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이 낙태를 속죄하고 용서를 구하는 여성과 시술 의사를 사면한다고 발표했다.
가톨릭에서 파문에 해당하는 중죄인 낙태에 대해 이런 결정을 내린 일은 한시적 사면이라 해도 파격이다. 기존의 교리를 바꾼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동안 낙태라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리면서 마음의 상처를 입은 많은 여성을 만났고, 이는 불행하게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실존적이고 도덕적인 비극이다.” 낙태가 여성 개인의 도덕적인 문제와 책임만은 아니라고 말해 준 것이다.
물론 가톨릭의 이 발표에 신랄한 비난이 따른다. 어느 작가의 말이다.
“원치 않는 임신에 적극 기여한 사회의 한 부류가 바로 사제들인데 누가 누구의 죄를 사해주는가. 교황이 큰 맘 먹고 한 턱 쏘면 구원되는가? 프란시스코 교황이 지금까지의 교황들보다 좀 나은 인간이란 사실을 인정하지만, 가톨릭이 벌이는 이 역겨운 코미디를 조소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 이성이란 걸 가진 인간들이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겠지.”
나는 교황의 저 말에 눈물 흘린 여성 신도들이 많았을 거라고 짐작해서 기뻤다. 생명을 죽였다는 죄책감과 더불어, 자신이 믿는 종교에서 중죄로 다스리는 행위를 했다는 죄책감까지 가지고 살았을 여성들에게, 교황의 조치는 위로와 치유가 되지 않았을까. 낙태에 대해 완고하게 범죄라 하는 교단 내 보수적인 세력들에게 이번 교황의 조치는 못마땅한 일일 테지만, 해당 여성들과 약자의 고통을 적극 끌어안으려는 세력에게는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줄 것이다.
이렇게 교회 안의 룰을 변화시키는 일에 굳이 세속의 잣대를 들이대서 역겹다고 조소하는 행위가 더 정의로운 일인지 모르겠다. 전부가 아니면 전무일 뿐인 주장들을 볼 때면 ‘진일보‘와 ‘진보‘라는 말을 떠올린다.
<송곳>의 드라마화를 두고
변화와 진보를 얘기하면서 그런 움직임이 보일 때 이를 격려하고 응원하기보다 근본을 들이대며 비판하는 경우들을 본다. 특히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노동조합이라는 단어가 소재나 소품이 아닌 주제와 주어로 등장하는 웹툰 <송곳>이 있다. 주인공이 노동조합 활동가와 노조를 처음 시작한 사람이다. 노동법이 나오고, 비정규직이 나오고, 해고 문제도 다룬다. 그런 만화가 일부 운동권만 자족하고 마는 걸로 끝나지 않고 한국 제일의 포털인 네이버에 연재되며 인기를 얻고 있다. 수십만 명이 동시에 이 만화를 보며 환호하고, 노동자로서 자신의 처지를 위로하고, 간혹 실제 직장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도 한다.
또 하나 기쁜 일은 <송곳>이 드라마로 제작되어 곧 TV에서 방영된다는 사실이다.
그 동안 방영된 드라마 중 노조를 언급해서 인상에 남은 장면이 드물게 몇 있다.
김선아와 차승원이 출연한 <시티홀>에서는 인주시장에 당선된 신미래가 공무원노조 사무실을 가장 먼저 찾아가 인사를 한다. 전임 시장한테는 없었던 파격행보로 소개되었다. 같은 작가가 쓴 드라마 <시크릿가든>에서는 길라임의 친구를 해고하려는 엄마한테 김주원이 노조에 이르겠다고 협박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 엄마가 나는 이겨도 노조는 못이겨.” 무려 현빈의 입으로 이런 대사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요즘 방영 중인 <어셈블리>에서는 주인공 진상필이 법정에서 해고의 고통을 말하며 “판사님은 우리한테 왜 사과하지 않느냐”고 울면서 항의하는 장면이 화제가 됐다. 짧은 대사와 장면 하나라도 노조를 드러내 줄 때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그런데 송곳은 우회하지 않고, 측면 돌파 하지 않고, 정면으로 말하고 정면으로 승부한다. 한 노동자가 노동조합 활동가로 성장하는 이야기이며, 을들이 겪는 일상에 대한 리얼한 보고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를 왜 제작하려고 하냐는 물음에, 감독이 그런 말을 했다. “저는 이걸 노조드라마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나와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지요. 그걸 굳이 노조드라마라고 색깔을 입혀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그렇게 설득하고 있고요.”
그러나, 웹툰의 시나리오 작업을 도운 인연으로 <송곳>이 드라마로 제작된다는 소식을 홍보 페이지에 썼을 때 제일 먼저 들어온 쪽지는 항의였다.
“어떻게 송곳 같은 드라마를 노조도 없는 방송사에서 제작할 수 있는 거냐.”
가끔 강의를 하러 가도 같은 질문이 나온다. “왜 하필 그 방송사냐.” 비슷한 이야기를 계속 듣다보니, 그럼 송곳은 어떤 방송사에서 방영하면 되었을까? 궁금해졌다.
네이버에 연재가 시작될 때는 “왜 하필 네이버냐“는 항의, JTBC 라는 종편 방송사에서 드라마로 만든다니 “왜 하필 종편이냐”, “왜 하필 노조도 없는 소유주의 방송사에서 하냐”는 항의. (근데 그 방송사는 노조가 있고, 소유자본도 더 이상 무노조 기업이 아니다.)
가장 많은 이용자가 보는 포털에서 수십만 명의 대중에게 이 웹툰이 보여진다는 사실, 케이블이 아닌 TV방송에서 수백만명 대중한테 이 드라마가 방영된다는 사실보다 노조 있는 방송사에서 제작되어야 한다는 원칙, 더 정의롭다고 평가받는 포털에서 연재해야 한다는 원칙이 더 중요한 것일까.
그들이 말하는 노조 있는 방송사는 이 드라마를 하겠다고 하지 않는다. 노조가 있는 방송사에서 방영하는 드라마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정의가 아니고, 원칙이 아니라고 비난하는 그 방송사만이 노조 드라마를 하겠다고 나선 사실이다.
세상은 진일보하며 진보해왔다
여성들이 비판자의 조소가 아니라 교황의 조치에 위로받듯, 을로 살아가는 대중들은 당신의 투철한 원칙이 아니라 노동자가 주연으로 나오는 드라마에서 자기 삶을 지킬 노동법을 배울 것이다.
실제 송곳을 그리면서 작가는 자본이나 보수진영한테 편향된 친노조 작품이라는 비난을 받을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정작 오히려 우리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꼬장꼬장한 원칙을 들이댄다. 송곳이 이럴 수 있나, 송곳인데 이러면 안 된다, 라는 말은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다. 노조 드라마 한 편이 무사하게 방영되어 대중과 만나는 것보다, 이 드라마 한 편에서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는 듯 압박하는 태도. 정의가 너무 고음들이어서 피로하고, 한 걸음의 진전, 어제보다 이만큼 더 나가는 것의 가치에 대해 인색한 풍토가 아쉽다.
노조 드라마 한 편 제작하는데 다른 드라마는 겪지 않아도 되는 피곤한 상황을 마주해야 한다면 앞으로 누가 이런 드라마를 제작하려 할까. 창작자에게도 제작자에게도 좋지 않은 신호가 된다.
세상은 진일보 진일보 하면서 진보해 왔다. 진보는 결과가 아닌 과정이라 했고, 단어조차 나아가는 걸음을 뜻한다. 한 걸음 조심스레 떼며 진일보 하는 일들에 대해 좀 더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봐 줄 수는 없을까. 궁극의 도달점만을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걸음의 과정에 들인 노력과 고민은 가치 없이 휘발되어 버린다.
그러니 제발 쉽게 재단하고 비난하는 우를 범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진보에는 죄를 사해줄 교황도, 하느님도 없으니.
원문: Women in Writing
덧붙여, 보론.
가톨릭의 낙태사면에 대해 쓴 글에 어떤 분이 편 반론을 보았다. 요지는 누가 누구를 구원하는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여성의 낙태는 선택이고 권리여야 한다는, 그래서 낙태를 죄로 벌하는 가톨릭의 행위에 대한 비판은 당연히 계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맞는 말이다. 나는 위 의견에 반대하지 않는다. 반론은 아니고 보론 정도라 생각하고 말하자면 두 가지다.
첫째, 시와 때에 관하여.
어떤 말을 하기에 적절한 때가 있다. 교황이 제왕적인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종교집단에서 교리에 반하는 결정을(한시적이라는 전제가 있다 해도) 내리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거다. 어떤 조직이든 기존의 질서를 흔드는 일은 어렵다. 만약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방향이라면, 지금 그 안에서 변화를 위해 싸우는 사람을 응원해주는 일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내부의 보수(혹은 근본)주의자들한테 비난받고, 외부의 진보(혹은 급진) 주의자들한테 비난받아, 결국 조직 안에서 고립되어 싸울 동력을 잃게 된다. 반면 안에서 수세에 몰리더라도 밖에서 지지하고 함께 싸워준다면 내부는 자극을 받고, 다음 단계로까지 가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지금의 싸움에서 지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행동을 하고 있는 바로 그 때, 나는 비난보다는 응원을 바란다. “당신들의 용기있는 행동을 지지합니다. 낙태를 죄로 여기고 고통받았을 가톨릭 안의 많은 여성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낙태가 죄가 아니며, 여성의 책임도 아님을 확인하며, 앞으로 가톨릭이 여성의 권리와 함께 하는 종교로 변화하기를 희망합니다.” 이렇게 말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적어도 이때에는.
말은 그 때여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 늘 있으므로 전략으로라도 그런 말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도 높은 비난은 가톨릭에서 여성의 낙태를 벌하는 행위를 하거나,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경우에 엄청 많이, 세게 하면 된다.
노동조합의 활동에서도 많이 겪는 일이다.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이로운 무언가를 하나 따냈을때, 그래봐야 너네는 착취의 한 축일 뿐 쇼하지 마라! 이렇게 비난하기보다, 잘했다, 앞으로 더 잘해라, 고 말해줄 때 안에서도 개혁 세력이 힘을 받는다. 그런 의미의 비판이었다.
둘째, 태도에 관하여.
<송곳>에 나오는 대사가 있다. “사람들은 옳은 사람 말 안 들어요. 좋은 사람 말을 듣지”
어떤 말을 할 때 태도란 많이 중요하다. 비판과 비난, 조롱과 혐오 모두 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위 사례에서 가톨릭 신도인 여성이 교황의 발표가 있고 나서 종교 밖의 사람들이 하는 비난을 들었을 때, (대부분 여성운동 진영이거나 진보라고 분류되는 사람들일) 어떤 생각을 할까. 그들이 내 편이라고 생각할까.
우리는 가톨릭 신도인 여성이 아니라 모든 여성의 권리를 위해 낙태권을 말한다. 옳은 주장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지키려는 여성들은 옳은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 좋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니까. 비난의 말을 던지는 태도에서 상대는 존중을 느끼지 못한다.
한시적 사면을 말하는 교황은 옳지 않다 해도 좋은 사람이지만, 여성의 권리를 말하는 사람은 옳다 해도 좋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좋은 사람이 옳은 말을 하는 이상적인 장면, 내가 바라는 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