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로빈슨 크루소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가 24일 이곳(괌)에서 발견되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곳에서 고기를 잡던 미국인 어부 두 명은 24일 약 28년 전 미군이 공격할 때 정글 속으로 숨어버렸던 자칭 일본 육군 상사(실제로는 중사)라고 하는 요코이 쇼이치(橫井庄一·57)를 붙잡았는데 그는 헌 삼베 부대로 옷을 걸치고 있었으며 건강은 아주 양호한 편이었다.”
1972년 1월 25일 자 동아일보는 일본군 패잔병 요코이 중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면서 “요코이 중사는 20여 년 전에 전쟁이 끝난 것을 알았으나 정글 속에서 나오는 게 겁이 나 그 후 계속 새우와 물고기 및 도토리로 연명해왔다고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내용이지만 그는 붙잡히기 전 ‘살려달라’고 애원하기도 했습니다. 28년 동안 문명과 단절된 채 살아온 사람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겠죠.
요코이 중사는 그해 2월 2일 특별 전세기편으로 도쿄 하네다 공항에 내렸습니다. 이 장면은 당연히 NHK TV 중계를 탔는데, 일본 국민 41.2%가 지켜보던 이 자리에서 요코이 중사가 남긴 첫 마디는 “부끄럽게도 살아서 돌아왔습니다(恥ずかしながら帰って参りました).” 그는 이 자리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99식 소총을 덴노에게 봉납하겠다고 보고해 일본인들의 애국심을 들끓게 하기도 했습니다.
귀국 후 요코이 중사는 고향 아이치 현에 자리 잡은 뒤 결혼도 했습니다. 오일 쇼크가 일본 열도를 뒤흔든 뒤로는 내핍(耐乏·물자가 없는 것을 참고 견딤) 생활 전문가로 TV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아껴야 잘 산다’는 걸 몸소 실천해 보인 인물이었으니 해당 TV 프로 작가 섭외력이 빛났다고 해야 할까요?
덴노밖에 모르는 바보
이 정도면 일본에서 인기가 대단했을 텐데 끝까지 요코이 중사가 1997년 숨질 때까지 만나기를 거부했던 사내가 있었습니다. 이유는 요코이 중사가 가지고 있던, 즉 덴노가 내린 총검이 녹슬도록 놔뒀다는 것. 오노다 히로(小野田寬郞·1923~2014·사진) 소위가 그 주인공입니다. 오노다 소위는 필리핀 루방 섬에서 끝까지 투항을 거부했던 인물입니다.
사실 오노다 소위가 루방 섬에서 숨어 지낸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습니다. 요코이는 먹거리가 떨어지자 농가를 습격해 먹거리를 약탈했고, 그 과정에서 필리핀 경찰 수색대와 여러 차례 총격전을 벌였습니다. 1972년 10월 19일 총격전 끝에 마지막까지 함께 지내던 고즈카 킨시치(小塚金七) 상병이 사망하면서 오노다 소위 혼자만 도망쳤습니다. 그러니 그가 이 섬에 숨어 있다는 걸 모를래야 모를 수 없던 겁니다.
스파이 양성 기관 나가노 학교 출신으로 영어와 중국어에 유창했던 오노다 소위. 그는 미군 부대에서 훔쳐 나온 라디오 덕에 일본이 패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노다 소위는 현재 일본에 있는 건 미국 괴뢰 정부이며 진짜 일본 정부는 만주로 망명했다고 믿었습니다. 친형과 아버지가 찾아와 투항을 권유했지만 괴뢰 정부에서 가족을 강제로 동원한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1950년 필리핀에서 미군기가 6·25전쟁 중인 한국으로 향하자 그는 자기 믿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다 마음을 바꾼 건 1974년 호세이 대학 중퇴생 스즈키 노리오(鈴木紀夫) 씨가 찾아오면서부터였습니다. 스즈키 씨는 이때 세계일주여행 중이었는데, 그의 목표 중 하나가 오노다 소위하고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루방 섬을 방문해 오노다 소위와 조우한 스즈키 씨는 그와 함께 지내며 전쟁은 이미 끝났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친절히 설명했습니다.
이때는 코즈카 상병이 숨지면서 오노다 소위 역시 외로움에 시달리던 상태였습니다. 그전까지 두 사람은 트랜지스터 라이오를 단파 수신기로 개조해 닛케이 라디오에서 나오는 중앙 경마 실황 중계를 들으며 내기하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고 합니다. 외로울수록 피로도 더욱 깊어지는 법.
결국, 투항으로 마음이 기운 오노다 소위는 “내게 끝까지 투항하라는 지시를 내린 상관이 찾아와 투항을 명하면 그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서점을 하고 있던 직속상관 다니구치 요시미(谷口義一) 소좌를 찾아냈고, 다니구치 소좌는 그해 3월 9일 오노다 소위를 만나 임무 해제와 귀국 명령을 내렸습니다.
명령을 받은 오노다 소위는 다 낡은 일본 군복을 깨끗이 손질해 입은 채 날이 시퍼렇게 서 있는 군도와 당장 발사할 수 있는 99식 소총, 실탄 500발과 수류탄을 가지고 필리핀 군 기지로 향했습니다. 물론 소총에 달린 총검은 조금도 녹슬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오노다 소위는 이 자리에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에게 군도를 내놓으며 정식으로 항복 신고를 했습니다. 오노다 소위는 루방 섬에서 숨어 살며 최소 30명을 사살했지만, 마르코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그를 사면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덴노 헤이카 반자이”
나흘 뒤 하네다 공항에 내렸을 때 모습도 오노다 소위는 쇼이치 중사하고 달랐습니다. 이번에는 일본인의 45.4%가 NHK 중계를 지켜보는 가운데 오노다 소위는 “덴노 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 만세)”라고 외치며 일본 땅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아버지 다니지로 씨는 아들이 필리핀으로 떠날 때 집에 두고 간 일본도를 건네주며 귀환을 환영했습니다.
일본 우익들은 “일본 정신, 즉 야마토다마시(大和魂)를 굳게 지킨 영웅”이라며 그를 추앙했습니다. 그러나 오노다 소위는 “전후 일본에서는 과거 일본적 가치들이 사라졌다”며 1975년 아내 마치에 씨와 함께 브라질 이민을 떠났습니다. 이때 그가 말했던 ‘일본적 가치’란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자기 절제였습니다.
브라질에서 목축업을 하던 그는 1984년 귀국했습니다. 귀국 이유는 “일본 사회에서 소년 범죄가 다발(多發)해 마음이 아팠다”는 것. 그는 “조국을 위해 건전한 일본인을 육성하겠다”며 오노다 자연숙이라는 젊은이 교육 캠프를 개설했습니다. 1996년에는 루방 섬을 방문해 ‘학교를 지으라’며 1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여기까지만 했어도 이해할 수 있었을 터. 오노다 소위는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 멤버로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습니다. 주요 활동 내역은 일본 정부의 위안부 책임 문제를 부정하고, 난징 대학살을 중국에서 조작했다고 주장하는 것. 전형적인 일본 ‘수꼴’이 됐던 겁니다.
오노다 소위는 1974년 귀국 때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친 다음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나의 신념에 바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한 사람 인생을 감히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그가 살아온 길을 보면 오히려 잘못 품은 신념이 한 사람 인생을 어떻게 망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닐까요?
마무리는 아내밖에 모르는 바보
1974년에는 일본군 패잔병이 또 한 명 나왔습니다.
주인공은 인도네시아 모로타이 섬 정글에서 숨어 살았던 나카무라 데루오(中村輝夫·1919~1979) 상병. 그해 12월 27일 세상에 나온 그는 창씨개명 전 리광후이(李光輝)라고 불리던 대만인(정확히는 아미족)이었습니다.
그도 일본행을 희망했지만, 일본과 대만이 다른 나라가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대만으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문제는 그사이 부인 마사코 씨가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는 것. 1975년 1월 아내의 재혼 소식을 들은 리 상병은 격노해 달리는 버스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부인과 다시 결혼해 사는 게 싫다고 했지만, 결국 그해 3월 7일 새 남편하고 이혼한 부인하고 합쳤습니다.
원문: kini’s crea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