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과 퇴근, 늘 반복되는 36살 직장인의 삶. 그 지루한 하루하루 속에서 소소하니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아들의 그림일기 입니다. 아니,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림일기가 설레게 한다기보다, 그림일기 한귀퉁이에 적힌 유치원 선생님의 예쁜 손글씨가 저를 설레게 한답니다.
상냥한 말투로 적혀있는, 그리고 말투보다 더 옹그라지는 예쁜 손글씨. 청첩장 봉투 겉면에 적힌 수신자 이름 외에는 좀처럼 손글씨를 보기 힘든 요즘 세상에 유치원 선생님의 예쁜 손글씨가 늙수그레한 아저씨의 맘을 설레게 한다고 말하면 넘 변태같은가요?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앞으로 이 소소한 설레임마저 사라진다고 합니다. 유치원의 모든 전달사항들을 이제는 손글씨가 아닌 스마트폰 어플을 통해 전달한다고 하네요. 마지막 남은 아날로그적 설렘마저 디지털화 되어버리는 이 각박한 세상이 원망스럽습니다. ㅜㅜ
이제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가 알아채지도 못하게 일상 속 많은 것들이 디지털화 되어버렸습니다. 꾹꾹 눌러쓰던 편지도 이젠 이메일로 대체된지 오래이고, 커피향에 빙그르 돌아가던 LP판은 이제 골동품 가게에나 가야 겨우 볼 수 있지요. 15년 전 동아리방에 갈 때마다 가장 먼저 뒤적이던 날적이는 이제 SNS 게시판으로 바뀌었겠지요? 이렇게 순식간에 디지털화 되어버린 세상에 우리는 자연스레 적응해 왔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그리고 소비자들이 디지털화 되어갈수록, 기존의 아날로그 제품을 판매하던 기업들도 디지털 세상에 살아님기 위해 많은 고민들을 하고 있답니다. 아날로그 시대를 풍미하던 많은 기업들 중에 상당수는 이미 디지털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쇠락하기도 했습니다. 즉석사진의 대표기업인 폴라로이드(Polaroid)도, 카메라 필름의 대표기업인 코닥(Kodaq)도, 예전 아날로그 시대의 전성기를 뒤로하고 쇠락하고 말았죠. 마치 공룡이 기후 변화에 적응 못하고 멸종한 것처럼요.
한편, 이렇게 쇠락하는 아날로그 기업들 가운데서도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고 발전해 나가는 기업들도 있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몰스킨(Moleskine)이 그 대표 기업 중 하나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몰스킨 수첩을 사용하시는 분도 많으실 거 같아요.
검은 가죽커버에 고정밴드로 상징되는 몰스킨은 이미 수십년 동안 전세계적으로 사랑 받아온 수첩이지요. 지금도 교보문고 문구 코너에 가면 가판대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여러분들도 한 번쯤 몰스킨 수첩을 뒤적여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피카소, 헤밍웨이 등 유명한 예술가들로부터 사랑받아왔을 뿐 아니라 몽블랑 만년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세련된 수첩으로 기업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사용되어 왔죠. 프랑스 파리의 오랜 가게를 1990년에 이탈리아의 사무용품 업체가 인수하여 몰스킨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소개한 이래 반 세기 넘게 가장 세련된 수첩 브랜드로 사랑받아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몰스킨도 디지털화되는 세상과 사람들의 취향을 거스를 수는 없었습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수첩보다는 스마트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에 입력하기도 하고 타블렛 펜으로 직접 손글씨 쓰듯 메모하는 모습을 쉽게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죠.
어쩌면 디지털화 는 세상에 가장 먼저 설 곳을 잃었어야 마땅할 아날로그의 대명사, 몰스킨. 몰스킨은 어떻게 디지털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디지털 세상에서 아날로그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몰스킨의 생존전략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생존전략 하나,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공생을 통해 기존 브랜드 포지셔닝의 확대
스마트폰과 수첩. 한쪽이 늘어나면 한쪽은 쇠락할 경쟁관계처럼 보이지만, 몰스킨은 이 경쟁관계를 협력 관계로 만들어내는데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몰스킨은 사실 스마트폰이 보편화되기 시작한 초기단계부터 적극적으로 디지털 기기와의 공생하는 방법을 찾아왔습니다. 잘 이해하기 어렵죠?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공생하는 법이라니.
하지만 우리 스스로를 잘 돌아보면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이 공생관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eBook 입니다. 책을 종이가 아닌 스마트폰으로 보는 eBook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3년 안에 출판업계가 모두 망할 것이라 예측했습니다. 아마존(Amazon)에서 휴대용 eBook 단말기인 킨들(Kindle)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더이상 무거운 책을 들고다닐 필요 없이 이 작은 노트 크기의 기계에 수천권의 책을 담아 다닐 수 있다는 사실에 열광했었죠.
하지만 eBook이 처음 나온지 10년이 지난 지금, 출판업계는 여전히 번성하고 있고 사람들은 무거운 종이책을 들고 다닙니다. 작년 전체 미국서적 시장에서 eBook이 차지하는 비중은 27%에 지나지 않으며 성장율도 2.4%로 오히려 종이책에 밀리는 상황입니다.
이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인간은 아날로그다” 라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우리는 책을 단순히 정보를 뽑아내기 위해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문장에 밑줄을 치고, 귀퉁이에 생각을 끄적이고, 책장에 꽂아 소유하며 아날로그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심지어 종이에서 나는 쿱쿱한 냄새마저도 ‘책을 본다’는 행위에 빠질수 없는 요소입니다. 디지털화된 eBook이 보다 많은 정보를 저장하고 검색하게 해줌으로써 사람을 보다 효율적이 되도록 도와줄 수 있지만, 여전히 인간은 촉감, 후각을 통해 아날로그적으로 책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eBook으로 가장 많이 판매되는 책의 장르가 잡지, 카툰 등이고 반면 종이책으로 판매되는 장르는 논픽션, 전문서적 등이라는 최근 결과를 보면, 종이책과 eBook이 독자의 필요에 따라 적절한 공생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나아가 eBook과 종이책을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사용하면서 소비자들은 이제 더 효율적인 독서를 하고 있는 듯합니다.
Evernote Smart Notebook by Moleskine이란 이름으로 출시된 이 제품은 몰스킨 종이 수첩에 적힌 글씨와 이미지를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으면 그 이미지를 디지털 노트파일로 변환에서 에버노트상에 저장하는 기능을 제공했습니다. 종이에 직접 글씨를 쓰는 느낌은 유지하면서 노트 내용을 디지털화하여 효과적으로 저장할 수 있는 기능. 바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공생의 대표적인 모습을 선보였습니다.
이와 같이 몰스킨은 종이에 직접 손으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소비자의 아날로그적인 경험을 그대로 지켜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디지털 기술을 통해 보다 효율적으로 저장하고 공유할 수 있게 디지털 기업과 협력하였습니다. 인간의 아날로그 본성은 그대로 지키면서 디지털적인 효율성을 제공하는 몰스킨의 전략. 이 전략을 통해 몰스킨은 “종이수첩”이라는 기존의 브랜드 포지셔닝을 “Creative work를 도와주는 모든 툴” 로 확대시킬 수 있었습니다.
“We want to serve the needs of the entire creative class” – Co-founder of Moleskine, Maria Sebregondi
생존전략 둘, 디지털을 통한 공유와 협력의 플랫폼으로 활용
몰스킨은 디지털로의 변화를 새로운 기회로 바라보았습니다. 디지털이 아날로그 종이수첩을 쇠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종이수첩 사업을 번성시킬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한 것이죠. 어떻게 그게 가능한걸 까요? 비밀은 바로 ‘디지털을 통한 공유와 협력’에 있었습니다.
몰스킨은 예전부터 매우 열성적인 팬(fan) 소비자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블로그나 인터넷 게시판에 자신의 몰스킨 수첩에 그린 그림을 올리며 실력을 뽐내곤 했죠. 자생적으로 생겨난 인터넷상의 몰스킨 커뮤니티에서는 몰스킨 수첩에 볼펜꽂이를 만드는 방법 등 몰스킨 수첩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나 자신의 경험담을 공유하는 글들이 많이 올라왔습니다.
디지털 시대 이전부터 몰스킨은 이러한 커뮤니티를 적극 활용하기 위해, 커뮤니티에 올라온 소비자들의 예쁘게 꾸며진 몰스킨 수첩 가운데 예술성이 높은 것들을 선발하는 경연대회를 하고 박물관에 전시하기도 했습니다.
몰스킨은 디지털이 소비자들의 공유와 협력의 갈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몰스킨은 자사의 홈페이지를 통해 몰스킨 수첩의 기본 틀이 되는 프레임 파일을 전격 공개했습니다. 소비자들은 이 프레임을 다운받으면 자유롭게 자신만의 몰스킨 수첩을 만들 수 있게된 것입니다.
그러자 소비자들은 몰스킨 수첩에 붙여 쓸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수첩 내지를 개발하여 홈페이지에 공유하기 시작했고, 수천 개의 새로운 몰스킨 수첩 내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소비자들은 수첩 내지를 출력해서 자신의 몰스킨 수첩에 끼워 넣으며 자신만의 몰스킨 수첩을 커스터마이즈(customize)했습니다. 몰스킨은 나아가 이 프레임을 웹상에서 손쉽게 편집할 수 있는 프로그램까지 공개하며 소비자들의 공유와 협력을 부추겼습니다.
소비자들에게 자신만의 몰스킨 수첩을 만들도록 허락한 몰스킨. 더 나아가 소비자들에게 자신의 몰스킨 수첩을 판매할 수 있는 장터를 개설합니다. 2011년에 개설된 Artist Marketplace라는 몰스킨의 웹페이지에서는 누구나 자신만의 몰스킨 수첩을 만들어 다른 소비자들에게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위 그림에서 보듯 정말 다양하고 수준높은 몰스킨 수첩들이 소비자들에 의해 직접 만들어지고, 이 온라인 장터를 통해 팔려나갔습니다. 귀여운 캐릭터 몰스킨에서 부터 아래 영상에서 소개되는 몰스킨 처럼 예술작품으로 불릴만한 제품에 이르기까지 “공유와 협력”의 플랫폼에서 수만가지의 몰스킨 수첩이 탄생되었답니다.
몰스킨이 디지털 제품을 적극적으로 출시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종이수첩의 매출은 여전히 전체 매출의 92%를 차지하며 몰스킨의 성장을 견인하고 있습니다.
생존전략 셋, 브랜드 파워를 이용하여 고수익 제품으로의 확장
디지털이냐 아날로그냐에 대한 고민에 앞서, 기업으로서 가장 우선되는 고민은 바로 수익성입니다. 디지털이라는 변화가 몰스킨에게 큰 고민이었지만, 이보다 더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한권에 15불 하는 수첩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였죠. 디지털 시대에 대한 고민과 병행하여 몰스킨은 보다 고수익의 제품으로의 사업확장을 해왔습니다.
몰스킨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자산은 바로 MOLESKINE이라는 브랜드 자체였습니다. 창의성, 세련됨, 예술성 등으로 연상되는 몰스킨의 오랜 브랜드 가치는 디지털이든 아날로그든 시대에 상관없이 유효한 강력한 자산이었습니다. 몰스킨은 이러한 브랜드 파워를 활용하여 수첩과 관련한 고수익 제품으로 제품 라인을 확대하는 전략을 펼쳤습니다.
처음에는 종이수첩과 아주 밀접한 관련제품부터 출시했습니다. 펜, 노트 커버, 지갑 등의 제품 출시는 몰스킨의 수익성을 개선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다 디지털 제품 출시에 발맞추어 몰스킨은 아이폰/아이패드 커버 등 보다 고수익의 디지털 관련 제품을 출시하며 수익성 개선에 큰 효과를 보게 됩니다.
디지털 기기에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입히고 싶어하는 소비자들의 니즈에 몰스킨의 브랜드 이미지는 아주 적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이러한 니즈에 대해 공감하실 것 같아요. 제 주변에도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 커버로 빈티지 느낌의 가죽소재 제품을 가지고 있는 걸 보면, 이러한 아날로그에 대한 니즈는 보편적인것 같습니다.
이렇게 디지털 시대는 고수익 제품으로 사업을 확장하던 몰스킨에게 큰 기회였습니다. 디지털 기기 악세서리 제품은 수익성도 높을 뿐 아니라 몰스킨의 아날로그적 감성에 대한 니즈가 높은 부분이었기에, 최근 몰스킨의 디지털 기기 악세서리 부분 매출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몰스킨은 내년 2016년까지 종이수첩 외 제품의 매출 비중을 현재 8%에서 15%까지 증가시킬 것이라고 합니다.
디지털 시대에 살아님기 위한 몰스킨의 생존전략. 여러분들은 이 전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 사실 몰스킨의 전략이 디지털 시대에 살아님기 위한 ‘생존전략’이라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반대로 소비자들의 아날로그적인 본성에 더욱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디지털이 우리를 보다 효율적으로 만들어준 것은 사실입니다. 보다 많이 기억하고 빠르게 검색할 수 있게 만들어줬죠. 하지만 디지털은 우리의 아날로그 감성을 전달하기에는 여전히 한계가 많아 보입니다. 메신저로 전달되는 문장 말미에 ‘ㅋ’가 몇 개 붙었느냐에 따라 숨은 의미가 달라진다고 하지만, 손글씨로 전해오는 글쓴이의 다양하고 미묘한 감정의 폭에 비하면 아직 디지털은 우리의 감성을 담기에 미미하죠.
디지털. 어쩌면 이는 아날로그에 반대되는 개념이라기보다, 인간의 아날로그 적인 감성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몰스킨이 품고 있는 인간의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디지털을 만나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질 수 있었던 것에서 우리는 디지털 시대의 생존전략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날로그 본연의 따뜻함을 지키는 것, 그리고 디지털을 통해 그 따뜻함을 공유하는것.
아날로그 기업에게 디지털 시대는 살아남아야 하는 빙하기가 아니라 더 많은 소비자들과 공유하고 협력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라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아들의 그림일기에 선생님의 예쁜 글씨가 되돌아올 날이 언젠가는 오겠죠?
원문: 세상을 풀어보는 두루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