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HK에서 방영한 〈경세제민의 남자(経世済民の男)〉는 일본 개화기 경제에 큰 영향력을 끼친 세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특집 드라마다. 메이지 초기의 대장성 관료이자 ‘일본의 케인즈’라고 불리는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清), 한큐 철도의 창업자이자 다카라즈카 극단을 창설한 고바야시 이치조(小林 一三), 일본의 전력왕으로 불리는 마츠나가 야스자에몬(松永安左エ門) 등 3명을 다루었다. 이 중 한 편의 주인공인 다카하시 고레키요 역에 오다기리 죠를 캐스팅해 조금 관심이 갔다.
하지만 나는 이 드라마의 제목을 보면서 드라마의 내용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 생각났다.
‘경제’란 말의 유래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경제(經濟)’라는 말은 동진(東晉)의 도사 갈홍(葛洪)이 쓴 도교 서적 『포박자(抱朴子)』에 나오는 ‘경세제민(経世済民)’이라는 문구에서 유래한 것이다. 풀어쓰자면 ‘세상을 다스려 백성들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물론 경세제민(経世済民)은 economy와는 뜻이 통하지 않는다.
economy의 한자어로 ‘경제’가 쓰이게 된 계기는 1862년 일본에서 출간된 영어사전에 ‘political economy’를 ‘경제학’으로 번역하면서부터다. 19세기 일본 학자들은 영어나 네덜란드어 서적을 번역하면서 당시 그 의미를 전할 수 없던 용어를 새로운 한자 조어로 만들어 번역했다. 이때 불교용어나 중국의 고전, 일본의 시조들에 나오는 문구에서 일부분을 따와서 새로운 말을 만들어냈다.
경제도 이렇게 만들어진 말 가운데 하나다. 그러니까 economy를 지칭하는 경제는 일본식 한자어다. 하지만 경제라는 단어를 일본인이 만들었다고 이걸 쓰지 말자고 하는 사람은 없다. 당장 경제를 대체할만한 단어도 없을 것이고, 굳이 바꿀 필요도 없다.
한자문화권에서 사용하고 있는 서양 유래의 용어들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 매우 많다. 자유, 간부, 사회, 회사, 과학, 철학, 복지, 우편, 야구, 관념, 혁명, 운동, 계급, 진화, 문명, 문화, 민족, 사상, 법률, 종교, 공간, 이론, 분자, 원자, 질량, 인민, 사회주의, 공산주의, 공화국… 이런 단어는 전부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이런 일본식 한자어는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일본에서 유학한 조선 및 중국인 유학생에 의해서 조선과 중국에도 전파됐다. 오늘날까지도 일본에서 만들어진 한자어들은 한국은 물론 중국에서도 널리 쓰인다. 그만큼 개화기 한자문화권에 일본이 끼친 영향력은 매우 크다.
모 신문사의 일본말 잔재에 관한 기사가 안타깝게 느껴졌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단어라고 해서 배척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인가? 물론 그런 취지는 어느 정도 이해한다. ‘쓰메끼리’를 ‘손톱깎이’로 써야 한다든가 ‘다마’를 ‘전구’나 ‘구슬’로 쓰자든가 하는 데는 동의한다. 하지만 너무 멀리 나아가려고 하는 건 순혈주의의 연장선으로 느껴질 따름이다.
‘신토불이’도 일본에서 왔다
이런 순혈주의의 좋은 예가 하나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농산물 개방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이 널리 쓰인 적이 있다. 사람과 땅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니 자기가 태어난 땅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의미의 말이다. 가수 배일호의 노래 〈신토불이〉도 크게 히트했다.
그런데 이 말은 일본식 조어다. 육군약제감이었던 ‘이시즈카 사겐’이라는 사람이 1907년부터 식양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전개했던 ‘식양운동’의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불교 법전에 나오는 문구에서 따와서 만든 조어였다. 한국은 1988년에 일본에서 출판된 하스미 다케노리(荷見武敬)의 『협동조합 지역사회의 길(協同組合地域社会への道)』이라는 책을 1989년 농협중앙회장이었던 한호선 씨가 번역하는 과정에서 처음 이 조어를 알게 되었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한창이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 우리 농산물을 지키자는 슬로건으로 이 조어를 채택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이후 신토불이가 일본식 조어라는 비판이 많아지자 농협에서는 중국의 고전을 뒤져서 이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 구절을 찾아내어 신토불이는 중국 고전에서 유래했다는 설명을 내놓았다.
우리 농산물을 먹자는 슬로건이 본래 일본에서 만들어진 말이라고 해서 비판을 받는 이유는 없다. 그것이 비판을 받는 것도 넌센스지만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어원을 가져와서 설명을 끼워 맞추던 것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설명을 지지하는 국립국어원의 태도도 넌센스였다. ‘신토불이’가 국어사전에 처음 등록된 것은 이 슬로건이 쓰이기 시작한 지 7년이나 지난 2006년의 일이다.
‘기원’에 대한 지나친 강박
더 재미있는 것은 이 신토불이가 일본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아는 사람이 적었다. 1990년대 중반 한국의 신토불이 운동이 일본에 소개되면서 일본인들도 신토불이라는 말을 접했다. 한국의 신토불이 운동이 임팩트가 강했기에 일본에서는 신토불이를 한국에서 수입된 용어로 알고 있는 사람이 지금도 적지 않다. 일본어판 위키피디아에는 이게 일본에서 만들어진 말이며 어원에 오해가 있음을 설명하는 항목이 따로 있을 정도다.
문화는 사람들의 교류를 통해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일본이 과거 백제 멸망 후 흘러들어온 유민에 의해 크게 변화했다든가, 임진왜란 시기에 조선에서 강제로 연행해 간 사람들에 의해서 문화적으로 큰 변혁을 겪었다는 것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에는 부끄럽게 여기거나 부정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식민지배에 대한 역사적 아픔이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받아들여야 하는 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보너스
일본에서 만들어진 대표적인 한자어를 소개한다.
형태 | 대표적인 단어 |
형용사+명사 | 인권(人権), 금고(金庫), 특권(特権), 표상(表像), 배경(背景), 화석(化石), 전선(戦線), 입장권(入場券), 하수도(下水道) 외 다수 |
부사+동사 | 독점(独占), 교류(交流), 고압(高圧), 특허(特許), 부정(否定), 표결(表決), 환송(歓送), 망상(妄想), 견습(見習) 외 다수 |
동의어 복합 | 해방(解放), 공급(供給), 설명(説明), 방법(方法), 공동(共同), 주의(主義), 계급(階級), 공개(公開), 공화(共和), 희망(希望), 법률(法律), 활동(活動), 명령(命令), 지식(知識), 종합(総合), 설교(説教), 교수(教授) 외 다수 |
동사+객어 | 단교(断交), 탈당(脱党), 동원(動員), 실종(失踪), 투표(投票), 휴전(休戦), 작전(作戦), 투자(投資), 투기(投機), 동의(動議), 처형(処刑) 외 다수 |
동사 | 복종(服従), 복습(復習), 분배(分配), 극복(克服), 지배(支配), 배합(配給) 외 다수 |
학술 용어 | 철학(哲学), 미학(美学), 심리학(心理学), 논리학(論理学), 민족학(民族学), 경제학(経済学), 재정학(財政学), 물리학(物理学), 위생학(衛生学), 해부학(解剖学), 병리학(病理学), 토목공학(土木工学), 건축학(建築学), 기계학(機械学), 부기(簿記), 연금(冶金), 원예(園芸), 화성학(和声学) 외 다수 |
번역 과정에서 중국 고전 문구를 인용해 만든 조어 | 문학(文学), 문화(文化), 문명(文明), 문법(文法), 분석(分析), 물리(物理), 연설(演説). 예술(芸術), 의결(議決), 구체(具体), 박사(博士), 보험(保険), 봉건(封建), 방면(方面), 법률(法律), 보장(保障), 표정(表情), 표상(表象), 의미(意味), 자유(自由), 주소(住所), 회계(会計), 계급(階級), 개조(改造), 혁명(革命), 환경(環境), 계획(計画), 경리(経理), 경제(経済), 권리(権利), 검토(検討), 기계(機械), 기회(機会), 기관(機関), 규칙(規則), 항의(抗議), 교제(交際), 교섭(交渉), 구조(構造), 교육(教育), 교수(教授), 공화(共和), 노동(労働), 유행(流行), 정치(政治), 사회(社会), 진보(進歩), 신용(信用), 지지(支持), 사상(思想), 자연(自然), 수단(手段), 주석(主席), 주식(主食), 운동(運動), 예산(予算), 유격(遊撃), 유일(唯一) 외 다수 |
번역 과정에서 의역한 조어 | 미술(美術), 미적분(微積分), 물질(物質), 조절(調整), 초단파(超短波), 전보(電報), 동맥경화(動脈硬化), 동산(動産), 부동산(不動産), 액체(液体), 현실(現実), 박해(迫害), 반대(反対), 반응(反応), 반사(反射), 교역(交易), 역사(歴史), 열차(列車), 영토(領土), 우익(右翼), 전시회(展覧会), 좌익(左翼), 체육(体育), 재단(財団), 투표(投票) 외 다수 |
-化 | 일원화(一元化), 다원화(多元化), 일반화(一般化), 공식화(公式化), 대중화(大衆化), 자동화(自動化), 현대화(現代化), 공업화(工業化), 기계화(機械化), 장기화(長期化) 외 다수 |
-式 | 문답식(問答式), 류동식(流動式), 간이식(簡易式), 방정식(方程式), 서양식(西洋式), 구식(旧式), 신식(新式) 외 다수 |
-炎 | 폐렴(肺炎), 위염(胃炎), 장염(腸炎), 관절염(関節炎), 뇌염(脳炎), 피부염(皮膚炎) 외 다수 |
-力 | 생산력(生産力), 소비력(消費力), 원동력(原動力), 노동력(労動力), 기억력(記憶力), 표현력(表現力), 지배력(支配力) 외 다수 |
-性 | 가능성(可能性), 현실성(現実性), 필연성(必然性), 우연성(偶然性), 주기성(周期性), 방사성(放射性), 습관성(習慣性), 전통성(伝統性), 필요성(必要性), 창조성(創造性) 외 다수 |
-的 | 역사적(歴史的), 대중적(大衆的), 민족적(民族的), 과학적(科学的), 자연적(自然的), 필연적(必然的), 우연적(偶然的), 상대적(相対的), 절대적(絶対的) 외 다수 |
-型 | 신형(新型), 대형(大型), 중형(中型), 소형(小型), 표준형(標準型) 외 다수 |
-感 | 호감(好感), 정감(情感), 우월감(優越感), 민감(敏感), 독후감(読後感), 위기감(危機感) 외 다수 |
-点 | 중점(重点), 요점(要点), 초점(焦点), 주의점(注意点), 관점(観点), 출발점(出発点), 종점(終点), 착안점(着眼点), 맹점(盲点) 외 다수 |
-観 | 주관(主観), 객관(客観), 비관(悲観), 낙관(楽観), 인생관(人生観), 세계관(世界観), 직관(直観) 외 다수 |
-線 | 직선(直線), 곡선(曲線), 생명선(生命線), 전선(戦線), 경계선(警戒線) 외 다수 |
-率 | 효율(効率), 생산율(生産率), 증가율(増長率), 사용률(使用率), 이율(利率) 외 다수 |
-法 | 변증법(弁証法), 귀납법(帰納法), 연역법(演繹法), 방법(方法), 헌법(憲法), 민법(民法), 형법(刑法) 외 다수 |
-度 | 진도(進度), 심도(深度), 강도(強度) 외 다수 |
-品 | 작품(作品), 식품(食品), 예술품(芸術品), 성품(成品), 폐품(廃品), 기념품(記念品) 외 다수 |
-者 | 작자(作者), 독자(読者), 역자(訳者), 노동자(労働者), 저자(著者) 외 다수 |
-作用 | 동화작용(同化作用), 심리작용(心理作用), 부작용(副作用) 외 다수 |
-問題 | 인구문제(人口問題), 토지문제(土地問題), 사회문제(社会問題), 민족문제(民族問題), 국제문제(国際問題) 외 다수 |
-時代 | 구석기시대(旧石器時代),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청동기시대(青銅器時代), 철기시대(鉄器時代) 외 다수 |
-社会 | 원시사회(原始社会), 봉건사회(封建社会), 자본주의사회(資本主義社会), 국제사회(国際社会) 외 다수 |
-主義 | 인문주의(人文主義), 인본주의(人本主義), 인도주의(人道主義), 자연주의(自然主義), 낭만주의(浪漫主義), 현실주의(現実主義), 허무주의(虚無主義), 봉건주의(封建主義), 자본주의(資本主義), 제국주의(帝国主義), 사회주의(社会主義), 공산주의(共産主義), 복고주의(復古主義) 외 다수 |
-階級 | 지주계급(地主階級), 자산계급(資産階級), 중산계급(中産階級), 농민계급(農民階級), 무산계급(無産階級) 외 다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