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는 No! 가슴골은 감추고, 담배는 절대 안 돼!
조선 시대 사극의 세트장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의 영화 포스터 심의 과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의 들쭉날쭉한 심의 기준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그런데 최근엔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과거엔 허용됐던 것들이 이젠 안 된다. 시대를 역주행하고 있다.
외국의 경우 포스터 역시 예술 작품으로 존중받는다. 솔 바스처럼 영화 포스터로 한 획을 그은 디자이너도 있다. 물론 포스터는 ‘기둥(post)에 붙인 게시물’이라는 어원처럼 불특정 다수에게 보이는 만큼 심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나치게 보수적인 심의는 창의성을 갉아먹는다. 키스 장면만 나오면 반려하고, 담배가 나오면 무조건 삭제해야 하는 현재의 기준 아래에서 창의적인 포스터가 나온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영화 〈시네마천국〉에서 아델피오 신부는 키스 장면만 나오면 종을 울리며 이렇게 외쳤다. “절대 안 돼!” 하지만 그렇게 삭제된 키스씬은 엔딩에서 명장면으로 재탄생했다. 영등위가 심의 반려한 포스터 중 납득하기 힘든 사례를 모아봤다.
〈라이프〉: 담배를 끊은 제임스 딘
영화 〈라이프〉는 포토저널리스트 그룹 매그넘 소속 사진작가 데니스 스톡이 무명이던 제임스 딘을 만나 역사에 남은 사진을 촬영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 영화의 포스터는 두 사람이 남긴 전설적인 사진에서 따온 것으로 1955년 제임스 딘이 뉴욕 맨해튼 타임스스퀘어를 등지고 걸어오는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코트 깃을 세우고 담배를 문 채 걷는 제임스 딘을 데인 드한이 거의 똑같이 재연했다.
그런데 한국판 포스터를 보면 데인 드한의 얼굴에서 감쪽같이 담배만 삭제돼 있다. 아무리 담배가 청소년에 유해하다고 해도 이렇게 사진 작품을 오마주한 포스터에서까지 엄격하게 적용하는 건 원작에 대한 모독 아닐까?
〈폼페이〉: 키스하다가 멀어진 연인
영화 〈폼페이: 최후의 날〉은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며 18시간 만에 사라진 도시 폼페이에서 마지막까지 서로를 놓지 않은 연인의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오리지널 포스터에는 남녀 주인공이 화산보다 더 뜨겁게 키스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하지만 영등위는 이 포스터를 ‘키스 장면은 안 된다’는 이유로 반려했다. 결국 영화 수입사는 남녀 주인공이 살짝 떨어져서 바라보는 장면으로 이미지를 수정한 뒤에야 심의필증을 받을 수 있었다.
16세기 말 폼페이에서 발굴된 인간 화석은 그동안 다양한 예술 작품에 영감을 주어 왔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엄마, 연기를 피해 고개 숙인 남자 등 2,000년 전 그들의 마지막 모습은 아주 생생해 감동을 주었다. 영화는 그중 서로의 품에서 죽어간 연인을 모티프로 했다. 하지만 한국판 포스터에서 이 연인은 키스도 못 해보고 인간화석이 되어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 한 방울의 피도 아껴라
피가 너무 많이 나와서 포스터 심의가 반려됐다. 공포 영화 포스터냐고? 하지만 〈엣지 오브 투모로우〉는 공포영화가 아니다. 타임 루프에 갇힌 군인을 소재로 한 SF 액션 영화다. 영등위가 문제 삼은 것은 톰 크루즈의 얼굴에 묻은 핏자국이었다. 결국 영화 수입사는 핏자국을 포토샵으로 다 지우고 나서야 포스터를 공개할 수 있었다.
영등위는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색의 사용을 철저히 제한한다. 흉터와 같은 신체 훼손의 흔적도 사용할 수 없다. 〈300: 제국의 부활〉의 선혈도, 〈미스좀비〉의 얼굴 흉터도 대부분 지우고 심의 통과됐다. 이해는 간다. 폭력적인 이미지가 청소년에게 무방비로 노출되면 영향을 미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엣지 오브 투모로우〉의 톰 크루즈 얼굴에 거의 검게 말라붙은 핏자국까지 간섭한 것은 조금 과해 보인다.
〈아메리칸 허슬〉: 가슴골 노출은 절대 안 돼
2014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0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고도 단 한 개의 트로피도 가져가지 못한 불운의 영화 〈아메리칸 허슬〉은 영등위의 포스터 심의 과정에서도 한 차례 반려되는 아픔을 겪었다. 미국판 포스터와 한국판 포스터를 비교해보라.
다른 점을 금방 찾을 수 있다면 당신의 눈썰미는 아주 뛰어나거나 혹은 (영등위 기준으로 보면) 아주 음흉한 셈이다. 아직 못 찾았다고? 정답은 에이미 아담스와 제니퍼 로렌스의 가슴골에 있다. 영등위는 가슴골 노출이 선정적이라며 심의 반려했고, 이에 한국판 포스터에선 가슴골이 지워져 두 여배우는 모처럼 차려입은 드레스가 폼이 나지 않는 치욕을 맛봐야 했다.
마치며
“우린 예술성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유해성만 판단한다.”
영등위 관계자의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포스터들은 미국과 유럽, 일본 등에선 문제없이 사용되고 있는 포스터들이다. 영등위는 B 사감처럼 유독 한국 청소년만 더 보호받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시시콜콜한 것까지 일단 다 잡아내고 보는 게 유해성의 판단 기준은 아닐 것이다. 참, B 사감은 낮에는 검열하고, 밤에는 자기가 검열한 것들을 욕망하지 않았나?
원문: 양유창의 창작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