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realjonghyun90) 2015년 7월 11일
@realjonghyun90안녕하세요 종현님. 여성 숭배와 여성 혐오는 한끝 차이입니다. 여성은 딱히 더 ‘축복받은 존재’도 아니고, 남에게 영감을 주려고 태어나는 존재도 아니며, 스스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주체입니다. — 퀼사 (@quilliticy) 2015년 7월 11일
지난 7월의 뮤즈 논란을 되돌아보며
혐오의 대상과 범위가 점점 넒어지고 단순해지는 요즘 상황이 편치 않다.
여성비하와 여성숭배는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으며, 여성을 뮤즈라고 칭하는 것 역시 혐오의 다른 이름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여성 혐오가 반드시 대상화에서만 온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많은 존재들을 대상화하면서 살지만 그 모든 것이 혐오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예술가들에게는 창작에 영감을 주는 여러 존재들이 있고 여성도 그 중 하나다. 여성 예술가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모든 남자 예술가가 뮤즈를 가진 것도 아니어서 이 비난의 대상은 정확히 말하면, 뮤즈가 있(다고 발언한)는 남성예술가로 한정된다.
왜 여성만을 뮤즈라고 하느냐는 항의가 예술가에게 성립할 수 있는 질문일까? 영감이란 그냥 그 존재가 나에게 자극이 된다는 것인데, 너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내 뮤즈만 하라고 감금해두고 착취하는 게 아닌 다음에야(만약 그런다면 그건 여성혐오 차원이 아니라 이미 범죄이고), 홍시맛이 나서 홍시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일에 너한테 영감을 주는 여성이 있다니, 너는 여성혐오자야! 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다른 존재에게 영감을 받는 건 문제가 없는데 여성이 자신의 창작에 영감을 주는 존재라고 말하면 혐오로 규정되는 것일까. 우리는 아이들을 늘 천사라고 찬양한다. 순백의 존재로 숭배도 한다. 그럼 아이에 대한 이같은 발언은 아동혐오인가. 여성 예술가가 여성을 뮤즈로 삼는 건 여성혐오인가 아닌가. 뮤즈 발언에 대한 거센 반응들을 보면서 여러 질문이 생겼다.
질문이 생겼다
어떤 맥락에서 숭배가 혐오로 귀결될 수 있는지 그 위험성을 말하는 건 필요하다. 하지만 “숭배나 혐오나 여성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 건 똑같다”고 단순하게 말하는 것은 설득되지 않는다.
같은 인간이지만 찬양하고 숭배할 수 있다. 나는 지디를 숭배한다. 어떨 땐 저게 과연 사람인가, 싶을 때도 있는데 이것이 그에 대한 혐오인가.
나는 여자니까 지디를 상상하다가 내가 쓰는 드라마에 영감을 얻고, 그를 숭배해도 혐오가 아닌데, 남자는 여자를 상대로 그러면 여성혐오자가 된다는게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대상에게 물리적인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면 예술가 내면의 문제일 뿐, 혐오자의 낙인을 씌워 단죄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숭배가 혐오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떤 숭배는 혐오로 귀결 될 수 있다. 그럼 그 지점을 말하면 된다.
엄밀하게 말해야 할 일을 뭉뚱그려 비난하면 문제가 생긴다. 예술가로서 훌륭한 자질을 가진 여성을 평생 자기 곁에 두고 착취해서 훌륭한 예술가가 된 남자, 그리고 성공한 후에 버려지는 스토리들, “오 나의 뮤즈여, 나를 떠나지 말아요” 그런 애원에 발목잡혀 스스로 인생을 박복 스토리로 만든 불운한 여자들, 이걸 또 치명적인 사랑 얘기로 둔갑시킨 사례들… 잘난 여자들이 남자 잘못 만나 불행해지는 경우 그 남자의 상당수가 그저 ‘악한’ 남자가 아니라 치명적인 남자이다 보니, “여자 숭배한다고 하는 놈들 다 쓰레기”라는 단순한 비난이 호응을 얻기도 한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니라고, 이해되지 않는 건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여성을 숭배하는 남자를 곧바로 여성혐오자라 비난하는 것은 저지르지 않은 범죄를 미리 비난하는 것과 같다. 혐오의 죄는 그가 실제로 여성을 혐오했을때 물을 수 있다. 너는 앞으로 분명히 여성을 혐오할 것이기 때문에 미리 비난해둔다, 는 성립할 수 없지 않나. 물론 ‘여성숭배=여성혐오’라고 생각하는 분들과는 의견이 갈리겠지만.
단순화하여 낙인찍을 때, 설득은 어려워진다
여성을 남성보다 우월한 존재로 본다는 종류의 발언을 자주 하고, 여성 친구들과 우정도 돈독한데, 여성숭배의 탈을 쓴 여성혐오주의자로 공격받는 대표적인 남성이 고종석 작가다. ‘호보호지(보지를 보지라고 당당히 불러야 한다는 일부 여성주의자의 주장)’에 문제제기를 한다고 해서, 여성이 더 우월한 존재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를 여성혐오자자로 분류할 것인지, 그가 과연 여성혐오를 없애기 위해 단죄해야 할 영순위의 존재인지, 혐오자의 숫자를 늘리는 게 여성혐오를 줄이는 데 효과가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샤이니 종현의 뮤즈 발언 때 몇몇 트위터 페미니스트들한테 비난을 받고 논쟁을 벌인 진중권도 마찬가지다. 고종석 등이 한참 비난받는 국면에서 어떤 페미니스트(스스로 페미라고 선언한)들이 호주제가 폐지되었기에 망정이지, 지금 호주제 폐지 운동을 했다면 아마 실패했을 거라고 말하는 걸 봤다. 답답했다. 그들을 비난하는 데 하필 호주제 폐지 운동을 가져오다니, 스스로 여성운동의 역사에 무지하다는 걸 드러내는 말일 뿐이다.
그녀들이 비난하고 여성혐오자라 낙인찍은 상당수 진보남성들은 호주제폐지운동에 함께 했을 뿐 아니라 여성들만큼 여성을 억압하는 악습에 저항했던 사람들이다. 여성운동가에게 스페셜 땡스로 거론될 만큼 동지다.
“….다행히 최근에 ‘열린’ 가슴을 가진 남성들을 도처에서 만나게 되어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조선일보의 이규태씨에게 남녀문제에 대해서는 입 다물라고 말씀하신 강준만 교수, 황혼이혼을 지지하신 백경남 교수, ‘가부장적 생활의 보수’를 참을 수 없다는 임지현 교수 등과, 히틀러의 이상형은 순종하는 현모양처였다며 한국 가부장제의 파쇼성을 선언하신 진중권님 , 한국남성은 남성우월주의 구조로 인하여 폭력적 남성으로 사회화되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 양심고백을 한 변정수님, 호주제 등 가부장제 폐해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져주신 김어준·고종석님, 호폐 인터넷 사이트 가꾸기와 서명에 열정을 쏟는 호성, 재언, 웅식, 수연, 세 아이 아빠, 아나키아, 붉은여우…님들, 부모성 함께 쓰기에 동참하고 계신 이박재석, 안이영노, 변이희재, 김공영인, 구최도형, 김박정선…님들, 아이 이름을 부모성 함께 쓴 이름으로 신고했다거나 혹은 바꾸고 싶다고 전화해주시는 젊은 아빠들…”
─ 여성신문 2005년, 은광순, ‘편견을 깨려는 ‘열린’ 남성들에게‘
이들이 여성혐오자로 격렬하게 비난받는 지금은, 여성혐오의 기준이 더 엄밀해진 것이므로 나은 세상으로 진보했다는 증거일까, 이랬던 남자들마저 여성혐오자가 될 만큼 여성혐오가 넘치는 나쁜 세상이 되었다는 증거일까.
힘이 빠질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설악산을 돈 몇 푼으로 쉽게 살 수 있는 매춘부로 만들지 말자. 우리의 엄청난 구애행위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도도한 여신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우리를 위해서나 후손들을 위해서 말이다.”
─ 경향신문 2013년, 강신주, ‘설악산, 여신으로 남을 것인가 매춘부로 만들 것인가‘
철학자 강신주의 일간지 칼럼 제목이다. 이 제목이 여과없이 독자와 만나는 사례들 때문에 정교한 말을 하려다가도 힘이 빠진다. 이 대목을 빼도 필자의 주장을 전달하는 데 무리가 없다. 설악산 케이블카 문제를 굳이 여성에 대한 혐오와 숭배의 상징인 ‘매춘부와 여신’을 동원해서 해버리니, 여성혐오와 여성숭배가 위험하게 맞닿아 있다는 주장은 저런 글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그럼에도, 무조건 혐오로 낙인찍지 말고 개별 사안들에 대해 합리적으로 판단했으면, 치열하게 대화하고 설득하고 논쟁했으면 한다.
원문: Women in Wri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