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자동차의 판매량이 예년에 비해 대폭 늘었다. 고등학생 시절에만 해도 경자동차에 대한 비하성 농담이 오고 가던 시절이 있었지만 요즘은 도로를 달리다 보면 하루에 최소 30~50대 이상의 경자동차들을 보게 된다. 1991년부터 시작되어 이제 겨우 4반 세기가 채 되지 않은 짧은 역사를 지니고 있는 한국의 경자동차이지만, 그래서 더더욱 격세지감을 느끼며 산다능.
대한민국의 경자동차 역사는 전두환 정권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3년, 상공부(현재의 산업통상자원부. 지난 30년 간 상공부에서 산업자원부, 통상산업부, 다시 산업자원부, 그리고 산업통상자원부로 무려 5번이나 그 명칭이 바뀌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부처의 명칭이 바뀌는 삽질에 대해선 추후 따로 글을 올려보도록 하겠다)에서 에너지 절감이 절실하다는 명목하에 “국민차 보급 추진 계획”이라는 걸 세운다.
그런데 이 국민차 보급 추진 계획의 “국민차”라는 개념을 설명하려면, 먼저 옆 나라 일본의 경자동차 역사를 잠시 짚어봐야 한다. 왜냐하면 1980년대 군부독재정권이 채용한 “국민차”라는 개념 자체가 전후 일본에서 탄생한 개념을 받아드린 것이고, 80년대의 위정자들은 1950년대에 펼쳐진 일본의 국민차 도입 사업의 상당 부분을 벤치마킹했기 때문이다. (국민차라는 개념 자체를 만든 건 독일의 국가사회주의정당, 즉 나치스가 최초지만.)
일단, 일본의 국민차 이야기
일본의 경자동차 역시는 1949년부터 시작한다. 태평양전쟁 패망 이후 탄생한 경자동차는 일본의 전후 경제성장에 원동력이 될 수 있는 신규 분야로서 그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경자동차 산업에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린 것은 1955년의 일로, 통산산업성(현재의 경제산업성)의 중공업국 자동차과의 담당자였던 카와하라 노보루(川原晃)가 제안한 국민차육성요강(国民車育成要綱)이 세간에 발표되면서부터이다.
패망 이후 1949년까지 일본의 자동차 산업은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다. 가솔린 등의 연료는 모두 미군정의 철저한 통제 하에 배급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일본의 산업이 다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지 않겠다는 미국 정부의 정책이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38도선 이북에 서식하는 김모씨의 할애비 덕에 이 규제가 풀리게 되지만) 토요타, 히노, 이스즈, 마츠다, 닛산 등의 자동차 메이커들은 제대로 된 4륜차를 생산할 수 있는 여력이 있어도 미군정의 규제 때문에 차를 만들어낼 수 없었고, 대신에 혼다를 비롯한 원동기 메이커들에 의한 원동기부착 자전거나 소형의 바이크들이 크게 유행했다.
후에 스카이라인이라는 명차를 생산하게 되는 프린스 자동차(1966년에 닛산에 합병, 2차대전 당시에는 타치카와 비행기 제작소로, 나카지마 중공업의 전투기 및 폭격기 엔진 개발에 참여했었다)의 경우에는 아예 축전지를 이용한 전기자동차를 생산했었다.
1949년, 일본 정부는 미군정하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향후 일본 산업을 재건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산업 중에 하나로 “자동차 산업”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미군정의 “빡센” 규제를 완화할 수는 없었으며, 따라서 소형의 엔진과 작은 차체, 그리고 높은 경제성을 갖춘 초소형의 자동차를 개발, 국민들이 편하고 손쉽게 자동차를 접하고 사용하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동차 산업이 발전하게 되는 구도의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이 계획은 결과적으로 일본의 소형차 기술력을 독보적인 위치로 끌어올리는 견인마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1955년의 국민차육성요강은, 국가가 주도하여 경자동차의 규격을 정했다는 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사실 1949년 7월에 발표된 “운수성(運輸省: 2001년까지 존재하다가 현재는 국토교통성에 편입)령 제36호 차량규제 제3조2항의 자동차를 분류하는 기준” 부분을 각각 “경자동차, 소형자동차, 보통자동차 및 특수자동차”의 4개 항으로 개정하면서 처음으로 “경자동차”라는 단어가 탄생하게 되지만, 1955년까지 무려 7번이나 규격이 바뀌는, 그야말로 “중구난방”의 시대가 이어진다. 배기량이나 엔진의 크기조차 통일되어있지 않았고(1949년 당시에는 4행정 엔진은 150cc이하, 2행정 엔진은 100cc이하라는 기준으로 시작하였다), 바퀴 수에 대한 제한도 없었다. 당근, 이 규격에 따라 경자동차를 내놓은 메이커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
1950년, 일본운수성은 초기 규격에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판단, 이후 6번에 걸쳐 규격의 조정에 들어가게 된다. 이 시기에 상당히 많은, 그러나 경자동차인지 3륜 오토바이인지 아니면 오토바이 엔진을 응용한 별개의 탈것인지 분류하기 애매모호한 차량들이 수두룩하게 등장한다. 대표적으로는 다이하츠 미제트, 호프 호프스타 등의 3륜 트럭들이 있다. 마츠다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3륜 트럭을 생산했었고, 미츠비시도 초반에는 3륜 트럭을 생산했었다. 특히, 마츠다의 3륜트럭은 1970년대에 국내에서도 라이센스 생산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뭔지 궁금하신 분들은, 지브리의 명작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에서 사츠키와 메이가 아버지와 함께 시골집으로 이사할 때 타고 온 3륜 트럭을 떠올려보시라. 그게 1950년대 중반 당시 일본에서 가장 흔해빠진 경자동차들이었다.
1955년, 스즈키자동차공업(현 스즈키)가 스즈라이트를 발표한다. 스즈라이트는 일본 정부의 “국민차육성요강”에 명시되어 있던 4륜 경자동차의 규격(360cc의 4행정 엔진에, 전장 3미터, 전폭 1.3미터, 전고 2미터의 차체규격. 정확히는 1954년 9월에 발령된 新・道路交通取締法에서 그 규격이 정해졌다 )에 가장 부합하는 모델이었는데, 문제는 가격이 너무 비쌌다. (출시 당시 기본 가격이 무려 42만엔이었다. 당시 일본의 서민들의 평균 월수입은 4-5천엔 정도. 1955년 당시 소형차의 가격이 60만엔 정도 했고, 중형차는 100만엔을 넘었으니, 경자동차인데 42만엔은 서민들에게는 넘사벽의 가격이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일본의 도로에는 소형 바이크나 바이크를 개조한 3륜 트럭들이 대부분이었고, 게다가 가격 또한 비싸 봤자 20만엔 대 중반이었기에, 스즈라이트의 판매는 저조했다. 또한 스즈라이트는 정부 규격에 맞추는 데 급급했기 때문에, 그 자체의 완성도가 그리 높지 않았으며, 성능도 좋지 않았고 편의성도 높지 않았다.
일본 경자동차 역사에 “혁명”이 일어난 것은 1958년, 후지중공업(현 스바루, 구 나카지마 비행기제작소)의 스바루360이 탄생하면서부터다. 스즈키의 스즈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스바루360 역시 일본 정부의 “국민차육성요강”에서 정한 기준에 맞추어 제작된 차량이었는데, 스즈라이트와는 달리 원래부터 350cc 급 엔진의 탑재를 염두에 두고 설계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이것이 성공요인이 되었다.
또한 정부 규격이 오락가락 하는 상황에서 탄생했던 대부분의 경자동차들이 2인승에, 엔진 성능도 그저그런 스펙들이 많아서, 대부분의 경자동차들이 최고 속도 60킬로미터를 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던 데 비하여, 스바루 360은 처음부터 “성인 4명이 탑승할 수 있고, 안전성 확보를 위하여 공차중량이 350킬로그램 이상이 되며, 350cc급에서 15마력을 출력할 수 있으며, 최고속도가 80킬로미터 이상의 성능을 낼 수 있는, 공랭식의 자동차”라는 프로젝트로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개발 당시에 후지중공업의 막대한 자본과, 일본 정부의 은근한 후광을 받으면서 탄생하였다. 가격은, 40만엔을 넘지 않는 선에서 책정이 되었으며, 여전히 서민들에게는 비싼 가격이었지만 그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다. 이후 일본은 경자동차 전성시대가 도래하게 되는데, 이후 1976년(배기량이 550cc로 증가)과 1990년(배기량이 660cc로 증가, 그리고 차체 사이즈가 전장 3.3미터, 전폭 1.4미터, 전고 2미터), 그리고 1998년(전장 3.4미터, 전폭 1.48미터, 전고 2미터)에 각각 경자동차 기준이 변경되면서, 오늘에 이른다.
드디어… 한국 경차의 역사
상공부의 국민차 보급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했던 기업은 현대, 기아, 그리고 대우였는데, 상공부가 주도한 국민차 보급 계획은 일본의 경자동차 산업을 그 롤 모델로 삼고 시작을 했다. 상공부의 경자동차 기준은 그 규격을 일본의 1976년 개정판을 거의 그대로 가지고 왔는데, 그 기준은 “4명의 성인이 탑승할 수 있고, 공차중량이 700킬로그램을 넘지 않으며, 차체 사이즈는 전장 3.5미터를 넘지 않고, 전폭 1.5미터를 넘지 않으며, 전고 1.4미터를 넘지 않는 규격에, 출시 가격은 200만원 대로, 서민들이 부담 없이 구입이 가능한 자동차”라는 것이었다.
이 같은 규격은 전두환 군부정권이 “서민들이 자동차를 더 많이 타게 되면 자연스럽게 자동차 시장이 더욱 활발해지고, 나아가서는 자동차 산업이 더욱 발전하게 될 것이다”라는 가이드라인을 구상하면서부터인데, 어찌 보면 프로야구 도입과 함께, 전두환 정권의 유일한 업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규격 자체에 대해서는 3사 모두 이견 없이 받아드렸지만, 문제는 배기량이었다. 당시 상공부는 특별한 배기량 규격을 제시하지는 않았으나, 일본의 550cc를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의견이 강한 반면, 3사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현대와 기아는 산악지형이 많다는 이유로 배기량 기준을 1,000cc로 하자는 주장을 반복했으나, 이는 일본 역시 산악지형이 상당히 많은데 550cc라는 근거 덕에 부결되었다.
반면 대우의 경우, 대우자동차가 아닌 대우중공업에서 국민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당시 GM산하에 있던 스즈키의 경자동차인 3세대 알토를 도입하는 방향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대우 역시 정부의 550cc안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스즈키가 동남아시아 및 중동, 아프리카, 남미 시장 등에 수출하는 차량에는 자국의 550cc엔진이 아닌, 796cc엔진을 탑재하여 판매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 이를 들여와 3세대 스즈키 알토의 차체에 탑재하면서 티코를 완성시킨다.
현대와 기아에게도 사정은 있었다. 현대는 당시 포니의 프레임을 그대로 응용하면서, 미츠비시의 3기통 엔진인 3G8엔진을 베이스로 한 1,000cc엔진의 개발을 하고 있었다. 현대는 포니의 섀시를 사용하여 엑셀보다 한단계 낮은 단계의 차량개발을 하고 있던 중, 상공부의 국민차 프로젝트가 발동하면서 이에 편승해보려는 시도를 한 셈. 이 프로젝트는 대우가 국민차 선정업체가 되면서 잠시 접혔다가, 800cc의 엔진으로 다시 부활한다.
기아의 경우, 1987년에 이미 포드 페스티바를 베이스로 프라이드를 출시한 상태였다. 1세대 프라이드는 각각 1,100cc와 1,300cc의 엔진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기아 내부에서는 1,100cc의 엔진에 손을 대 1,000cc로 낮추고, 프라이드의 섀시를 그대로 이용하는 프로젝트가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현대와 기아는 모두 이미 존재하는 플랫폼을 사용하여 소형차와 경자동차 시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
그러나 기아의 경자동차 프로젝트 또한 대우중공업이 국민차 프로젝트 선정기업이 되면서 접히게 되고, 현대자동차에 합병된 이후 아토스의 형제차(비스토)로 경자동차 시장에 합류하게 된다.
대우중공업이 티코를 처음 선보인 1990년말 당시에도, 상공부의 국민차 규격에 엔진 배기량에 대한 적정 엔진 배기량 규격은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는데, 현대와 기아가 정부의 550cc 도입안에 대해 반대를 계속하고 있던 상황에서 대우중공업이 프로토타입을 완성시키고, 상공부를 비롯, 정부에 상당히 로비활동을 벌이면서 800cc이하라는 적정 엔진 규격이 탄생하게 된다.
1991년, 대한민국 정부는 대우중공업을 “국민차 프로젝트”의 유일한 선정기업으로 발표한다. 또한 대우중공업 역시 산하에 “대우국민차”라는 브랜드를 구성하고, 본격적으로 생산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문제도 많았다. 엔진뿐만 아니라 차체를 전량 “OEM 조립”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당초 정부에서 책정한 가격인 200만원 대를 도저히 맞출 수 없어, 초기 예상 가격은 400만원대에 달했다. 스즈키에 대하여 발생하는 적자를 메꿀 수 없었기 때문에 대우는 과감하다기보다는 무모한 원가절감 시도를 하게 되고, 가격은 300만원대로 떨어지게 되어 결과적으로 적자 폭을 메꿀 수는 있었지만 티코의 안전성이 크게 감소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문제가 많았다
3세대 스즈키 알토는 이미 카뷰레터 방식의 엔진을 버리고 전자제어 방식의 MPI엔진을 탑재하고 있었다. 모델에 따라 550cc엔진과 550cc 터보 엔진을 고를 수 있었고, 터보 엔진 탑재 모델의 경우에는 4륜구동 모델도 존재했다. 일부 모델의 경우, 스즈키의 모터스포츠 부문에 의해 개수가 이루어져, 전설의 “스즈키 알토 워크스(Suzuki Alto Works)”라는 스페셜티 모델까지 존재했다.
반면에 대우는 이런 사치를 누릴 수 없었다. 원가절감이 최우선 목표였다. 이미 주력 모델인 르망과 로열 시리즈에 대해 오펠과 홀든에 지불하는 라이센스 비용이 상당했다. 당시 대우는 차를 팔아도 흑자를 볼 수 없는 상황에 이미 들어선 지 오래였다.
따라서 대우중공업은 엔진을 선정할 당시 MPI엔진이 아닌, 카뷰레터 방식의 F8B엔진을 선택했다. F8B엔진의 최대출력은 41마력이었는데, 티코의 공차중량이 처음에는 700킬로그램이 넘었다. 그래서 연비가 상당히 좋지 않았다. 이를 620킬로그램까지 줄이는데(수동기준), 이 620킬로그램을 맞추기 위해 대우는 스즈키 알토에 원래 탑재되어 있던 각종 편의장비를 없애버린다. 파워스티어링, 파워윈도우가 모두 제거된다. 기본모델은 에어컨도 제거해버렸다. 극 초기 모델의 경우 뒷유리의 디프로스트 기능도 제거해버린다. 사이드미러의 한쪽은 아예 조절이 불가능하기도 했다.
이래도 적자 폭을 메꿀 수 없었고, 연비도 개선이 되지 않았다. 종국에는 차체 중량을 줄이기 위한 고육지책에 들어가게 되는데, 가볍지만 강성이 높은 소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즈키 알토의 섀시를 그대로 모양만 뽑아내되, 두께를 얇게 뽑아내는 꼼수다.
3세대 알토는 등장할 당시부터 일본에서는 랠리카나 짐카나 등의 모터스포츠 부문에서도 통용될 정도의 보디 강성이 높은 차로 정평이 나 있던 모델이었다. 그런데 대우가 OEM 방식으로 생산한 친척은 역대 알토 베이스 모델 중에서도 최악의 강성을 자랑했다. 얼마나 약했냐면, 운전석과 조수석의 발 닿는 부분인 플레이트 부분이 워낙 얇다보니 플레이트가 닳아서 “구멍”이 날 정도였다. 이게 무슨 2-30년 타다보니 프레임이 녹슬어서 이렇게 되는게 아니라, 2-3년 타면 이렇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티코의 안전성 문제는, 당시 크게 유행했던 최불암시리즈와 더불어, 세간에서 크게 유행했는데, 가령 고속도로에서 미친듯이 빠른 속도로 티코가 달리는 이유는 “쪽팔려서”이고, 또 어느날 티코가 교통정체가 시작하는 경부고속도로에서 미친듯이 달려오다가 급정차를 하는데 그 성능이 너무 좋아서 다들 놀라워하는데, 운전석에서 오너가 내리면서 하는 말이 “아 ㅆㅂ 타이어에 또 껌 붙었네” 였다던가 뭐 그런 류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덤으로, 초기 생산된 티코는 잔고장도 많았다.
게다가 “서민들이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차를 만들어 자동차 보유대수를 늘리고, 나아가서는 자동차 산업 자체를 활성화한다”는 당초 구상은, 멋들어지게 빗나가게 되는데, 1991년 당시만 해도, 아직 자동차라는 물건은 “신분상승을 과시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으로 여겨지는 것이 보통이었고, 따라서 안전성과도 거리가 멀고, 편의장비도 없고, 작아서 폼도 안나고, 그래서 사람도 많이 못 타고, 짐도 많이 못 싣고, 그렇다고 가격이 아주 저렴하지도 않고, 길에서 타고 다니면 무시당하고, 게다가 잔고장도 많은 차를 국민들이 선호할 리가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던 1991년에, 당시 다니던 학교의 지리선생의 차가 녹이 슬대로 슬어버린 마크 V였는데, 우리가 고물차 타고다닌다며 티코나 사시라고 놀릴 때마다 이 선생이 하던 말이 “그래도 내 차는 호텔 가면 보이가 문 열어주지만, 티코는 열어주지도 않아!”라고 반박하곤 했는데, 그게 당시 사회상을 잘 보여주는 예인 것이다.
국민차에 대한 정부의 시도 자체는 좋았지만, 경자동차를 탐으로써 얻을 수 있는 혜택이나 메리트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전두환, 노태우, 그리고 김영삼 정권 후반에 이르기까지, 정부는 1가구 2차량 중과세 제도를 적용하고 있었다. 즉, 한 가구에 자동차가 2대 이상이면, 엄청난 세금을 때려버리는 제도이다. 당연, 경자동차에 대한 등록세, 취득세 면제 같은 세제혜택도 없었고, 고속도로 통행료나 공공주차장 비용에 대한 할인정책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차가 잘 팔릴 리 없잖아… 사회 자체도 미쳐있었지만, 제도로 보완이 되지도 않았던 시절이니까.
그런데 대한민국에 ‘경자동차’라는 카테고리가 주목을 받게 되는 한 사건이 터진다. 바로 IMF사태다. (하편에서 계속)
원문: 성년월드 흑과장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