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산 김원봉, 해방 이후 독립운동가 집안의 어려움, 친일파의 활개, 반민특위의 좌절, 그리고 지난 7월 31일이 사형집행일이었던 죽산 조봉암의 실험과 좌절까지…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1945~48년의 시간에 ‘갇히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승만 욕만 하게 되거나, 새누리당 원망만 하고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된다.
해방기를 이해하기 위한 더 큰 흐름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국제 정세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그게 연합군의 승리였다. 물론 우리 민족의 역량도 매우 중요했음을 보여주는 징표가 있다. 카이로 선언이다.
영국의 처칠, 미국의 루즈벨트, 중국의 장제스가 모여 많고 많은 제 3세계 국가 중에서 유독 조선의 독립을 별도로 합의했다. 일제와 맞서는 전선에서 중국, 소련군에 가담하고 있는 ‘독립적인 조선인 군대’가 중국 국민당, 중국 공산당, 러시아 소비에트 등과 민족 해방을 위한 무장투쟁의 일환으로 결합하면서 일종의 정치연합을 구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봉길의 홍구공원 폭탄 투하, 김구가 이끌던 임시정부의 역할은 그러한 큰 물결의 하나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연합국 내의 양대 강국이었던 미국과 소련 사이에 주도권 다툼이 벌어지게 된다. 이는 냉정한 국제 현실이었다.
이때 해방된 조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폭력 독점을 본질로 하는 국가를 통해 체제 안정을 도모해야 했다.
그리고 국가-정부를 수립함에 있어 국제적 현실을 냉정하게 인정한다면,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경우의 수는 세가지였다. 1) 미국의 편이 되거나 2) 소련의 편이 되거나 3) 양자의 갈등을 인정한 상태에서 중재-절충하거나, 이러한 세 가지 선택지 외에는 없는 셈이었다.
이중에서 이승만은 미국의 편이 될 것을 선택했다. 그래서 경쟁자에 대해서는 테러를 자행했다. 여운형, 김구가 그렇게 죽었다. 그리고 김일성-박헌영은 소련의 편이 되는 것을 선택했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파업(1946년 9월), 대구폭동(1946년 10월), 여수-순천 반란사건(1948년 10월) 등은 소련의 노선을 따르려고 했던 북로당-남로당의 지시에 의한 것들이었다.
『한국의 48년 체제』(후마니타스)라는 책을 쓴 박찬표 교수는 이러한 이승만-김일성-박헌영을 ‘기지론자’라고 표현한다. 이들은 타협-공존을 대원칙으로 하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행태들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당시를 기준으로 대안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좌우합작 노선에 의한 정부 수립이었고, 설령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불가피했다고 할지언정 ‘단독 정부 참여를 통한 좌우 합작 노선’을 계속 추진했어야 한다. 그 길을 올곧게 실천한 이들이 바로 중도좌파의 여운형과 조봉암 그리고 중도우파의 김규식과 안재홍이었다.
이승만을 비판하려면 김일성, 박헌영과 근본적으로 단절해야 한다
현재 박근혜-김무성-뉴라이트-보수언론 일부에서 시도되는 건국절 논란,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려는 움직임은 비판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힘있는 비판이 되기 위해서는 기지론의 나머지 반쪽이었던, 즉, 소련의 편이고자했던 김일성-박헌영 등의 시도에 대한 ‘근본적-성찰적 단절’이 반드시 전제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당연히 전평, 대구폭동, 여수-순천 반란 사건 등에 대한 진보 내에서의 재평가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80년대 한국 진보의 다수파는 NL이었다. 나머지는 PD였다. 이들은 공히 공산주의 노선을 따르던 이들로 북한식 사회주의 혹은 소련식 사회주의 노선을 따르던 이들이다. 당연히 자신들의 역사적 족보를 김일성-박헌영, 전평 등에서 찾았다.
이제 그러한 역사적 사실과 실험이 있었음은 존중하되, 그들과 근본적인 단절을 해야 한다. 오늘날의 세력으로도 그들과 단절해야 할 뿐만 아니라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도 그들과 단절해야 한다. 그래야만, ‘냉전적 기지론’의 나머지 절반이었던 이승만을 제대로 비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일성-박헌영-전평 등의 역사와 단절하지 않는 이승만-건국절 비판은 그 의도가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미국중심 정부 수립이 아닌 소련중심 정부수립을 주장하던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역사적 흐름의 일환으로 1950년 한국전쟁이 벌어졌고, 그 이후로도 우리사회는 수십년간의 체제 선택을 둘러싼 내전을 했던 것이고, 소위 빨갱이 사냥이 대중적 동의 하에서 진행되었던 이유는 한국전쟁의 아픔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15년, 기지론자들을 넘어서
중국은 태평성대를 아주 오래전 신화속 과거인 요순 시대에서 찾는다. 이와 같이 과거에서 미래의대안을 모색하는 것은 마치 시민혁명 시기의 계몽주의자들이 2000년전 그리스의 민주주의에서 미래의 정치적 대안을 찾았던 것에 비견할 수 있다.
우리가 2015년 이후의 새로운 탈냉전 대한민국을 만들고자 한다면, 그래서 박정희와 노무현의 지긋지긋한 진영론적 대결의 역사를 끝내고, 사회통합적인 사회경제적 해법을 만들고자 한다면, 약산 김원봉의 역사적 공로를 복권하고, 조봉암 죽음의 참뜻을 기리고, 민중들이 겪었던 한국전쟁의 아픔은 그것대로 존중한다면, 우리는 1948년 이전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다시 ‘2015년에 실천하는, 1948년의 좌우합작’을 우리의 정치노선으로 채택해야 한다.
지금 2015년 우리 시대에 존재하는 ‘또 다른 기지론자’들인 또다른 김일성-박헌영-이승만을 경멸하고, 자신의 정치노선이 진보파라면 스스로가 여운형-조봉암이 될 각오를 해야 하고, 자신의 정치노선이 보수파라면 김규식-안재홍이 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래야만, 1948년에 이루지 못했던 우리 민족-민중들의 좌절된 꿈을 오늘 현재에 다시 복권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