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에게 참 잘할 것 같은 남자가 정작 자기 여자에겐 심각한 ‘나쁜 남자’일 경우가 있고, 딱 현모양처 감인데 여러 남자한테 칼자국 팍팍 내고 다니는 여자도 의외로 흔하지. 참 이상한 건 그런 나쁜 남자와 나쁜 여자일수록 의외로 그들에게 목을 매는 여자와 남자가 있더라는 거지.
“네가 어디가 모자라서 그런 여자(또는 남자)한테, 응?”
이런 훈계 한 번쯤은 다 해 보지 않았냐? 그래도 그 앞에서 흑흑거리거나 술 퍼먹으면서 “나는 걔 아니면 안 돼” 중얼거리는 멍청한(?), 내지 눈에 본드 붙인 가련한 군상도 봤을 게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유독 혀가 긴 이 천재 물리학자는 바로 이 ‘나쁜 남자’ 가운데 상석을 양보하지 않을 사람이야.
유치원에서부터 초등학생에 이르는 위인전에서 반드시 빠지지 않는 ‘위인’이지만 위인전에서는 그의 ‘나쁜 남자’ 기질이 물론 쏙 빠져 있지. 상대성 원리를 세상에 내놓은 걸출한 물리학자이자 핵폭탄 연구를 미국 대통령에게 권유했지만 막상 개발된 핵폭탄이 위력을 보고는 기겁을 하고 반핵운동에 뛰어드는 사명감 깊은 과학자로 묘사될 뿐이지. 하지만 ‘이 사람 매우 나빠요’였다, 특히 그의 첫 부인 밀레바에게는.
밀레바는 세르비아 출신이고 아인슈타인은 유대계 독일인이지. 아인슈타인은 장애를 걱정할 정도로 성장이 늦은 아이였지만 커 가면서 명석한 두뇌를 과시하며 스위스 공과대학으로 입학했고 밀레바는 세르비아의 자수성가한 관리의 딸로서 비록 다리를 저는 장애는 있었지만 지능면에서는 누구에게도 떨어지지 않을 재원으로 대학에 입학했지. 그 해 유일한 여학생이었어. 둘은 캠퍼스에서 만났지. 궁합도 안 본다는 네 살 차이. 단 밀레바가 연상.
아인슈타인은 늙어서의 그 원숭이스러운 얼굴과는 달리 젊어서는 꽤 뺀질뺀질한 미남이었다는구나. 거기에 예술적인 재주까지 있어서 바이올린 한 번 켜면 좌중을 홀릴 줄 알았고 연애편지도 기가 막히게 써서 뭇 여인들을 설레게 했다고 해.
기발한 천재와 노력형 천재의 만남. 밀레바는 아인슈타인의 독특한 아이디어에 감탄했고, 수학에 좀 문제가 있었다는 아인슈타인은 수학에 발군이던 밀레바의 도움을 받지. 둘은 금세 호감을 느끼고 사귀는데 처음으로 보내는 연애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은 글쎄 네 살씩이나 누나인 밀레바에게 ‘나의 귀여운 병아리’라고 부르는 맹랑함을 과시한다.
“나처럼 강인하고 또 부모로부터 독립적인 또 한 명의 사람과 만나게 된 것이 얼마나 기쁜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만나게 된 것이 얼마나 기쁜지 당신은 모를 거요. 당신을 생각하지 않고는 이 유감스런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없소.”
그런데 ‘병아리’도 이 당돌한 남자가 싫지 않았던 게 문제.
“당신이 넉 장이나 되는 편지를 써 보내주신 희생에 감사드리고 또한 지난번 함께 등산하며 저를 그렇게도 즐겁게 해 주신 데 조금이라도 보답하려는 심정으로 즉시 답장을 띄우고 싶었지만, 당신은 제가 지루해질 때까지는 답장을 하면 안 된다고 지시하셨지요. 그리고 저는 매우 순종형이랍니다.”
이러고 자빠졌으니 뭐… 잉걸불을 보듯 뻔한 거지. 양가 모두 결혼에는 반대였어. 특히 아인슈타인 쪽이 심했지.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결혼이 곧 자식의 불행일 거라며 격렬히 반대했어. 나이도 많지 다리도 절지 그리고 여자가 똑똑해서 뭐에 쓰냐? 책이랑 결혼할래? 그리고 세르비아라니 안 돼! 이거였지. 허 참, 자기들은 유대계면서. 심술궂은 한국 시어머니 떠오르지 않냐. 쥐뿔같은 가문 내세우면서 상대 집 가문 따지는.
하지만 둘은 결혼도 하기 전에 사고를 치지. 딸을 낳은 거야. 그런데 이 딸이 어떻게 됐는지는 지금도 설이 분분해. 혼전 자식인지라 어디에 입양시켰다는 설, 그리고 병에 걸려 죽었다는 설.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했지만, 왕년의 노력형 천재 밀레바의 과학자로서의 인생은 완연히 끝나 버리지. 오로지 아인슈타인의 아내이자 조수 역할만 수행했을 뿐이야.
사실 밀레바는 아인슈타인의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평이야. 아까 말했듯 수학은 아인슈타인의 취약지구였는데 이걸 보완해 준 게 밀레바였거든.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이걸 구렁이 담 넘지.
상대성원리를 발표하고 전 세계에서 각광받는 물리학자가 되면서 밀레바는 불안해진다. 아인슈타인의 바람기가 그야말로 순풍에 돛을 달았기 때문이지. 한 번 대학 때 사귀던 여자가 연락해 오자,
“나는 지금도 아무런 욕심이 없어요. 단지 하나 있다면 그대를 보는 것이랄까.”
요따위 편지를 써서 보내 꼬드기다가 밀레바에게 걸려서 된통 당한 건 그 일례일 뿐이었지. 밀레바는 그럴수록 아인슈타인에게 매달렸지만 또 그럴수록 아인슈타인은 그녀로부터 멀어져 갔어. 후일 두 번째 아내가 되는 이종사촌 누나(이 인간도 참 연상 취향)이자 애인(이게 무슨 개족보냐고? 유럽에선 개족보 아냐)이 이혼을 종용했을 때 아인슈타인의 말은 매우 걸작이다.
“거 와이프라는 거는 해고하기 힘든 직원 같다니까.”
가엾은 밀레바에게 한 번 이혼 얘기를 꺼내 봤을 때 까무러치는 걸 본 아인슈타인은 일단 이혼은 접은 대신 희한한 요구 조건을 내밀어. 두고두고 ‘나쁜 남자’의 전범으로 남을 요구사항이지.
“내 옷과 빨랫거리를 잘 관리하고 세 끼 식사를 제시간에 내 방으로 가져올 것. 내 침실과 서재를 깨끗하게 정돈하고, 특히 내 책상은 나 말고는 손 못 댄다. 사회적으로 필수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나와의 모든 개인적인 관계를 포기할 것. 구체적인 예를 들어, 집에서 당신과 함께 앉아 있거나 당신과 함께 외출하거나 여행을 하는 일은 꿈도 꾸지 말 것. 나에게서 어떠한 친밀한 관계도 기대하지 말며, 나를 어떤 식으로든 비난하지 마시오. 내가 요구할 경우 즉각 침묵하시오. 내가 요구할 경우 일체의 항의 없이 즉시 내 침실이나 서재에서 나가시오. 우리 자녀들의 앞에서 나를 깎아내리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마시오.”
뭐, 이쯤 되면 존경스러워질라 그래. 나는 저 말을 꺼내다가는 첫 문장이 채 끝나기 전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밀레바는 세상에 이 요구 조건을 수락하면서까지 아인슈타인 곁에 머무르기를 원해. 또 한 번 가엾은 밀레바.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후덕하고 음식 잘하고 남자 잘 모시는 이종사촌 누나한테 흠뻑 빠져 있었고 가차 없는 이혼을 요구하지. 위자료로는 “노벨상 받으면 상금 몽땅 줄게!”였고.
이혼한 뒤 아인슈타인은 밀레바와 두 아들을 거의 돌보지 않아. 둘째가 정신병이 있어서 엄마 목을 조르는 소동을 벌이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밀레바가 작심을 하고 도움을 청했을 때도 아인슈타인은 먼 산만 바라봤다지.
아인슈타인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노력형 천재 밀레바는 과외 선생 일로 돈을 벌며 두 아들을 부양하다가, 특히 정신병원의 둘째 아들에게 몸과 마음을 쏟아부으면서 쓸쓸히 살다가 죽었어. 아인슈타인만 아니었으면 마리 스클로도프스카, 흔히 아는 퀴리 부인을 능가할지도 몰랐을 재원이었는데 말이지. 인류는 아인슈타인을 얻었지만 밀레바 마리치를 잃었지.
그래도 밀레바는 아인슈타인에 대한 마음을 놓지는 못했다고 하네. 아마도 이런 편지를 쓸 때의 느낌을 평생 간직하고 살았을지도 모르지.
“얼마 전 스위스에 머물 때만 해도 우리 둘은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었거든. 음, 그런데도 난 앨버트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어. 사랑에 미쳐버릴까 두려워. 그도 나를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 나니 내 사랑이 걷잡을 수 없이 깊어지는 느낌이야. ”
불쌍한 밀레바, 나쁜 놈 아인슈타인.
원문: 산하의 오역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