다. 그 이름은 문정현.
문 신부는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대에 올랐다. 흔히 마취에서 깨어날 때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마음에 품고 있던 말이나 생각을 털어놓는 경우가 발생한다고 하는데 이날 문정현 신부는 마취에서 깨어나면서 수술실에 있던 의사와 간호사들을 혼비백산 뛰쳐 나오게 만든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욕설을 퍼부었던 것이다.
“박정희 이 개새끼야! 무고한 사람 죽인 이 천하의 나쁜 놈의 새끼야!”
멀쩡히 살아가던 사람들을 잡아가서 살이 타도록 고문해서 사건을 만들고, 판결이 나오자마자 목을 매달아버린 독재자에 대한 분노는 그렇게 컸다.
그래도 박정희는 사형 선고가 나오던 날 긴급조치 7호를 선언하고 대학교 교문들을 닫아 거는 광기를 부렸다. 겨울 공화국의 살기는 대한민국을 시퍼렇게 물들였다. 적어도 유신 때 박정희는 ‘고난의 행군’ 시절 수십만 인민을 굶겨죽였던 북한의 김정일 못지 않은 독재자였다.
그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의무다
유신 정권에 의해 추방됐던 시노트 신부는 2002년 이후 다시 귀국하여 한국에 정착했다. 그에게 75년 4월 9일은 “생애 최악의 날”이었다. 그는 여러 번 언론과 인터뷰를 가졌는데 4월 9일 이야기만 나오면 눈시울을 붉혔고 끔찍한 일이라는 탄식을 연발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 한겨레 신문 김영배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털어놓는 얘기를 들으며 슬몃 나 또한 눈시울이 데워졌었다.
“(박정희는) 국민을 귀 먹고 눈 없는 동물로 업신여겼다.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았어요. 그런 생활 원하면 (그리워)하라… 박근혜 (대표) 물론 얼굴은 엄마처럼 좋은데 속이 아버지 같으면 안 됩니다. 아버지가 살인자다, 솔직히 말 안 하면 안 됩니다.”
어느 종편 방송의 묘사를 따르면 “100개의 형광등이 켜진 것 같은 아우라”를 지녔다는 박정희의 딸, 박근혜 대통령. 그녀가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이라면 시노트 신부의 충고대로 준열하고 엄중하게 자신의 아버지를 규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는 아버지의 죄를 생물학적 딸이 치러야 하는 연좌율적 차원의 것이 아니라, 부친의 기억을 자신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으로 삼고 있는 공화국의 정치인으로서 치러야 할 의무다. 특히 이날만큼은, 8명이 법의 이름으로 도살된 날, 스위스에 본부를 둔 국제 법학자 회의가 “사법 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선포했던, 이 칠흑으로 덮인 1975년 4월 9일 이날만큼은.
원문: 산하의 오역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