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발에 푸른 눈, 큰 키, 홍조를 띤 두 뺨, 햇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빛나는 팔다리 털, 어느 대륙에 가도 후달리지 않는 사이즈. 님들이 이 글의 제목을 읽고서 막 멋대로 그려 보고 있을 스칸디나비아 발트해 연안 사람의 이미지는 이런 것일 테다. 맞나?
잘난 외모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맞는 말이다. 그리고 나는 핀란드 남자와 장기 연애 중이다.
기념일을 챙기지 않는, 하지만 더 로맨틱한 핀란드 산타
만날 수 없어서 요 1년은 서로 심심이 수준으로 실재감이 없어지긴 했지만, 그래서 보이기만 하고 만질 수 없는 사이버 가수 아담 같은(…) 3D 홀로그램과 연애하냐는 소리를 듣긴 하지만… 어쨌든 대강 저런 이미지의 ‘핀란드’ 사람과 목하 열애 중이다. 실명을 까기는 좀 부끄러우니, 그를 산타라고 부르겠다. 대충 전주댁 같은 느낌으로 읽어주시라.
첫 문단에서 언급한 이미지를 떠올리며 ‘어머, 외쿸인과의 연애라니!’ 외치는 분들… 용사여 꿈을 깨세여… 산타는 이른바 ‘가장 보통의 존재’이다. 그는 5인 가족의 삼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군대도 다녀왔고(핀란드도 징병제), 새벽 축구중계를 열심히 보고, 엄벙덤벙 대학도 졸업하여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고,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자기를 닮은 아이를 둘 낳아 좋은 아빠가 되고 싶ㅃ@$ㅖㅑㅕㅑ@%!ㅑㅣ!ㅑ!$ …… 하여튼 그런, 보통의 남자다.
보통의 남녀가 만나 연애를 하고 있으니 보통의 연애겠지. 그런 우리의 국제 연애 경험담을 쓰게 되었다는 얘기를 산타에게 했더니 그는 “그럼 소녀들이 꿈꾸는 동화를 쓰면 되겠군. ㅎㅎ” 라며 자신을 백마 탄 왕자로 묘사해 달라고 했다. 또 물의의 단어 백마가 나왔지만 이건 진짜 백마다(…)
보통의 연애라 했다. 산타와 연애를 하는 것은 한국 남자와 연애를 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래도 곰곰이 따져보면 약간 다른 점이 있기는 하다.
첫째, 우리는 기념일을 챙기지 않는다. 언제가 기념일인지 모르기도 하고. 대신 우리는 크리스마스에 특별한 카드를 주고받거나, 우리의 연애에 대한 아주 긴 장문의 편지를 교환한다. 산타는 비싼 선물 대신 노동으로 감동을 주는 짓을 잘 하는데, 예를 들면 2010년의 크리스마스에 받았던 카드 같은 것이다.
그 카드는 옛날 잡지의 그림을 콜라주해 만든 동화책이었다. 몬티 파이톤 (영국의 유서 깊은 코미디언 팀. 고전문학을 자주 풍자했다.) 풍의 스토리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산타클로스가 감옥에 가는 황당한 내용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독창적 아이디어와 노력에 감탄했다. 그것뿐인가, 한국에 왔을 때 우리 집에 선물과 편지를 숨겨 놓아서 나중에 그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건조한 문장으로 서술해서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나는 매우 감동받았다고!
자식의 결혼에 연연하지 않는 핀란드 산타의 부모
두 번째, 자식의 연애에 대한 부모의 반응이 확연히 다르다. 산타와 반 년 정도 썸을 탄 후 사귀기 시작했을 무렵, 핀란드 산타네 집에서 한 달 정도 신세를 지게 되었다. “부모님 댁에 누나와 여동생이 쓰던 방이 여러 개 있으니 넌 거기서 머물면 된다.”는 산타의 말만 믿고 신나서(공짜!) 여행 책을 이것저것 들춰보며 들떠 있었지만 날짜가 다가오자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게 산타는 집에 잘 연락도 안하고 할 때조차 내 얘기는 안 하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내가 아무리 핀란드 어를 못 알아들어도 눈치가 있지, 자기 자취방도 아니고 부모님 댁에서 신세 지는 건데? 이건 왠지 인사드리러 가는 풍이고 장난 아닌데? 왜 말을 안 하지? 내가 부끄럽나? 혹시 얜 그냥 핀란드 찐따에 아시안여자 좋아하는 양놈? 나 낯선 나라로 팔려가는 거야? 이 새끼가 사실은 변태 토막 살인범이라든가?????’
죽더라도 가서 토막 나는 것보다는 여기서… 라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어 물어보았다.
“부모님께 나에 대해 말했니?”
호수 같은 남자 산타는 매우 긴장한 나에게 호수 같이 잔잔하게 요점 정리를 해 주었다.
“응, 네가 한 달 동안 우리 집에 있을 거라고 했어. 알았대.” 이걸로 끗.
산타와 도착한 탐페레 터미널에는 산타 아버지가 프라이드만한 차를 끌고 나와 계셨고 산타와 아버지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단 두세 마디 정도를 나눴다. 아… 독고다이로 살아가는 늑대 같은 국민성을 가진 것이 핀란드인이라더니 과연 과묵하구나.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몰라서 한국에서 어르신을 대할 때처럼 두 손을 무릎에 모으고 눈이 마주치면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것은 매우 괴로웠다.
집에 도착하자 산타의 어머니가 맞아주셨다. 나에게 뭐라 말을 걸지, 뭐라 인사를 하고 어떤 표정을 지으면 좋을지… 이전 애인의 부모를 만날 때 했던 고민들을 다시 끌어모아 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하이.” 한 마디 던지시고 미리 청소해 둔 산타 누나의 방으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짐을 푸는 동안 다과를 준비해 주셨는데 그 분위기란 마치 아들이 학교에서 새로 사귄 친구를 데려왔을 때 같은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어서 혼자 온갖 고민을 하고 있던 나는 김이 좀 샜다.
이렇게 서로에게 무심한 상태는 한 달 내내 이어졌는데, 이 집에서는 내가 방에서 머리를 혼자 자르든, 청소를 하든, 놀러 나가든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날 투명인간 취급을 하지는 않았던 것이, 혼자 있든 산타랑 있든 방에서 놀고 있다 보면 차 마시러 올라오라며 커피와 타르트, 푸딩 같은 것을 대접해 주셨던 것이다. 물론 서로 아무 말 없이 또 처묵처묵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오는 식이었지만….
산타의 가족은 탐페레의 옛날 사진을 보여주거나, 정원에 있는 나무를 거름용으로 자르는 것도 구경시켜 주었다. 토막 영어와 토막 핀란드어로 서로 힘들게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대체로 시골집에 방학을 보내러 온 초딩 친구 같은 대접을 받으며 한 달간 머물렀다. 그리고 산타의 이런 농담을 통해 뒤늦게나마 자식의 연애 관계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알게 되었다.
“핀란드에서는 ‘엄마, 나 결혼해.’ 라고 말하면 이렇게 대답해. ‘그래, 언제?’”
반대로 사위 면접을 준비하신 한국의 부모님
다음 해에는 산타가 우리 부모님 댁에서 한 달 가량 머물게 되었다.
산타를 공항에서 데려오기 전날 아버지는 “산타가 오면 첫날 내가 산타와 얘기를 좀 나눠야 하겠으니 네가 옆에서 통역을 하도록 하여라.”고 지시를 내리셨다. 산타는 짐을 풀자마자 아버지와 부엌 식탁에 마주앉았다.
아버지는 노트와 펜을 지참하고 계셨다(…)
집에 딸 애인이 와서 머물다니, 이건 단순히 집에 손님이 오는 게 아니라 그, 말하자면 사위 인턴쉽 기간이었으며, 산타와 아버지의 대화는 예비 사위의 면접 시험이었던 것이다. 면접관은 지원자보다 훨씬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연신 무언가를 노트에 적었다. 첫 질문은 “핀란드에는 카톨릭을 믿는 사람이 90% 이상이라고 하던데 너는 어째서 교회에 다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시다(…)
사실 산타가 우리 부모님을 만난다고 했을 때, 이미 국제 연애와 국제 결혼의 경험이 있는 스위스인 친구 아드리안이 그에게 조언을 한 게 있다. 얘네는 지금 애도 있다.
“한국의 부모님이 묻는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가 두 가지 있고, 여기에 대해 무조건 YES라고 대답해야 교제에 지장이 없다!
1. 우리 딸과 결혼할 생각인가?
2. 결혼하면 한국에서 살 건가?
이 두 가지야말로 답정너로 너의 개인적인 생각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그렇다. 우리 아버지도 저 질문을 했다. 하지만 상대는 산타였다. 그리고 산타는, 산타는… 솔직했다.
아버지는 결혼 계획과 향후 취업 진로에 대한 질문을 했고, 산타는 끊임없이 아주 아주 솔직하게 “이 관계는 매우 긍정적이며, 가능하다면 결혼도 하면 좋을 것이다.” 같은, 아버지가 절대 만족할 수 없는 대답만 골라 했다.
나한테만 일 년 같이 느껴졌던 길고 긴 한 시간이 끝나고 드디어 산타의 사위 인턴쉽이 시작되었다. 이 인턴쉽은 예상보다 평화롭게 진행되었지만 때때로 산타와 부모님이 의문을 갖고 나에게 살짝 물어보는 것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
“너희 어머니는 왜 내가 밥 먹을 때 앞에 계속 앉아 있어?”(산타)
“걔는 왜 어른이 집에 들어와도 안 일어나니?”(부모님)
“아버지가 맨날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 눈치를 주는데 왜 걔는 한 번도 청소를 안 하니?”(부모님)
“핀란드는 뭐가 유명하니? 걔 그것 좀 보내라고 해.”(부모님)
마지막 건 질문이 아니지. 미안하다(…)
국제 연애는 결국 연애, 하지만 험난한 (한국의) 국제 결혼
결국 연애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문제이고 국제 연애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은 없다. 다만 같이 연애를 하면서 어떤 가족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들이 다른 가족에게는 엄청나게 신경 쓰이는 일이 되기도 한다는 것, 정도가 지금의 연애에서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 정도라면 지금 연애를 진행 중인 사람들이라면 비슷하게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국제 연애라고 해서 너님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는 말이다.
우리가 앞으로 얼마나 사귈지, 결혼을 하게 될지, 어느 나라에서 함께 살게 될지, 마지막을 빼고는 다른 커플들도 다 하는 고민들을 우리 역시 ‘느긋하게’ 하고 있다.
아, 하나 더 있구나, 자식을 낳게 된다면 그 아이의 모국어는 어느 언어로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