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아(IKEA), 이 전 세계적인 스웨덴 그룹에 관해 흥미 위주로 에센스만 뽑아봤다.
1. 이케아라는 회사명과 창립자 잉바르 캄프라드
이케아는 설립자 잉바르 캄프라드(Ingvar Kamprad, 1926-)가 1943년 설립한 회사명이다. 자기 이름의 두 글자 I와 K, 그리고 자란 곳의 지명인 엘름타리드(Elmtaryd)와 고향인 아군나리드(Agunnaryd)의 첫 글자를 묶어 ‘IKEA’가 되었다.
회사를 설립했을 때 그의 나이는 17살이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내 피엔 거래가 흐른다(Trading was in my blood)”라고 표현할 정도로 무언가를 판매하는 것에 집착이 강했다고 회고했다. 다섯 살 때부터 삼촌이 스톡홀름에서 수백 개의 성냥을 사는 것을 돕기 시작했으며, 직접 채취한 링곤베리와 크리스마스 카드 등도 팔았다.
이런 재능은 세금 회피에서도 드러났다. 이케아는 1982년 스웨덴의 높은 세금을 피해 네덜란드로 본사를 옮겼다. 지금도 이케아는 룩셈부르크, 리첸스타인, 스위스 등에 각각 다른 계열사를 둬 세금을 최소화한다. 하지만 정작 캄프라드는 1976년 이후 스위스에서 산다. 엄청난 부호인데도 비행기 대신 기차를, 비즈니스 클래스 대신 이코노미를 타는 그의 철학은 이케아의 청렴한 이미지를 더했다.
2. 숫자로 보는 이케아
1. 세계 최대 규모의 자선 단체: 그가 설립한 자선 단체는 INGKA 파운데이션은 빌 게이츠의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Bill and Melinda Gates Foundation) 재단보다 더 큰 세계 최대규모의 자선 재단이다.
2. 두 가지 색깔: 이케아 로고에 쓰인 노란색과 파란색은 스웨덴 국기의 색깔에서 따왔다고 한다.
2~3. 가격 인하: 지난 십여 년간 아이템들의 가격이 2~3%씩 낮아졌다. 이가 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는 중국에서 제품을 생산했기 때문이다.
5. 세계 5대 부호: 이케아는 아직도 기업공개(IPO)를 하지 않는 비상장 개인 소유기업이다. 캄프라드는 2012년 기준 270억 유로의 재산으로 세계 최고 부호 5위에 등극했다.
10. 매 10초: 우리가 지금 숨 쉬고 있는 지금 10초마다 이케아의 베스트 셀러 책장이 한 개씩 팔리고 있다.
46. 독일의 매장 수: 2013년 기준으로 전 세계 42개 국가에 345개의 매장, 15만여 명의 종업원이 있다. 독일이 46개 체인으로 가장 많고 다음이 미국(38), 프랑스(29), 이탈리아(20), 스페인(18), 영국(18), 스웨덴(17), 러시아(14), 중국(14) 순이다. 중남미에는 도미니카에만 진출한 상태.
1958. 첫 매장 오픈: 첫 매장을 1958년 스웨덴의 알름훌트(Almhult)에서 열었으며, 두 번째 매장은 노르웨이, 스웨덴 두 번째 매장은 2년 후 스톡홀름에 열었다. 그 후 1970년대에 스위스와 독일, 1980년대에 미국, 90년대 후반에 중국 매장을 오픈하며 글로벌화를 추진했다. 현재 독일에만 46개의 매장이 있다.
55,200. 세계에서 가장 큰 이케아 매장은 5만 5,200㎡인 스톡홀름의 쿵겐스 쿠르바(Kungens Kurva) 매장이다. 참고로 2~5등은 전부 중국에 있다.
197,000,000. 한 해 발간하는 카탈로그의 숫자: 1억 9,700만 부는 영원한 베스트 셀러라고 하는 성경보다 3배 많은 숫자다.
3. 가격이 싼 것이 이케아의 전부가 아니다
이케아가 탄생한 1950년대는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이 유행하던 시기다. 이케아는 현재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격이 아닌 퀄리티와 디자인으로 시작했다. 터닝 포인트는 1964년 한 스웨덴 가구 잡지가 이케아와 다른 하이 엔드 업체들의 가구를 비교하는 칼럼에서 이케아를 더 높은 퀄리티로 평가한 것이다.
이후 이케아는 더 큰 주목을 받기 시작하며 고객을 사로잡는다. 이때가 바로 스웨디쉬 미트볼 레스토랑이 등장하며 가족 친화적인 곳으로 바뀌게 시작된 포인트로, 캄프라드가 생각한 ‘더 즐거운 곳을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실현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도 레스토랑의 가격은 퀄리티 대비 싼 가격에 제공되고 있다.
또한 이때부터 이미 이케아 많은 매장에 아이를 돌봐주는 곳이 있었는데, 현재 호주에서는 이케아 매장 내 아이뿐 아니라 남성들이 쇼핑하는 여성들을 기다리는 장소까지 마련되었다. 그리고 이케아는 미국의 월마트나 명품 아울렛과 같이 지가가 싼 지역에 체인을 열어 임대료를 줄여 경영한다. 캄프라드는 ‘이케아는 콘셉트의 회사로 싼 가격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말한 바 있다.
최근에는 이케아가 제공하는 디자인 시뮬레이션을 이용, 매장 전문 직원들의 조언을 받으면 더 아름답고 공간을 잘 활용할 방향으로 꾸밀 수 있다.
4. 토요일은 이케아 데이, 일요일은 빌드업 데이
스웨덴에서는 흔히 토요일을 이케아 데이라고 표현한다. 토요일에 이케아에 가서 물건을 사고 일요일에 조립하기 때문이다. 이케아 매장은 동선 라인을 확실히 구분해 라인만 따라가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리고 레스토랑과 창고에서의 물건 픽업까지 포함하면 대충 하루를 잡아먹는다.
다음날 조립도 역시 시간이 소요되기는 마찬가지다. 이게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리며, 큰 가구들은 한사람이 조립하기에는 부족하다. 여러 면에서 가족의 친밀도를 높일 수 있는 것이 이케아의 장점 중 하나가 아닐까.
5. 이케아에서의 낭패
이케아에서의 개인적인 낭패의 기억을 공유한다. 이케아는 제품과 회사 콘셉트 등 모든 면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써 본 가구의 퀄리티는 그리 좋지 않다. 우선 가구들의 뒷면(백보드)은 대부분 얇다. 구멍 뚫기에 용이해 케이블 등 정리가 필요한 가구들에게는 이점이 될 수 있지만, 큰 힘을 가하거나 날카로운 것으로 힘을 주면 보기 안 좋아진다.
부품이 잘못된 경우도 종종 있다. 한 번은 제작이 거의 끝나가는데 부품에 문제가 있어 완성을 못 하고 먼 길을 돌아가 해당 부품을 다시 받았다. 문제가 일어날 정확한 확률은 알 수 없지만 30개의 박스를 조립했다 치면 두 번은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배송 측면에서도 문제가 있다. 본인의 차가 SUV 및 트럭이 아니고 큰 사이즈의 가구를 조립해야 한다면 이케아에서 운영하는 배송 서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웨덴 현지에서는 물건을 한 번 운반하는 비용이 5만 원 정도이다(거리상 차등 적용이며, 집 앞까지만 배송한다). 배송 서비스 외에도 제품 조립 서비스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비용 면에서 이케아에 기대했던 ‘싼’ 느낌은 없어질 수 있다.
6. 패킹은 이케아 성공의 승부수
이케아의 성공을 가져온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모든 구성품을 납작하게 넣은 한 박스인 플랫팩(Flat-Pack)이었다. 플랫팩 덕분에 손쉽게 공간을 활용하고 창고의 공간을 줄일 수 있었다. 또한 대부분의 가구 사이즈와 부품을 통일화해 제품 생산성을 극대화했다. 이게 바로 “자원의 낭비는 이케아에서 범죄”라 캄프라드가 말하는 부분이다.
1960년대 이후 폴란드 및 동유럽 국가들에서 제품을 생산하며 원가를 줄일 수 있었던 점도 다른 획기적 사건이 되었다. 현재도 이케아가 직접 컨트롤하는 생산라인도 있지만, 더 많은 중국 내 생산을 통해 스웨덴 내 제작 비율을 줄이고 있다. 중국, 동유럽, 스웨덴 등을 포함한 국가들에 걸쳐 1,300여 개의 공급자가 있다고 한다.
7. 이케아의 가장 큰 실패, 일본
일본은 1968년 GDP 성장률 10%를 보이며 미국 다음으로 가장 큰 나라가 됐고, 1970년대 당시 유럽 5개국만 진출했던 이케아는 1974년 일본에 첫 매장을 열며 사업을 전개한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10여 년 후인 1986년 사업을 접고 일본 시장에서의 짧은 역사를 끝낸다.
1974~1979년은 오일 위기와 함께 개인투자자들의 침체로 경제 성장률이 3.6%로 줄어들었으며, 많은 업계에서는 아직도 가격 인하가 비즈니스의 관건이었던 시기였다. 한 덴마크의 리포트에 따르면 가장 큰 실패의 원인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이케아는 해외에 진출할 때 물건만 파는 것이 아니라 철학도 함께 진출하는데, 최소한 유럽에서는 효과적이었지만 일본에서는 얘기가 달랐다는 것이다. 특히 플랫팩은 당시 일본인에게 생소했고 너무 빠른 진출로 이케아의 전체적인 콘셉트를 소화할 시간도 부족했다.
이케아 일본 CEO인 토미 쿨베리는 “일본 마켓과 일본 고객들은 이케아를 맞을 준비가 안 되었고, 이케아 역시 당시 일본 시장에 준비가 안 되었다”고 표현했다. 경제 성장에서의 한계와 함께 문화로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점이 일본 내에서의 실패로서 지적된다. 그 후 2001년 다시 일본 시장의 문을 두드리며 2009년 기준 총 6개의 매장이 운영되고 있다.
원문: Blue Screen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