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어셈블리>에서 송윤아는 정치 컨설턴트였다. 서울대 운동권 출신인 여당 사무총장과 선후배 하는 사이니 학벌도 좋은 것 같다. 선거에 출마하려는 정치인들에게 전략과 이미지를 컨설팅해주고 지역구 맞춤형 정책도 개발한다. 실세의원 보좌관에 청와대 근무 경력까지 있으니 그야말로 A급 참모다.
그런데 송윤아는 빚에 쪼들린다. 여의도에 작은 사무실을 하나 냈는데 수백만 원의 월세 독촉에 시달린다. 겨우 전화 받는 여직원 한 명 을 고용했는데 월급 줄 걱정이 태산이다. 결국 대출금 미납 고지에 시달리던 그녀는 믿었던 공천마저 물을 먹자 사업을 접기로 결심한다.
드라마에서 송윤아는 우연히 진상필 의원을 만나 다시 보좌관이 되고 제갈공명 뺨치는 실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현실 속에선 어떻게 흘러갈까? 정치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정치평론가로 방송 출연을 기웃거리거나 인맥을 통해 어느 대학의 겸임교수 자리나 넘보는 게 고작이다. 그렇게 몇 년 힘든 삶을 살다 보면 어느새 아이디어도 고갈되고 등에는 ‘정치낭인’이란 꼬리표가 붙게 된다.
A급 참모도 정치낭인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
그게 우리나라 정치생태계의 현주소다. 어차피 정치란 게 다 그런 거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정치선진국이라는 미국을 보자. 선거에 이겨야 후불제로 돈을 받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우리와는 달리 미국은 캠페인 기간에도 따박따박 월급이 나온다.
2008년 미국 대선을 다룬 책 <게임체인지>를 보면 오바마와 힐러리 캠프는 미국 정치권에서 검증된 전략가와 여론조사, 홍보 전문가들을 고액 연봉을 주며 스카웃한다. 캠프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인턴들까지 다 자기 몫의 정당한 임금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막연히 “당선되면 챙겨주시겠지”하는 마음만으로 무임금 선거운동에 매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 그럴까? 후보들이 나쁜 놈이어서? 그렇지 않다. 법적인 제약이 있다. 선거자금의 상한선이 정해져 있고 후원금으로 모을 수 있는 액수도 한정된다. 당내 선거에 출마한 신인은 아예 후원회도 못 만들게 묶어놨다. 과거 검은돈으로 얼룩진 혼탁한 선거문화를 바꾸겠다며 고삐를 세게 죄어둔 탓이다.
하지만 이젠 바꿔야 할 때다. 돈으로 표를 사는 행위는 따로 처벌하면 된다. 준 사람뿐 아니라 받은 사람도 50배를 물어내야 하는 강력한 규정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 정치생태계에 깨끗한 돈이 돌 수 있도록 풀어줘야 하지 않을까?
세상에 공짜는 없다. 돈을 받지 않고 선거운동을 한 사람은 ‘자리’에 욕심을 낸다. 그런데 의원실에 데리고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인턴까지 포함해도 겨우 10명이 안 된다. 그러니 선거가 끝나면 챙겨줘야 할 ‘낙하산’이 늘어난다. 전문성 없는 낙하산은 공직사회에 부담만 될 뿐이다.
생태계를 바꿀 수 있다면, 정치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이제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직업정치인들이 정치로 먹고살 수 있게 해야 한다. 선거자금의 상한선을 풀고 기부금을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하면 된다. 오바마나 힐러리처럼 매력적인 비전을 제공하는 정치인들은 얼마든지 기부금을 걷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유능한 참모들이 합당한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기업은 2류, 관료는 3류, 정치는 4류라고 했던가? 당연하다. 정당한 대가를 제공하지 않는데 좋은 인재들이 모일 리가 없다. 정치를 1류로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송윤아 같은 직업정치인들이 빚에 쪼들리지 않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거다. 세상을 바꾸는 정치는 매력적인 직업이다. 정치생태계만 정상화된다면 제2, 제3의 송윤아가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다.
원문: 윤범기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