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세 해프닝
작년 가을, 싱글세 운운하면서 몇 가지 해프닝이 있었다. 발언 당사자도 농담이었다는 듯이 눙치고 지나갔고, 간을 보았으나 하루 동안 온갖 조롱은 다 당했으니 아마 이 명목으로 과세를 추진하지는 않을 듯 싶다. 그런데, 사실 부양 가족에 대한 다양한 공제 혜택을 주는 것으로 사실상 싱글들에게 더 높은 세금을 물리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예전에 캐나다 국적의 여자 팀원을 데리고 있었던 적이 있는데, 이 친구는 캐나다와 미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한국에 와서 일을 하고 있었다. 대표성이 없는 발언이라 자료를 찾아봐야 하긴 하겠지만, 한국에 오면서 급여는 줄었는데 실수령액은 오히려 나아졌다는 말을 하면서 “캐나다에서는 싱글이면 세금 30%씩 내는데, 한국은 그게 없고 세금 적게 내니까 너무 좋아요.”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이에 더하여, 캐나다에서는 월급 받으면 30% 세금 내고, 30% 월세로 나가고, 자동차 할부금 내면 아무 것도 없었는데, 렌트비도 싸고,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어서 차 없이도 다닐 수 있다며 돈이 모인다고 좋아했다.
명목은 뭐가 됐든 (세율을 높이고 결혼하거나 자녀가 있는 경우에 공제를 폭넓게 해주는 방식이든, 아니면 세율을 낮추고 싱글들에게 추가적으로 과세를 하던 방식이든) 이미 싱글들이 세금을 더 많이 부담하는 건 사실이다.
당시 한동안 이 이야기로 다양한 웃음거리가 양산됐었는데, 이 사태를 보면서 얻어야 할 시사점은 싱글세가 얼마나 터무니 없는지가 아니라, 오히려 ‘직접세 증세에 대한 저항’이 아닐까 한다. 죄악세 중에 하나로, 거의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이 공감하는 ‘흡연을 줄여야 한다’는 목적에 부합하는 담배에 부과되는 간접세를 올리는 것도 얼마나 쉽지 않은지(심지어 다른 나라 대비 현저히 낮은 것을 다른 나라보다 낮은 수준으로 올리는 것도) 올해 초에 보았다.
죄악세+간접세도 이렇게 올리기 어려운 마당에, 감히 직접세를 언급한 저 고위 관료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인지 간을 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우리나라 과세의 문제점: 한정된 담세층, 허약한 담세구조
여기서 예전에 썼던 글을 일부 인용한다.
… 내가 이 일련의 사건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떻게든 비용이 발생하는 문제에 있어 그 비용은 ‘세금’으로 조달하든 아니면 사용자가 ‘요금’으로 비용을 지불하나든 누군가는 지불해야 하는데, 그 두 주체가 분리되어 있다는 점을 누구도 차마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세금’을 내는 사람이 전국민 가운데 1%~10% 정도 밖에 되지 않으니 누군가에는 ‘세금’은 사실상 공짜와 다를 바 없다.
정부가 세금으로 이를 운영한다고 하면 그에 따라서 증가하는 세금 부담에 대해서도 동의를 하여야 한다. 이를테면 ‘요금 인상이 되는 민영화 vs. 국영 유지’는 올바른 질문이 아니다. ‘사용자에게 요금으로 부담을 지우는 민영화 vs. 세금으로 철도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증세를 하는 국영 유지’인가가 정확한 질문일 것이다. 이것이 보다 문제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 담세 구조에서는 후자의 질문이 무색해지고 세금은 공짜다. 왜냐하면 우리 나라 사람의 대부분, 그리고 경제활동 인구의 70%는 사실상 세금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국가들처럼 누구라도 소득의 30% 이상을 (직접세인) 소득세로 내고, 25%의 부가가치세를 물건을 살 때마다 낸다면, 민영화의 문제는 내가 이야기한 바와 같이 후자의 질문으로 논의가 전개될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1%의 국민과 법인이 세금의 절반 이상을 내고 10%가 70%의 세금을 내고 30%가 90%가 넘는 세금을 내는 이 구조에서, 70%를 점유하는 사실상 면세자에게 ‘세금’으로 재원을 조달한다는 건 공짜를 의미한다. 민영화를 해서 정부 재정 지출이 줄게 되는 만큼 감세를 해준다고 해도, 이들이 볼 혜택은 없다. (후략)
이에 얼마 전에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한국경제신문의 논설위원이 쓴 글에서 몇 개 숫자를 덧붙인다.
“현재 상위 1%가 전체 소득세수의 45%를 낸다. 상위 5%가 80%를 부담한다. 근로자 중 세금 안 내는 사람이 32.7%다(이는 많이 낮아졌다). 과표기준소득 1억원 이상은 10만9,000명이다. 이는 납세자의3.9%이지만 전체 세수의 67%를 낸다.”
이를 바탕으로 현재 우리 담세 구조가 얼마나 허약한 지를 한 번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나라의 1인당 GDP(GDP Per Capita)는 환율에 따라 변동이 좀 있기는 하지만 약 $25,000~$27,000 정도 된다. 이 가운데, 법인에게 뿌려지는 것을 제외하고 가계에 뿌려지는 것은 약 70%로, 추산해 보면 $17,500~$19,000 정도 된다. 가계 소득 통계도 이와 유사한데, 2인 이상 가구(즉, 1인 가구 제외)의 소득 분위는 아래와 같다.
내가 거시 경제학자가 아니라 공장 다니는 사람이라 이런 통계를 잘 볼 줄 모르는데, 10분위라고 하는 것은 상위 0~10% 가구의 평균 소득일 것이다. 이게 연봉 1.15억이다. 상위 10~20%의 평균이 7,100만원이다. 그리고 상위 20~30%의 평균 소득이 약 6,000(5,890)만원 정도 된다. 그냥 구간 내에서는 리니어(linear)하게 봐서 가구 소득이 6,000만원이면 상위 25%에 속하는 가구라고 보면 될 듯 싶다.
농촌에 비해서 도시 가구 소득은 조금 더 높아서 아래 그래프와 같다.
큰 차이는 없고 아주 살짝 더 높을 뿐이라 도시도 연 소득 6,000만원(월 500만원)이면 대략 8분위의 평균 즉, 상위 25% 근처가 된다. 물론 2011년 자료라서 그 사이에 엄청난 경제 성장이나 불황이 있으면 수정해야겠으나, 알다시피2011년 이후 경제성장률은 2%대이고, 인플레이션은 디플레를 걱정해야 할 만큼 안정되어 있으니, 그냥 대체로 큰 변동은 없다고 본다.
자, 그렇다면 우리 나라의 직접세의 담세 구조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한 번 살펴보자.
남자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하여 중견기업에 다니는 직장 생활 8년 차의 대리로 연봉은 3,500만원이라고 해보자. (무리한 가정인가?) 반면 여자는 이 보다 조금 못한 직장을 다니는 5년 차의 직장인으로 연봉은 2,500만원으로 부부 합산 가구 소득은 6,000만원, 상위 25%의 가구 소득에 속한다. 이들은 직장까지 대중 교통으로 한 시간 소요되는 거리에 신도시에 전세로 거주하고 있으며 3살 짜리 딸이 있다. 이들이 부담하는 직접세는 얼마일까?
딸을 부양 가족으로 등재한 남자는 월 소득세 2.5만원(국세)과 지방소득세 0.25만원을 원천징수 당한다. 소득세율은 0.94%다. 여자는 부양 가족이 없으니 싱글과 똑같이 취급하여 월 소득세 1.7만원(국세)와 지방소득세 0.17만원을 원천징수 당한다. 세율은 대략0.89% 정도 된다. 이들이 내는 직접세는 당연히 전세 거주자이므로, 재산세/취등록세 등이 없고, 보유하고 있는 아반테 승용차에 대한 자동차세 25만원 정도가 추가 되어 최종 직접세 부담은 80만원이 된다. 최종 담세율은 1.3%(=세금 80만원/세전 소득 6,000만원)이 된다. 건강보험 개인부담금이 대략 소득의 2.9%이므로 건강보험에 들어가는 것의 절반도 안 되는 걸 내고 모든 공공서비스를 이용한다.
물론 이것은 굉장히 관대하게 잡은 것이다. 사실 저 지경이면 부모 4명 중에 한 명 정도는 부양 가족으로 등재하거나, 전세금 대출금 이자에 대한 소득 공제, 신용카드 사용액과 현금 영수증으로 인한 공제 등을 받고 나면 사실상 ‘면세다.’ 그나마 냈던 소득세 55만원도 연말 정산으로 다 돌려 받고 내는 세금이라고는 자동차세 밖에 없다.
자, 상위 25% 소득의 가구가 사실상 한 푼도 세금을 내지 않거나, 소득 가운데 최대 1.3%의 직접세를 내는 담세 구조가 정상인가. 재정 지출을 위한 재원의 확보가 과연 지속 가능한 구조인지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한다.
참여 민주주의를 위한 ‘자기관련성’의 실종
하지만 재원의 조달은 있는 사람한테 더 뽑아내고, 누락된 세원들을 포착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면 반발이야 있겠지만 어쨌거나 올릴 수는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실종을 낳는다.
비록 대의제를 택하고 있으나, 민주주의는 결국 자기의 운명을 자기가 결정할 수 있도록 참여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관련성이 있어야 하는데, 담세를 하지 않는 경우에는 공공 정책에 대한 자기 관련성이 현저하게 떨어지게 된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국왕의 과세권에 대한 저항의 역사였고, 과세권을 통제하기 위해서 내가 직접 혹은 내가 선출한 대표인 의원들이 입법기관을 형성하여 세금을 다루도록 했다. 그런데 대부분이 세금을 내지 않는다면 공공 정책에 대한 자기 관련성이 현저하게 떨어질 것이다.
다시 예전에 쓴 글의 일부를 가져온다.
개개인의 이해관계와 연결 고리가 없는 사회적 논의는 정파적 견해로 흐르기 쉽다. 세금을 아예 내지 않거나(40%), 사실상 내지 않거나(70%), 미미하게 내는(90%)의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오가는 이야기들은 실질적이지 않다. 현실에서 그것이 어떻게 작동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되기보다, 당파성에 의해 좌지우지되기 쉽다.
이처럼 실생활에서의 영향과 유리된 사회적 이슈는 정치적 당파성을 바탕으로 원칙론에 휘둘리고 강경론으로 흐른다. 나는 사회적 논의들이 충분히 성숙되기 위해서는 보다 폭넓은 사람들이 담세를 하여 그것이 모두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정치의 젖과 꿀인 타협(Compromise)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렇게 자기 관련성이 떨어지는 경우에는 전형적인 현상이 나타난다.
돈을 버는 사람 따로 돈을 쓰는 사람 따로라면 당연히 둘의 인센티브 구조는 달라진다. 돈을 쓰는 사람은 쓴 돈의 효과가 극대화 되는 쪽에 신경을 쓸 것이고, 돈을 걷는데 얼마나 어려움이 있는지는 경시할 수밖에 없다.
돈을 쓰려고 할 때는, 반드시 그만큼 돈을 쓰려면 그 돈만큼 어디서 덜 쓰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붙어 있어야 한다. 독거노인에 대한 지원을 줄일지, 차세대 전투기를 한 대 덜 살지 등등. 즉, 추구해야 할 여러 가치들 중에서 어느 것을 후퇴시킬지에 대해서 분명히 언급되어야 한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다른 것들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돈을 추가로 걷어서 하는 방법도 있으므로, 그 돈을 더 걷기 위한 방법들이 반드시 첨부되어야 한다. 남의 돈으로 생색내기는 쉬운 법이다.
물론 모든 정치 세력은 정권을 잡기 전에는 ‘저 부도덕한 놈들이 허술하게 운영하거나 삥 뜯는 것만 줄여도 다 가능함’이라고 공언하지만, 세상만사 어찌 그렇게 쉽고, 사연 없는 무덤이 어디 있겠는가. 막상 뭔가 해보려면 다 그 돈에 관련된 이해관계 당사자가 있고, 막상 줄여 보려고 해도 줄일 돈은 얼마 되지도 않고 커다란 반발에만 부딪히게 되기 십상이다.
우리 나라 재정 지출 가운데 많은 돈은 공무원 월급, 국가가 보유하고 있는 사회간접자본들의 유지 보수 비용, 재정자립도가 떨어지는 지방자치단체에 보조 같은 고정성 지출이다. 이런 고정성 지출을 빼고 나면 일회적으로 무엇인가를 할 재정은 사실 손바닥 보듯 빤할 것이다.
이건 공화의 실종이요,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
세금의 이중적 의미: 공공재정 조달과 참여 민주주의를 위한 자기관련성 확보의 수단
내가 이 대목에서 하고 싶은 말은 저 부부가 0~1.3%의 세금을 부담하는 바람에 단순히 재정이 빵꾸난다는 게 아니다. 저 부부가 매달 약 4만원을 내고 50만원의 혜택을 보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렇게 되면 저 부부는 공공 정책을 논할 때 자기관련성이 현저히 적어지기 때문에 정치가 생활로부터 유리된다는 것이다.
한 푼도 안 내고 50만원의 혜택을 받는 경우와 매달 50만원을 내고 100만원의 혜택을 받는 두 가지 경우를 나누어서 생각해보자. 나는 복지 혜택을 줄여서 50만원을 받으려면 50만원을 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다만, 50만원을 내고 100만원의 혜택을 받으면 ‘내가 내는 50만원이 꼭 필요한 것인가, 이걸 굳이 세금으로 해야 할까 아니면 그 공공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이 이용료로 지불하는 게 맞을까’ 등을 고민하게 되고, 그 논의에 참여하게 된다.
또한 과도한 정파적 견해에서 벗어나 돈을 모으고 쓰는 일에 대하여 합리적인 논의가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는 민주주의와 정치를 성숙하게 만든다. (제발, 맨날 선거구제 개편이 정치의 전부인 것처럼 하지 좀 마라.) 예전에 스웨덴 모델(렌-마이드너 모델)에서 언급했다시피, 스웨덴은 이게 가능하다.
반면 0원을 내고 50만원의 혜택을 본다면 여전히 내는 것 대비해서 50만원의 혜택을 더 본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공공정책은 일종의 덤이고 호의는 계속 되어야 한다고 가볍게 여기거나 한 푼도 더 낼 마음은 없으나 혜택이 60만원이 될 수 있을 거라 기대하기 쉽다. 꼭 필요한 것을 위해 세금이 걷히도록 하고, 그렇게 걷어진 게 제대로 된 곳에 쓰이는지 감시하는 일에 대한 자기관련성이 적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치와 일상의 분리, 공화의 실종,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다. 뭐라 이름 붙이든 나는 자기관련성의 저하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소결. 지금 연간 80만원 내고 300만원의 혜택을 보는 가계가 있다고 하면 무슨 뉴라이트 나부랭이들이 이야기하듯 80만원의 혜택만 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80만원을 내고 300만원의 혜택을 보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이들이 여전히 220만원의 추가 혜택을 보게 하되, 세금을 600(10%)만원 내게 하고 820만원의 혜택을 보게 해서 공적 담론의 장으로 끌어들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