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프라하의 봄은 젊고 패기만만했던 정치인 알렉산더 두브체크와 함께 왔다. 그는 소련 유학파로서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간직했으되 스탈린 이래의 억압적인 사회주의를 극복하고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내걸고 기존의 공산당의 무능을 통탄했다.
“우리가 단합하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보다도 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물론 어려운 일이겠지요.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는 민주적 전통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 자랑할 만한 사회주의를 세울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참여하여 이를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 가 당시 공산 사회의 분위기였다고 할 때, 이제 “우리가 결정하면 당이 바뀐다.”는 식의, 국민의 참여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정치가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을 흥분시켰다. 원래 체코슬로바키아는 ‘민주적 전통’에 관한한 자긍심이 있는 나라였다. 신앙의 자유를 탄압하는 국왕의 신하들을 성 창문 밖으로 내던져 버림으로써 30년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나라였고, 마르틴 루터보다 한 세기 전에 종교 개혁의 기치를 든 후스의 나라가 아닌가.
두브체크는 민주적 선거법을 통한 의회 제도 확립, 검열 철폐. 언론 출판 집회,여행의 자유 보장, 경찰 정치 종식 등 그때껏 일그러져 있던 “인간의 얼굴”을 펴기 위한 노력에 나섰다. 국민 역시 프라하의 봄을 만끽하며 새로운 시대의 꿈에 부푼다.
그러나 ‘인간의 얼굴’을 못마땅해하던 소련은 계속해서 견제구를 던졌다. 1968년 3월 열린 바르샤바 조약 기구 회의에서 두브체크는 일종의 이지메를 당한다. “이런 식으로 가면 재미없다.”는 경고가 발해진 것은 물론이다. 두브체크는 분주히 움직이며 사회주의에 대한 신심을 재확인했지만 이미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를 그냥 두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드디어 1968년 8월 20일 소련과 동독, 폴란드, 헝가리 연합군 20만 대군이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넘고 다음 날 새벽이 오기 전 프라하는 그들의 군홧발 아래에 놓인다.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은 눈물겹게 저항한다. 프라하의 모든 교회의 종이 찢어질 듯 울렸으며 시민들은 소련군의 탱크를 맨몸으로 저지하며 울부짖는다. 소련군 이하 공산군들에게 일체의 음식 팔기를 거부하고, 표지판을 죄다 뒤바꿔 놓아 전차 부대를 헤매게 하였다.
어느 폴란드 사단은 수십 마일을 진격(?)했는데 출발선에 되돌아온 자신들을 발견하고 경악한다. 방송국에서 기술자들이 뜯어낸 방송 시설을 이용한 지하 방송국이 시시각각 상황을 국민에게 전달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이 곳곳에 내다붙인 저항 10계명은 지금 읽어도 뭉클한 감동이 인다.
- 우리는 배운 것이 없다.
-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 우리는 아무것도 없다.
- 우리는 줄 것이 없다.
- 우리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
- 우리는 팔 물건도 없다.
- 우리는 해 줄 것이 없다.
- 우리는 무슨 말인지 모른다.
- 우리는 배반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계명은 철자 하나 하나가 대못이 되고 문신이 되어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의 가슴에 틀어박힌다.
10. 우리는 잊지 않을 것이다.
이 마지막 계명은 대문자로 쓰였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짐승 같은 폭력에 무참히 쓰러졌다. 두브체크는 당에서 축출됐고 프라하의 봄은 된서리를 맞았다. 인간의 존엄과 자유가 사라진 체제 또는 제도는 그 순간 썩기 시작한다. 마치 숨을 멎은 시신이 바로 부패가 시작되는 것처럼.
이 간단한 원리는 사회주의의 테두리 안에 머물지 않는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무슨 종교든 이념이든 인간의 얼굴을 포기한 것들은 모두 썩는다. 지게차에 치여 쓰러진 이를 두고 산재 처리되면 돌아올 불이익 때문에 119 앰뷸런스를 돌려보내고 한참을 지체했다가 회사 봉고로 회사 지정 병원에 실어 나른 자본주의라면 이미 그 자본주의는 썩어 문드러져 치워 버려야 할 무더기 이상일 수 있겠는가.
이 경악할만한 개념 없음과 끔찍한 무신경함은 1968년 8월 20일 ‘혁명 수호’를 위해 체코슬로바키아를 덮쳤던 공산연합군의 그것과 무엇이 다를까. 사회주의건 자본주의건 인간의 얼굴을 저버린 체제는 그 구성원들로부터 버림받는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가 보고 싶다. 아니면 흉내라도 내던가.
원문: 산하의 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