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새정치민주연합 당원도 아닐 뿐더러 그 정당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정당의 당권재민 혁신위원회의 혁신안 중 여성의무공천 30% 안에 대해선 찬성이다.
이 안에 대해 반대하는 분들 중에는 “여성 의원이 늘어나면 여권이 신장되고 양성평등에 도움이 되느냐”라고 묻는 분도 있고, 여성이 애초에 정치에 참여를 하지 않아서 공천 비율이 낮은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도 계시더라. 심지어 정치외교학을 공부하면서 새정치민주연합 대학생위원회 활동 및 다양한 정치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한 20대 남성분은 “선거 전에 가슴에 실리콘 넣고 당선되면 빼. 밑에 확인할라고 하면 인권침해로 여성부에 신고해.”라는 댓글을 달기도 했고. 본인은 농담으로 한 이야기일지는 모르겠지만, 농담이라 쳐도 여성을 그 외양의 특징으로만 요약해 대상화하고 비아냥거리는 이런 농담은 저열하다.
달걀이 먼저다
“여성이 애초에 정치에 참여를 하지 않아서 공천 비율이 낮은 것일 뿐”이란 주장을 하시는 분을 보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왜 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 중 대부분은 남성중심적, 보다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남근주의적일까? 접대 여성이 동석하는 룸싸롱 정치 및 향응 접대, 향우회나 산악회, 조기축구회 등 남성중심의 네트워크가 작동하는 모임을 활용한 사전선거운동, 보스를 정점에 놓고 수직계열화된 계파 문화, 툭하면 터져나오는 남성 국회의원들의 성추문.
나는 애초에 정치공간이 남성들에게만 허락된 공간이었기 때문에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그 바닥에 깔리게 되었고, 그것이 더더욱 여성들의 정치 참여 혹은 발언을 막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해본다. 애초에 정치공간이 남녀성비가 비슷한 공간이었고 그래서 함부로 여성을 대상화할 수 없는 곳이었다면 어땠을까. 정치가 지금보다 더 나아졌을 거라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보단 훨씬 덜 남성 중심적인 문화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여성이 정치에 참여를 하지 않아서” 문제인 게 아니라, 애초에 “여성 정치인이 설 자리가 협소했기에” 문제였던 거란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수권을 준비하는 제1야당, 상대적 약자 편에 서기를 천명한다는 서민정당에서 여성 의무 공천 30%를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과하지 않다. 정치문화를 개선해 나가기 위해서도 필요하거니와, 구현될 기미가 안 보이는 양성평등 실현을 위해서도 그 정도의 몫을 열어두는 게 필요하지 않은가.
실리적인 부분에서도 이만큼의 쉐어는 나쁠 것이 없다. 언론보도를 통해서도 밝혀진 것이지만, 지난 6일 공개된 행정자치부 주민등록 인구통계에서 처음으로 양성 비율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여성 평균 수명이 남성 평균 수명보다 더 긴 데다가, 점차 출생성비 불균형이 완화되면서 여성 인구수가 남성 인구수를 추월한 것이다. 이는 그리 머지 않은 장래에 여성 유권자들이 남성 유권자보다 더 많아질 것을 의미한다. 유권자 수는 더 많은데 그들의 이익을 대변해 줄 국회의원의 수가 적다면, 어떤 여성 유권자가 기꺼운 마음으로 한 표를 행사하겠는가?
새정치민주연합의 ‘여성’ 전통
마지막으로, 이는 신민당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계승하는 일이기도 하다.
일찍이 김대중 대통령께선 대문 앞에 자신의 명패만 단 것이 아니라 이희호 여사의 명패도 함께 달아 두 사람이 가부장제적인 질서 안에 포섭된 부부가 아니라 명백한 정치적 동지라는 점을 분명히 하셨다. 이희호 여사 없는 김대중 대통령은 상상하기 어려우며, 이희호 여사 없는 한국 여성운동도 상상할 수 없다. 김대중 대통령은 1983년 미국 망명 시절 샌프란시스코 강연에선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아내가 없었더라면 내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내 아내 덕분이고, 나는 이희호의 남편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인재근 의원 또한 김근태 전 의장 생전에 이미 “김근태의 바깥사람”으로 불리우며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최선봉에 서서 활동한 액티비스트였다. 김근태 의장 사후에 인재근 의원이 출마 선언을 했을 때 그 흔한 “지역구 물려받기냐”라는 식의 비아냥이 나오지 않았던 것은, 인재근 의원의 헌신과 노력, 정치적 성취에 대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족법 개정과 호주제 폐지, 동성동본 금혼령 폐지, 여성 인권 운동에 앞장섰던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인 이태영 변호사 또한 신민당의 당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정대철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위대한 여성운동가였으며, 민주화 운동가였고, 인권운동가였다. 이승만, 박정희 독재 정권에 저항하다가 구속된 사람들의 무료 변호와 무료 변론을 서주었고,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당시 증인으로 김대중 대통령을 변호했던 것 역시 이태영 변호사였다.
윤보선 대통령의 영부인이었던 공덕귀 여사는 어떤가? 공덕귀 여사는 그 누구보다 앞장 서서 반유신투쟁, 노동운동, 여성운동에 투신했다. 74년 민주회복국민선언, 76년 명동 3.1 민주구국선언, 77년 방림방적체불임금대책위원회, 78년 동일방직사건긴급대책위원회, 민주주의 국민연합, 79년 YH대책위원회까지. 여기에 서슬 퍼런 유신시절 양심수들과 그 가족들을 지원하며 박정희 정권 아래서의 모든 정치, 사법 재판에 대해 무효화 선언문을 낭독, 발표했으며, 남편 윤보선 대통령이 훗날 전두환 정권에 회유되었을 때 누구보다 남편을 뜯어말리며 남편과 정치적 길을 달리 하는 강수를 두었다. 87년 6.10 운동에 힘을 보태기도 했고.
새정치민주연합은 윤보선, 장면, 김대중, 김근태, 노무현의 당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다. 공덕귀, 이희호, 이태영, 인재근의 당이기도 했다. 군인들의 정치, 지역 토호들과 보스들의 계파 정치 등 지금보다 더 남성들 위주로만 굴러가던 당시 정치 공간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끝없이 투쟁했던 이들의 역사가 오늘날의 새정치민주연합을 만드는 게 큰 기여를 했단 사실을 감히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자, 다시 묻자. 당의 역사에 유구히 흐르는 여성주의 운동가들의 헌신과 투쟁의 뜻을 이어받아 한국정치공간에서 여성 정치인이 설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30% 의무공천을 하는 게, 그렇게 과한가?
원문: I AM TINTIN
덧붙여.
한 페친이 알려주신 것. 중앙선관위 발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율 분석’을 볼작시면 50세 미만에서 20-24세 구간을 제외하면 수도권/광역시/시도 전 연령대에서 여성 투표율이 더 높단다.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모여 사는 수도권은 그 편차가 더 크다고. 출처는 이쪽으로.
그러니까 애초에 “여성이 정치참여를 남성보다 덜 한다”라는 전제부터가 도시전설 같은 거였던 셈이다. 투표율도 남성보다 더 높고 시민정책 참여에도 활발하게 움직이는 이들이 왜 정계진출 비율만 더 낮겠는가. 유독 여성의 정계진출 비율이 낮은 구조적 이유가 있었는지 먼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