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소설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소설 속 어머니의 이름이 ‘쌍년’으로 등장한 적이 있다. 왜 쌍년이었는가 하면 손자를 기대하던 할아버지에게 손녀 소식이 전해지고 쭈뼛쭈뼛 이름을 뭐라 지을꼬 여쭈자 이 할아버지 담뱃대를 집어 던지며 “쌍년이라고 불러라 쌍년이!”라고 일갈해 버려 그예 이름이 “雙年”이 돼 버린 것이었다.
남아선호의 오래된 역사 속에서 딸들은 그 이름에서부터 서글프고도 한스러운, 동시에 난폭하면서 잔인한 인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다. 끝순이니 딸그만이니 막녀니 하는 이름이 그 예이겠는데 1901년 대구에서 태어난 한 여자에게도 비슷한 초명이 붙었다. 아들을 기대한 아버지의 실망을 담은 ‘원통’이었다. 박원통.
잘못 태어난 여자아이
21세기에 들어서도 남아선호 사상이 전국 최강을 달린다는 대구에다가 딸 넷을 주루룩 낳고서 그 넷째에게는 섭섭하다 해서 ‘섭섭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부모가 대망의 20세기를 맞아 아이를 가지고 낳은 아이가 또 딸이었으니 원통이라는 이름을 서슴없이 갖다 붙인 것이겠다.
하지만 이 원통이는 분명히 잘못 태어난 듯했다. 우선 신체적으로 그녀는 무척 건강했다. 태어날 때부터 손이 솥뚜껑 같았다고 하거니와 미인이라는 칭찬보다는 ‘남자로 태어났으면 장군감’이라는 칭찬 또는 비아냥을 더 많이 듣고 자랐다. 165센티미터의 키였으니 당시 남자들의 평균 신장 이상의 당당한 체구였다.
대구 장로회 신명 여학교에 입학했지만 원래 무료 교육이었던 것이 유료 교육으로 전환되면서 학교를 포기했다. 그즈음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바꾸었다. 원통에서 경원으로. 그녀의 이름은 박경원(朴敬元)이 된다. 그녀는 타고난 성정상 조신하게 자라서 결혼해서 시부모 모시고 일부종사할 사람이 못 되었고, 보다 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과 기필코 그 세상에서 뭔가를 이뤄 보겠다는 투지가 만만한 여성이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넓은 세상이라면 당연히 일본이었고 그녀는 일본으로 가기 위해 부산으로 향했다가 기절할 것 같은 새로운 문물을 보게 된다. 세계를 순회하며 하늘을 난다는 것은 이런 것이란다 과시하던 미국인 아트 스미스의 공중 곡예였다. 최초로 우리나라 하늘을 날았던 조선인 비행사 안창남도, “천황이 사는 곳을 폭격하는 꿈을 꾸며” 여자로서는 최초로 비행기 조종간을 잡았던 권기옥도 모두 그 소식에 몸을 떨었다. “아 저거다.”
억척스러웠던 일본에서의 생활
박경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일본에 건너가 억척스럽게 일했다. 간호사. 자동차 정비, 운전 등 당시 조선 여자로서는 그 하나하나가 희귀했을 일거리들을 닥치는 대로 몸에 익혔고 돈을 벌었다. 그녀의 꿈은 하늘에 꽂혀 있었다. 아들이 아니라고 원통이라는 이름을 딸에게 지어 준 부모는 지원을 할 여력이 없었지만 그들의 딸은 이미 웬만한 아들 찜쪄먹을 기세와 용기로 자신의 꿈을 이뤄 나갔다.
“여자가 비행기 공부를 한다고 그리 장할 것야 무엇이겠습니까만 일본에서는 이직 이에 뜻을 두는 여자가 드물 뿐 아니라 조선 여자로는 나 한사람뿐임으로 때로는 남다른 곤란을 겪은 일이 많았습니다…학교를 졸업한 후 선생들의 호의로 그 학교 조교수로 잠깐 있게 되었는데 장난 좋아하는 일본 학생들이 하도 놀리고 못살게 굴어서 할 수 없이 남복(男服)을 하고 다닌 일까지 있었습니다마는 역시 그들의 성화로 결국 그것을 그만두게 된 일도 있습니다.” (동아일보, 1925년 12월 12일)
일설에 따르면 그녀는 일본인들의 ‘조센징’ 소리를 참지 못했다고 한다. 길거리에서도 그 소리가 들리면 조선 남자들보다 평균 신장 훨씬 작았던 일본인 남자에게 다가가 그 솥뚜껑 같은 손으로 뺨을 내려 부치는 경우가 많았다고도 한다. 이 이야기의 진위를 떠나서 그녀가 비행기를 타기 위해 어느 정도의 피눈물 나는 조롱과 차별과 멸시를 견뎌야 했을지는 미루어 짐작이 간다.
조센징 소리를 내지르는 일본인의 뺨을 강타한 손바닥으로 그녀는 동료 학생들의 조종복을 빨아 그 품삯을 대가며 공부를 해야 했다. 그녀의 꿈은 오로지 하늘에 있었다. “사람들은 비행기를 날아다니는 기계로 아는 것이 아니라, 떨어져 죽는 물건으로 압니다마는 아는 기어이 비행가로서 성공하겠소”
그녀보다 앞서 비행기 조종간을 잡고 중국 군벌 산하 공군으로 활동했던 권기옥이 “일본 천황 황궁을 폭격하는” 꿈을 꾸었던 것과는 궤를 달리하여 그녀는 하늘을 사랑했다. 어려서부터 원통이라는 이름을 선사했던 갑갑하고 꽉 막힌 조선 사회로부터, 조센징 소리 빈번하고 거기에 여자가 무슨! 조소가 일상이던 그녀의 세상으로부터 날아올라 태양과 구름과 파란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 하늘 위를 날면서 그녀만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새떼는 참으로 자유롭게 이리저리 날아다니는구나! 자아, 친구야 감탄은 그만 하자. 나는 거다. 나는 거야” (그녀의 유고, 푸른 하늘 예찬 중)
그녀는 선배 비행사 안창남이나 서로 마주한 적은 없었겠지만 비슷한 시기에 하늘을 날았던 여자 비행사 권기옥처럼 독립운동에 떨쳐 나선 적이 없고 그 비슷한 내색도 비친 적이 없다. 식민지 출신의 여자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험로일지언정 그를 극복해서 하늘을 날고 싶었던 것이 그녀의 삶 최대의 이유였고 그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맥주도 잘하고, 담배도 잘 피웠을 뿐 아니라, 김치를 담가 동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으며 영화 감상이 취미였던” (후배 조종사 서웅성) 그녀는 적어도 그 시대의 여성 가운데에서는 아니 남녀를 통틀어 별종 중의 별종이었다.
마침내 그녀는 1927년 3등 조종사 시험에 합격하고 이듬해에는 2등 조종사도 손에 쥔다. 20시간 비행 경력이면 3등, 50시간은 2등, 100시간이면 1등 비행사 시험 자격이 주어졌지만 1등 조종사는 남자에 한해 자격이 생겼다. (김정동, 목원대 교수의 2001년 1월호 도쿄 아리랑 발췌 글) 하지만 2등 조종사라고 해도 ‘다이닛뽄 데이고쿠’를 통틀어 1930년 현재 비행을 할 수 있는 여류 비행사는 그녀가 유일했다.
당시 조종사가 된 이들은 비행기를 타고 고향 하늘로 날아가는 것이 일종의 전통이었다고 한다. “비행기 타고 고향 앞으로”인 셈인데 일종의 금의환향이자 성공에 대한 과시였고 그를 통해 고향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는 일종의 퍼레이드였다. 박경원 역시 그 선배 안창남이 여의도 하늘을 날며 조선 사람들의 환호를 받던 풍경을 지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종사도 간신히 된 그녀에게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3등 조종사 자격증을 따고 대구로 금의환향하긴 했지만 그건 기차를 타고서였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비행기로 성공을 하자고 했으니 최후까지 나아갈 뿐입니다. 비행기를 타면… 자꾸 좋지요.”
열리지 않은 조선의 하늘을 열기 위해
그러나 조선의 하늘을 그녀에게 쉬이 열리지 않았다. 안창남은 동아일보의 후원과 모금을 통해 비행기를 장만했지만 장마다 꼴뚜기일 수도 없고 조선인 비행사가 나올 때마다 비행기를 마련해 줄만큼 넉넉한 조선도 아니었다. 구 대한제국의 황실 가족이 그녀의 학비를 후원했다는 설도 있으나 황족이라고 해서 비행기를 한 대 안겨 줄 만한 재력은 힘겨웠을 것이다. 이때 그녀는 일본 체신 대신 고이즈미 마타지로의 도움을 받아 군용기 하나를 불하받는다. 일본 신문에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스캔들 기사가 실릴 정도였지만 정색을 한 박경원의 항의에 정정 기사를 싣기도 했다.
박경원이 청연호, 즉 푸른 제비호라고 이름 붙인 이 비행기는 마침내 조선의 하늘을 가로지를 기회를 갖게 된다. 하지만 그 기회는 지극히 불순한 음모의 결과였다.
“우리 대일본제국의 대륙정책 진전에 즈음하여 조선반도의 병참기지로서의 중요성은 점점 더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조선여성이 일본과 만주의 가교가 되어주는 일은 일본과 조선, 만주를 일체화시키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라는 데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박경원 평전』, 관동군 사령부의 시마다 중좌의 연설 중에서)
조선의 하늘만이 아니라 만주까지 가는,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 연락비행’이었다. 만주 사변을 일으켜 괴뢰국 만주국을 수립하여 자신의 앞마당을 삼고자 한 일제의 각본이었다. 박경원은 그 각본에 따른다. 일장기를 흔들며 비행기에 올라탔고 마침내 하늘로 날아올랐다. 1933년 8월 7일이었다. 뒷좌석에는 만주 관동군 사령부 등에 보내는 전문과 우편물을 싣고서였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그녀는 일본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녀의 청연과 함께 추락해 죽는다.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조종간을 놓지 않고 있었다는 그녀는 서른 둘의 나이로 죽었다.
영화 <청연>의 친일논란
이제는 고인이 된 영화배우 장진영이 주연한 <청연>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박경원의 삶을 다룬 영화였지만 영화는 개봉하기도 전에 친일 논쟁에 휩싸였었다. 심지어 “제국주의의 치어걸을 다룬 영화”라는 독설까지도 눈에 띄었다.
물론 그녀는 선배 안창남이나 총독부와 천황 황궁에 폭탄을 쏟아 붓겠다며 하늘을 날았고 이후 한국 공군의 산파 역할까지 했던 권기옥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그리고 일본 거물의 도움을 받아 일본 제국주의 정책의 파발로 그녀의 첫 2천 킬로미터 장거리 비행을 시도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 이유로 우리는 이 여자를 “제국주의 치어리더”로 폄하해 버려서는 곤란할 것 같다.
독립운동에 떨쳐 나선 이들은 분명 소중한 존재였고, 추앙받아 응당하며 그 후손들에게까지 포상을 주어 마땅한, 우리 민족과 대한민국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은인들이었다. 하지만 또 많은 사람들은 식민 체제 하에서 2천5백만의 일상을 살았다. 피폐한 식민지, 그리고 봉건 잔재의 유습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조선의 일상을 넘어서 끝내 자신의 꿈을 현실로 일군 박경원에게 ‘친일’ 딱지를 붙이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건 너무 잔인한 후세의 독단이 아닐는지.
그녀가 만약 “일본이고 조선이고 나는 몰라. 조센징이라고 부르는 놈들은 혼쭐을 냈지만 그건 내가 무시받는 게 싫어서였지 무슨 민족의식 때문은 아니었어. 난 그냥 하늘을 날고 싶었어. 내 비행기 이름처럼 푸른 제비가 되고 싶었다고. 그걸 위해서 난 뭐든지 했고, 그 후로도 그랬을 거야.”라고 한다면 그녀에게 민족의식이 없다 손가락질할 수 있는 용자가 얼마나 될까. 안창남이나 권기옥이라면 그녀에게 손가락질했을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내가 살았다는 자취를 남기고 싶었을 뿐이다”는 여자, 사람이 남긴 자취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가볍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원문: 산하의 오역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