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주인공이자,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의 영웅이기도 한 윌리엄 월레스라는 인물에 대해 얘기해 보자. 실제 이야기가 영화화되면서 바뀌는 부분들이 참 많은데, 이 영화도 많이 바뀐 축에 속한다.
0.
그는 영화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농노나 서민이 아니라 귀족이다.
1.
대귀족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부유하게 살았던 인물이다. 나름 위대한 삼촌이 둘이 있는데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전설적인 검사가 아니라 둘 다 카톨릭 사제다. 그리고 월레스는 어린 시절, 온 동네 여자들 겁탈하고 다니고 말썽이나 피워대던, 이른바 싹수가 노란 ‘양아치’였다고 한다.
2.
영화에서는 와이프가 살해당하고 이에 분노한 월레스가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와이프가 아니라 삼촌이다. 월레스는 이미 유부남이었고 아들도 있었다능. 그 아들은 기록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 양아치스러운 면도, 위대한 전사로서의 면도 물려받지 못했나 보다.
3.
1297년 9월에 벌어진 스털링 전투에서 월레스가 긴 창을 고안하여 에드워드 1세의 기병대를 격파하는 장면은 사실 1307년, 배넉번 전투에서 에드워드 2세의 기병대를 궤멸시킨 로버트 1세(로버트 브루스)가 고안한 전법이다. 참고로 스털링 전투는 기습한 영국군에 맞선 방어전처럼 나오지만 실제 역사는 정반대이다.
다리를 건너던 영국군에 월레스가 기습을 가해서 승리로 이끌었다. 물론 수적으로 스코틀랜드 군이 상당히 열세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와는 다르다.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비굴하게 옹기종기 모여가지고 영국의 칙사에게 머리를 조아리는데 월래스가 나타나서 “니들을 전멸시켜주갔어!”한 후에 일장연설로 군의 사기를 북돋우고, 귀족들에게 “니들은 우회해서 측면이나 까라”하는, 뭐 이런 거 전혀 없었다고 한다. 스털링 다리를 건너는 중에 좌우 양쪽으로 스코틀랜드군이 기습을 걸었고, 아주 일방적으로 순삭시켜버린 전투였다.
4.
영화에서 초지일관 찌질하게 행동하다가 월레스의 카리스마에 낚여서 스털링 전투에서 영국군 후방을 교란하는, 하지만 초지일관 찌질한 인물이기에 나중에는 월레스를 배신했다가 말 타고 성에 들어온 월레스에 의하여 침대에서 무참하게 말에 하반신을 짓밟힌 상태에서 대가리에 철퇴를 맞고 죽는 인물로 그려지는 앤드류 모레이. 그는 사실 에드워드 롱생크스에게 반기를 든 월레스를 개전 초기부터 열렬히 지지한 몇 안 되는 스코틀랜드 귀족 중 하나다.
이 인물은 로버트 브루스 스코틀랜드 대공의 종자였으며, 월레스의 심복이기도 했다. 그는 영화에서 그려진 것과 달리 정치적인 지지기반이 약했던 월레스를 처음부터 후원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와 이름이 같은 그의 아들 역시 로버트 1세(로버트 브루스)를 보필하여 독립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영화 종반에 잠깐 그려지는 ‘제 2차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에서 스코틀랜드의 수호자로 활약하였다.
영화에서는 로버트 1세가 월레스와 그의 부하들에게 기사 작위를 주는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 역사 상에서 그 둘이 직접 대면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모레이가 수 차례 로버트 1세에게 간청을 하지만, “아니 내가 뭔 저런 생양아치를 만나야 됨?” 했다능. 후술하겠지만, 로버트 1세 같은 걸출한 인물에게 있어 월레스 따위는 그냥 생 양아치일 뿐이었다.
참고로 모레이는 스털링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후방에서 요양하던 중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혀 극심한 고문 끝에 죽었다.
5.
월레스의 군대가 무슨 서민 집단으로 이루어진 게릴라군 같은 느낌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중무장한 기사들과 향사들로 이루어진 부대였다. 당대 스코틀랜드의 엘리트란 엘리트는 다 모인 집단이었다. 대장이 어릴 적 생 양아치였다는 걸 제외하면 말이다.
6.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은 사실 ‘전제군주에 대항한 자유인의 역사’ 라기 보다는 실제론 영국왕 vs. 스코트랜드 귀족 간의 정치 싸움에 불과했다. 영국은 스코틀랜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잃었고, 이후 백년전쟁 기간 동안 스코틀랜드가 프랑스와 내통하면서 오랫동안 북부 지방에 의한 견제에 시달렸다. 이는 엘리자베스 1세가 등극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7.
소피 마르소가 29살 때 연기한 이사벨라는 남 몰래 월레스와 그의 군대를 지원하고 또 나중에는 거의 연인이 된 것처럼 묘사되지만 사실 실제 역사에서 둘이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에드워드 1세(에드워드 롱셍크스)가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벌이던 그 시기에 이사벨라의 나이는 고작 10살에 불과했고, 런던의 성에서 밖으로 나온 적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단, 서민들의 삶을 보기 위하여 시찰을 나갔다가 휴대하고 있던 모든 금붙이와 보석들을 서민들에게 나누어줬다는 것은 사실이다. 영화에서 이 에피소드를 지들 입맛에 맞게 각색했을 뿐이다.
8.
스코틀랜드뿐만 아니라 모든 적대 세력들에게 “비열하고 잔인무도한 왕”이었던 에드워드 1세이지만, 사실 영국 입장에서는 그 평가가 상당히 좋은 인물이다. 그의 치세에 영국은 프랑스와 거의 대등한 입장에 서게 되고 영국의 유럽에 대한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그는 의회를 존중하고 귀족들과 성직자들, 그리고 서민들의 권위를 지키는 데 앞장섰지만,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서 결국 북부에 대한 지배권을 잃어버린 인물이다.
10.
에드워드 1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게 되고 결국 글이 다소 길어지는데, 그냥 해야겠다. 서기 1189년, 리처드 1세가 즉위한다. 사자왕, 혹은 사자심왕(Richard the Lionheart)이라 불린 그 사람이다. 헨리 2세의 아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국말을 단 한마디도 못했던 이 사람은, 영국을 통치하기보다는 그 한평생을 십자군 전쟁과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소모했다. 재위 기간 중 사자왕 리차드가 영국에 머문 것은 단 6개월. 그래서 영국 내부의 통치는 그의 동생이었던 존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
1199년, 리차드가 사망하고 존이 영국의 왕이 되었는데… 당시 프랑스의 왕이자, 영국 왕실의 분열을 꾀해왔던 필립 2세가 방해공작을 펼치기 시작한다. 필립 2세는 참고로 사자심왕 리처드가 유럽에서 사망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며, 리처드를 유럽에 고립시키기 위해 존을 지원하여 그가 왕위를 찬탈하려는 시도를 하게끔 획책한 인물이기도 하다. 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프랑스의 왕(Roi de France)” 칭호를 받은 인물이기도.
필립 2세는 리처드 1세가 유럽에서 브레타뉴에서 얻은 아들, 아서가 영국왕실의 정당한 계승자라고 주장하면서, 존이 영국 왕실의 전통을 무시하고 왕위를 넘본다고 비난하며 존을 프랑스로 소환하려했다.(형식상의 문제이긴 했지만, 당시 프랑스와 영국의 관계는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와 비슷했다) 그리고 이에 분개한 존은(그는 필립2세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원정에 나서지만, 연전연패를 거듭한 끝에 아키텐과 노르망디 지역을 몽땅 빼앗기고, 로마 교황과도 충돌을 일으켜 카톨릭 교회에서 파문을 당했다. 그리고 전쟁 자금 마련을 목적으로 대폭 올린 세금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과 성직자들에게도 배신을 당하여, 결국에 왕권을 대폭 축소시키고 봉건귀족들의 권리를 인정해주는 이른바 권리 장전, 즉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에 서명하게 된다.
1216년 10월 19일, 존의 아들인 헨리 3세가 즉위한다. 헨리 3세는 자신의 여동생을 프랑스의 왕가도 아닌, 그냥 일반 귀족 집안에 시집을 보내야 했을 정도로 그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매제가 된 시몽 드 몽포르가 그의 치세 동안 실질적인 섭정으로 영국 왕실을 좌지우지했다. 헨리 3세는 귀족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시몽 드 몽포르를 대함에 있어서도 그릇된 판단을 자주 하였고, 결국에는 귀족들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가 루이스(Lewes) 전투에서 시몽 드 몽포르에게 패배하여 귀족들과 향사로 이루어진 영국 의회가 창설되는 굴욕을 맛 보게 된다. 하지만 이어 즉위한 에드워드 1세에 의하여 시몽 드 몽포르 역시 실각하고 만다.
시몽 드 몽포르의 반란을 제압하지만, 에드워드 1세는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1세는 영국 의회를 오히려 강화시키고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상하정치계급의 화합을 이루어냈고, 귀족들과 기사, 향사들의 권익을 성직자들로부터 지켜냈으며, 윌리엄 월레스라는 골칫덩어리를 처리했다. 그 후 영화에서처럼 이사벨라의 저주를 들으며 시름시름 앓다 죽지 않고 ㅋㅋ 월래스 사후 2년 뒤인 1307년, 로버트 브루스가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함께 전군을 이끌고 다시 전쟁을 일으키자, 이를 정벌하기 위해 친정을 하여 북부로 진군하던 도중 사망하였다. 스코틀랜드를 복속시키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었는지, 그의 아들 에드워드 2세에게 “내 시체를 불태워 그 재를 가죽 부대에 넣어 군사들과 함께 진군하고, 북부를 모두 장악하면 그 재를 스코틀랜드에 묻으라”는 아주 비장한 유언을 남긴다.
11.
그러나 소심한 아들 에드워드 2세는 아비의 유언을 지키지도 않았고, 바로 철군하고 만다. 영화 브레이브하트의 맨 마지막 장면은, 1314년에 벌어진 배넉번 전투(Battle of Bannockburn)의 일부를 그린 것이다. 로버트 1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군 1만과, 에드워드 2세가 이끄는 2만5천의 영국군이 격돌한 전투이다. 스코틀랜드 군의 사망자가 고작 400명에 불과했는데(부상자까지 포함하면 4천여명), 영국군은 중무장기사 700명을 모두 잃고, 보병 1만명이 궤멸당한다. 스코틀랜드의 실질적인 국가에 해당하는 “Flower of Scotland”라는 노래는, 바로 이 배넉번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2.
영화 내내 아주 소심하고 감정적이고 우유부단하지만 순수한 인물로 그려지는 로버트 1세는, 사실 겁나 엘리트 교육을 받은 후계자에 두뇌회전이 빠르고, 전략과 전술에 능한 사람이었다. 전사로서도 그 기량이 당대의 기사들에 비해 월등했으며, 판단력과 온갖 모략과 술수를 쓰는데에는 당대 끝판왕 수준이었던 인물이다. 윌리엄 월래스를 막 띄워주려다보니 모레이는 배신자가 되고 브루스는 찌질이가 되었는데, 참 흥행을 위해서라긴 하지만 이런 역사 왜곡은 솔직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영화에 등장하는 아일랜드인들, 그들인 월래스의 독립전쟁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로버트 1세의 실질적인 “꼬붕”들이었기 때문에 참전을 했다. 당시 로버트 1세의 아일랜드 귀족들에 대한 영향력은 설명할 길이 없을 정도로 넘사벽 수준이었다.
이 로버트 1세, 에드워드 1세, 2세, 3세의 스코틀랜드 침공을 모두 막아낸 인물이다. 실질적으로 영국의 Plantagenet 왕조의 몰락을 가져온 인물이기도 하다.
이 사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제갈량의 두뇌를 탑재한 마초? 곽봉효의 두뇌를 탑재한 봉선? 뭐 거의 그런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p.s.
- 역사왜곡이야 어찌되었든, 브레이브하트는 볼 만한 전쟁영화고, 소피 마르소는 참 예쁘다능. 우훗
- 영화 중반에 에드워드 1세가 창 밖으로 “던져 버려서” 사망하는 에드워드 2세의 심복은 실제 인물이다. 에드워드 2세의 “연인”이기도 했다. 단, 그는 창 밖에서 떨어져 죽지 않았다. 에드워드 2세 통치 기간 중 왕의 심복이라는 입장을 이용해먹다가 귀족들의 탄핵을 받아 처형되었다.
- 에드워드 1세의 별명은 롱생크스(Longshanks). 중세 영국 영어로 그 뜻은 “롱다리”라는 뜻이다. 다리만 긴게 아니라 키도 크고 팔도 길었다 한다.
- 존 왕이 잃어버린 모든 영토는 그로부터 1백여년이 흐른 1415년, 헨리 5세가 아쟁쿠르(혹은 애진코트, 혹은 애긴코트. Battle of Aggincourt)에서 프랑스군을 궤멸시키고, 이후 1417년과 1421년의 원정을 통하여 프랑스를 도륙하면서 되찾게 된다.
- 페이스북 친구이신 심수민님의 조언으로 하나 더. 13-14세기의 스코릍랜드인들은 킬트를 입지 않았다. 아니 킬트라는 의복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대중적인 옷은 결코 아니었다. 스코틀랜드에서 킬트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말엽 이후부터이고, 군복으로 최초로 사용된 것 또한 1623년 이후의 이야기다. (물론, 킬트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는 것은 스코틀랜드의 전통이 맞긴 하다)
원문: 성년월드 흑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