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말이다. 요즘 중학교 3학년들의 2학기는 11월 초면 모두 끝난다. 고입 입시에 기말고사 성적을 반영하기 위해 2학기 기말고사를 10월 말이나 11월 초에 보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아이들은 입시 후 공백으로 괴로워한다. 체험학습으로 온갖 곳에 놀러 다니면서 소음공해, 민폐를 만들어 내는 일도 있고, 구기대회, 합창대회 같은 교내 이벤트도 하지만, 아이들은 심심하다. 어떤 학교에서는 심심한 아이들의 생산력을 긍정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UCC 경연대회’라는 것을 하기도 한다. 훌륭한 학풍이다.
여가부를 까는 UCC를 만드는 아이들
아이들과 UCC 주제를 정하기 위해 아이들을 조별로 앉혀놓고 회의를 시켰다. 주제로 뭘 정할지 궁금했다. 생산적인 콘텐츠를 만든다고 하면, 다른 이들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회 문제에 대해서 고민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숨 막히는 입시제도라든가, 현재 다니는 학교의 엄한 생활 규율 문제(이 곳에서는 암암리에 두발단속을 하고, 물론 다들 갖고 다니지만 휴대폰 소지도 금지되어 있다) 등에 대한 신랄한, 그리고 재기발랄한 아이디어 퐁퐁하는, 보는 이에게 어떤 파급력을 가질 수 있는(…) 아니, 여튼, 뭐든, 멋지고 거창한 것을 만들 줄 알았다.
그런데 아이들은 온통 아청법, 여가부, 셧다운 타령이다. 이 학생 놈 색히들이 밤에 잠은 안 자고…… 그 중 한 학생은 셧다운제에 대해 진지하게 UCC를 제작했다. 하기 싫다고 좀비처럼 쓰러져 있는 아이들을 꼬시기 위해 피자를 걸어서 나온 작품이 이거라니(…) 캡처 화면을 보면 알겠지만, 이 아이는 UCC를 100% 게임 화면을 활용하여 만들었다. 롤, 배틀필드3, 마인크레프트 게임을 반디캠으로 찍은 듯하다.
스토리는 이렇다. ‘롤 하러 피씨방에 가서, 로그인을 하는 순간, 셧다운으로 접속이 제한된다는 메시지를 보고 분노한 이 녀석은 폭탄을 사서 여가부를 폭탄테러하고, 여가부 간부(?)들의 테러리스트가 된다.’는 것이다.
사실 아이들이 이토록 셧다운제나 아청법, 여가부에 보이는 분노에는 진지한 고민의 과정들이 부족하다. 아이들과 이런 주제로 이야기할 때, “대체 왜 그렇게 여가부가 싫은데?”라고 물으면, 별 이유를 대지 못하고 “싫다.”는 목소리만 높이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의 반응은 그들이 자주 가는 유머 사이트들에서 남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그대로 재생산하는 느낌이다. (물론 이것은 남학생들의 의사소통 방법을 진지하지 않음으로 치부하는 나의 오해의 소산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더 강력해진 게임 규제를 위한 법안이 제출되었단다. 이 모든 것이 게임에 중독된 아이들을 위한 것이며, 그런 아이를 가진 부모님들의 고통과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란다. 과연 그럴까?
청소년기의 중독, 그리고 무서운 결과
사실 재미있고 좋은 것은 중독되게 마련이다. 공부에 중독되진 않잖나? 우린 게임에 중독되고, 트위터에 중독되고, (필자가 그래서 망하고 있다.) 도박에 중독되고, 연애에 중독되고 싶다. “과유불급”이라는 고루한 사자성어를 끌어다 붙이지 않아도, 무언가에 중독되면 일상이 흔들리게 마련이다. 일이나 공부를 해야 하는데, 자꾸 재미있는 게임, 트윗, 도박, 섹시한 남자가 생각나니까.
청소년기에 찾아오는 이런 중독은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친다. ‘게임을 하다가 현실과 구분을 하지 못해서 동생을 죽였어요.’ 같은 극단적 사례를 들진 않겠다. 게임 중독된 학생들이 어떤 모습일 것 같은가? 여러분이 상상하는 그대로다. 게임을 열심히 하는 학생들, 특히 밤새 게임을 하는 학생들은 눈빛이 흐리고, 수업 시간에 졸거나, 집중하지 못하고, 늘 다른 생각을 한다.
그런 아이에게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나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를 물으면, 대게 ‘없어요.’라는 답이 돌아오곤 한다. 일상의 삶이 버겁고 재미없고, 의욕이 없고, 다른 일은 다 귀찮고, 게임하는 것은 노력이 많이 들지 않지만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일이니 게임만 하게 되는 것이다.
담임의 입장에서는 우리 반에 있는 모든 학생들이 일상의 즐거움을 알고, 세상의 많은 것을 느끼면서, 타인과 소통하는 삶을 가꾸어 가길 바란다. 이런 학생들이 건강한 삶을 이끌어갈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아이들의 무기력에, 학부모님들의 하소연도 이어진다. 우리 아이는 게임이나 판타지 소설에 너무 빠져있다며 고민을 털어놓던 한 어머님은 스트레스를 주는 부모님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어 한 달 동안 고시원에서 따로 생활하게 배려해주기도 하였다.
부모님은 큰 결단이었고, 아이에게 당근을 주면 뭔가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겠지만, 아이는 방과후에 피씨방을 찾아, 밤새 게임을 하고 학교에 오지 않았다. 당근이 아닌 채찍을 지도 방안으로 선택한 부모님들은 컴퓨터를 거실로 꺼내고, 비밀번호를 걸고, 엑스키퍼 같은 차단 프로그램을 설치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부팅화면에서 F5나 F8을 눌러 안전모드를 통해 관리자 계정으로 들어간 후, 새로운 계정을 만들고 다시 부팅하여 게임을 즐긴 후, 다시 안전모드로 들어가서 그 계정을 지운단다.(…)
게임만 조지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생각의 높은 분들
정부나 교육 당국 차원에서 나오는 대책들은 사실 학생이 어떤 삶을 꾸릴 것인가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들이 생각하는 프로세스는 이렇다. 학생들이 게임을 하면, 일상에 충실할 수 없고, 공부나 학교생활을 잘 할 수 없고, 그러면 훌륭한(기준은 알 수 없지만) 어른이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이 게임을 못하도록 해야 한다. 끗.
물론 그렇다. 그들의 걱정은 타당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학생들이 게임에 빠지면 일상이 흔들리고, 자신의 일상과 자기 앞의 미래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것은 문제다. 아이의 삶을 망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 어떤 솔루션을 내놓는가는 사실 ‘인간을 어떤 존재로 보는가’와 관련이 있다. 학생이란 인간을 타율과 규제에 의해 조절되고 관리해야 하는 존재로 보는가, 아니면, 스스로 자신의 욕구와 일상을 조절할 수 있는 존재로 보는가 하는 지점이 교차하게 되는 것이다.
규제를 강조하는 입장은 전자와 연결된다. 아이들이 게임에 접근할 수 없게 하고, 현재 중독된 학생들은 치료한다. 아이들은 게임을 하지 못하면, 더 이상 게임에 중독되지 않을 것이고, 중독된 아이들은 치료하니 나을 것이다. 그러면 게임 중독은 줄어들 것이고, 아이들은 훌륭하게(?) 자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금기는 더 달콤한 법이다. 아이들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어떤 당근과 채찍으로도 게임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미 온국민의 개인정보가 털린 마당에, 주민번호에 기반한 연령 접속 제한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간은 타인이 술을 먹지 말란다고, 담배를 태우지 말란다고, 이성과 그만 만나란다고 하기를 포기하지 않지 않는다. 애들도 인간이다. 남이 하지 말란다고 그만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뭘 그만둘 때는, 더 이상 그 일에서 재미를 느낄 수 없을 때다. 권태기로 대변되는 연애의 한 시기는 ‘재미가 없다.’와 다른 말이 아니다. 바람이 나는 건, 다른 이와의 관계가 원래 있던 관계보다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
아이들, 생각보다 멍청하지 않다. 스스로 지 인생에 대해 나름 고민도 한다. 좀 믿어줘도 괜찮다. 결국 모든 것은, 아이들 스스로 판단하고, 어떤 일의 가치와 경중을 따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이들이 게임이 아닌 삶 속에서의 재미들을 느낄 수 있도록 길러내면 되는 것이다.
학생들의 게임 중독 문제는 게임 이용 차제를 금지하거나, 아이들이 게임을 하지 못하도록 컴퓨터에 비번을 건다든가 하는 방법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이상적이라고? 맞다, 이상적이다. 많은 이들은 당장이라도 해결책을 투입해 문제가 사라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겠지만, 그런 근시안적인 접근은 현재 학교 교육을 둘러싼 문제들을 낳았다. 일선 현장에 있는 교사들은, 내 울타리 안으로 뛰어든 아이들과 하루하루 나아지기 위해서 고군분투할 뿐이다.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어쩌면 뻔한 해결책 : 부모의 신뢰와 사랑
짧은 현장 경험을 비추어 보았을 때, 스스로 자신의 삶을 조절하고, 일상에 두 다리를 딛고, 주체적으로 살고자 노력하는 학생들은 그 표현태는 다르지만 부모님의 든든한 애정과 신뢰를 빽(!)으로 갖고 있었다. 그런 학생들은 삶에서 자신을 덮쳐 오는 갈등 상황들을 버거워하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해결해 나간다. 학교를 뛰쳐나가거나, 게임의 세계 속으로 숨는 아이들은 대체적으로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어쩌면 게임이나 인터넷에 중독된 아이들이나, 학교 폭력의 가해자이거나 피해자인 아이들은 모두 그 아이들 삶 전체를 돌보아 주는 따뜻한 손길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많은 이들은, 삶 전체를 돌보아 주는 학교 교육은 불가능하다 믿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뜬구름 잡는 그 교육을 이뤄 보고파서 또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아직 그런 것을 믿는 이들이 있다면, 그래도 희망이 있지 않을까.
사실 쓰고 싶은 것은, ‘어느 날 남학교에 오게 된 소녀 교사의 남학교 적응기’ 같은 종류의 글이었다. 헛소리를 했으니, 용서해 달라. 백만 리플이 달리면 그 시리즈를 연재해 보겠지만, 현실은 무플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관심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