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 비극은 역사에서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희한한 사건이라 그동안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로 자주 쓰였다. 어린 시절 TV에서 울부짖는 미치광이 왕자와 아들을 근엄하게 꾸짖는 늙은 왕의 모습을 다들 한두 번은 보아왔으리라. 과거 사도세자를 그린 영화와 드라마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또 그 작품들은 <사도>와 어떻게 다른지 살펴봤다.
1950~2000년대까지: 영화와 드라마가 사랑한 주인공, 사도세자
필자가 찾은 사도세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은 안종화 감독의 1956년작 <사도세자>였다. 토월회에서 연극을 하다 춘사 나운규 감독의 추천으로 영화계에 진출한 그는 한국전쟁 이후 만든 이 영화에서 사도세자를 정사를 내팽개친 광인으로, 영조는 어쩔 수 없이 아들을 죽인 군주로 그렸다.
1963년엔 임권택 감독이 영화 <망부석>에서 사도세자를 스크린으로 옮겼다. 신성일이 연기한 사도세자는 칠순의 연로한 영조를 대리청정하지만 화완옹주(도금봉)의 이간질에 의해 영조의 미움을 사게 된다. 화완옹주는 영조에게 세자가 창경궁 뒤에서 토굴을 파고 부왕이 죽기만을 기도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이에 영조는 세자의 패륜을 문제 삼아 뒤주에 가둔다. 이후 영화는 10여년을 건너 뛰어 정조가 화완옹주의 방해를 물리치고 즉위하는 과정까지 그리고 있다. 혜경궁 홍씨는 망부석처럼 기다려 아들을 통해 남편의 한을 풀어주는 여인으로 등장한다.
1970년대 이후 사도세자는 영화보다 TV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됐다. 남일우가 사도세자를, 김자옥이 혜경궁을 연기한 <한중록>(KBS, 1972)에 이어 최불암이 영조, 유인촌이 사도세자, 김영란이 혜경궁을 연기한 <안국동 아씨>(MBC, 1979)가 나왔는데 이 드라마에선 유인촌의 광인 연기가 화제가 됐다.
1988년엔 KBS와 MBC가 나란히 사도세자를 소재로 한 사극으로 맞붙었다. 김성겸(영조), 정보석(사도세자), 하희라(혜경궁)을 앞세운 <하늘아 하늘아>(KBS)는 ‘한중록’에서 혜경궁이 “하늘아, 하늘아!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고 토로한 대목을 드라마의 제목으로 썼다. 같은 해 <조선왕조 오백년 – 한중록>(MBC)은 김성원(영조), 최수종(사도세자), 최명길(혜경궁), 김용건(정조) 등 화려한 캐스팅으로 맞붙을 놓았다.
이후 한동안 사도세자를 다룬 드라마가 없다가 10년 뒤 외환위기가 한창인 1998년 <대왕의 길>(MBC)에서 박근형(영조), 임호(사도세자), 홍리나(혜경궁) 주연으로 다시 한 번 사도세자가 TV 전파를 탔다. 비록 낮은 시청률로 조기종영됐지만 <한중록>의 고어체를 그대로 구현해 고증이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던 작품이다.
2008년 MBC <이산>에도 사도세자가 잠깐 등장하는데 이때 영조는 이순재, 사도세자는 이창훈이 연기했다.
혜경궁 홍씨의 기록에 의존했던 기존 영화들
지금까지 살펴본 드라마와 영화들의 공통점은 혜경궁 홍씨가 저술한 『한중록』에 의존한 작품들이라는 것이다. 사도세자는 미친 남편, 영조는 어쩔 수 없이 아들을 죽인 왕, 혜경궁은 이를 기록한 비운의 아내라는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날들의 기록이 자세히 적혀 있지 않고, 『승정원 일기』는 정조의 요청에 의해 세초됐기 때문에 의존할 수 있는 사료는 『한중록』뿐이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새 사도세자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2011년 발간한 책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의 원인을 생모 선희궁, 장인 홍봉한, 아내 혜경궁까지 가세한 노론 세력의 치밀한 개혁군주 제거 음모에서 찾았다.
새로운 접근이 대중의 반향을 얻으면서 드라마 <비밀의 문>(SBS, 2014)과 영화 <역린>(2014)에는 사도세자가 노론을 혁파하려다 비운의 최후를 맞은 개혁군주로 등장한다.
이준익 감독의 <사도>는 다르다
그러나 이준익 감독의 <사도>는 이들 작품과 또 다르다. 이 감독은 연출의도에서 사도세자 사건이 그리스신화처럼 상징적이어서 끌렸다고 밝혔다. 즉, 왕과 왕자 사이의 비극이기 전에 부자지간의 참극이라는 이야기의 원형으로 바라본 것이다.
<사도>의 엔드크레딧에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과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이 참고문헌으로 올라간다. 10년 간 조선왕조실록을 만화로 옮긴 박시백은 임오화변의 노론음모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당시엔 노론이 이미 평정한 시절이라 노론 중에서도 파벌에 따른 갈등이 있었을뿐 사도세자가 편을 들어줄 소론은 존재감이 거의 없을 정도로 몰락한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당시 신하들은 누구도 나서서 사도세자의 기행을 영조에게 고하지 않을 정도로 왕이 될 세자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는 것이다.
그 대신 박시백은 사도세자 죽음의 원인을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에서 찾았다. 영조와 사도세자는 성격이 극과 극으로 달라 사사건건 마찰을 빚었는데 마침 영특한 세손이라는 대체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영조는 철저한 정치적 손익계산을 통해 세손을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고 아들을 없애기 위한 계획에 착수했다는 것이다. 만약 아들을 살려두면 영조 사후 세손이 집권하더라도 상왕으로 행세하며 궐내 피바람이 불 것을 우려했기에 그를 필히 없애야 했다는 것이다. 영조가 뒤주라는 아주 특이한 사형방식을 생각해낸 것은 정조에게 왕위계승 정통성의 멍에를 씌우지 않기 위함이었다.
또 『한중록』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국문학자 정병설은 『권력과 인간』에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전전날 밤 칼을 들고 경희궁을 찾아가는데 이때 영조뿐만 아니라 세손까지 죽이려 했다고 썼다. 영화 <사도>에서도 이 장면은 도입부에 등장해 중요한 갈림길로 그려진다.
그리스 신화 속 아버지를 살해한 오이디푸스 왕자 혹은 아버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제우스처럼 사도세자는 왕을 죽이느냐 혹은 자신이 죽느냐의 갈림길에 서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칼을 내려놓는다.
이때 그가 칼을 내려놓도록 붙잡은 것은 어린 세손의 마음이었다.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지켜온 구체제가 자신의 아들에게로 승계되기 위해 자신이 죽어야만 하는 운명 앞에서 그는 빗물인지 모를 눈물을 흘린다. 이때 그는 아마도 자신이 쏘아올린 화살을 떠올렸을 것이다. 떳떳하게 날아간 화살이 되고 싶었던 그가 만약 그날 일을 벌였다면, 그는 평생을 떳떳하게 살지 못했으리라.
결국 사도세자가 거사를 모의하고도 실패한 이유는 아버지처럼 될 수 없다는 그의 바람 때문이었다.
영화는 그날의 실패한 거사 이후 사도세자가 왕명을 받고 뒤주에 갇혀 죽기까지의 8일을 그리고 있다.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의 현재 모습과 그가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의 성장과정의 플래시백을 교차편집해 죽음의 원인을 하나씩 파헤쳐간다.
이미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 결국 황망한 정치적 노림수로 이어지는 과정을 묘사한 영화는 <사도>가 처음이다. 이준익 감독은 10년 전 만든 <왕의 남자>에서도 권력의 무상함을 광대를 통해 풍자한 적 있는데 <사도>의 메시지도 다르지 않다. 10년 전보다 더 묵직해졌고, 더 설득력 있다.
원문: 양유창의 창작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