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펜 한자루 들고 홀로 무림강호에 나타났다. 그는 그동안 숱하게 많은 칼을 휘둘렀다. 그 칼에 다친 사람도 있고, 심지어 치명상을 입은 쪽도 있다. 그렇다고 누구를 눕히기 위한 글은 아니었다.
칼을 쓰는 무사(武士)에게는 두 가지만 있을 뿐이다. 서 있는 것과 눕는 것. 내가 서 있다면 상대를 베어 쓰러뜨린 것이고, 내가 누웠다면 진 것이다. 눕지 않고 서 있고자 용맹정진하는 자, 그들을 무사라 부른다.
문사(文士)에게는 글이 칼이다. 다만 그 쓰임새가 달라 서 있는 자와 누운 자로 구분되지 않을 뿐이다. 누웠으되 글이 살아 않고, 서 있으되 글은 죽기도 한다. 오로지 끈기와 결기의 글로 세상과 부딪히는 자, 우리는 그들을 문사라 부른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文士다. 글을 칼처럼 휘두른다는 점에서는 武士를 닮았다. 그의 칼끝은 대게 적을 향했다. 하지만 가끔(아니 자주) 아군을 향하기도 한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기 전, 그는 누구보다 김대중과 노무현 대통령의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대통령이 된 순간 그들도 강준만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얼마나 싸가지가 없었을까, 나도 안다”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진보 싸가지론’도 마찬가지다. 강준만 교수는 자신의 저서 <싸가지 없는 진보>에서 “‘싸가지 없는 진보’는 단기적으론 속된 말로 남는 장사”라면서 “단기적으로 남는 장사에 대한 집착, 이게 바로 진보가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굴레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주장했다.
즉각 반격을 받았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도 “(강준만 교수가) 상황을 좀 안일하게 보고 있는 듯하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진중권은 “진보의 가장 큰 문제는 사회에 던질 메시지가 없다는 것”이라며 “쉽게 말하면 싸가지가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싸가지가 있어도 그 좋은 싸가지로 대중에게 할 말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고 꼬집었다.
강준만 교수와 진중권 교수의 충돌이 처음은 아니다. 이른바 ‘강진논쟁(姜陳論爭)’. 2002년 서울시장 선거 당시 민주당 후보 김민석과 민주노동당 후보 이문옥 중 누가 더 후보로서 적절한가를 두고 벌인 논쟁이다. 얼마나 격렬했는지 두 사람의 성을 따서 아예 강진논쟁으로 불린다. 이후 둘은 갈라섰다(화해했다는 말을 듣지 못 했다). 그해 서울시장에는 이명박이 당선됐다.
얼마 전 <딴지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강준만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진보가 보수에 비해 싸가지가 없을 수밖에 없는데 아무리 겸손해도 독선적인 사람은 내가 정의인 거야. 저쪽은 정의가 아니에요. 파트너로써 겸손을 위장하지만, 독선이 막 여기서 나와. (…) 정말로 사람을 위한다면요. 내가 무릎을 꿇을 수도 있는 거고 얼마든지 양보할 수도 있고 타협할 수도 있는 거죠. 그 사람들한테 좋은 결과가 간다면. 우리 진보가 그런 식으로 하나요?”
그리고 인정한다. 자신도 예전에 그런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얼마나 싸가지가 없었을까. 싸가지 없어 봤던 놈이 싸가지 문제를 잘 압니다. 지금도 있겠죠. 지금도 있는데 ‘그건 안 되는 길이구나’하는 깨달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중요합니다.”
한국의 대표 논객, 태초에 강준만이 있었다
누가 뭐래도 그는 한국 사회를 대표하는 논객이다. 현실정치에 끊임없이 비판의 칼날을 겨누면서도 스스로 그곳에 몸을 담은 적은 없다. 오해도 많았다. 지방대 교수가 서울로 가기 위해(그는 여전히 전북대 교수로 있다), 정치판에 몸 담기 위해(한 번도 정당에 몸을 담은 적이 없다) 저런다고. 하지만 그는 그런 오해를 오로지 글쓰기로 불식시켰다. 그처럼 많은 글과 책을 쏟아내는 논객은 없다. 그의 유일한 단점은 ‘너무 자주, 많이 쓰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2013년 이후에만 단행본으로 출간된 책의 목록을 보자. <감정독재>(2013년 2월), <갑과 을의 나라>(2013년 5월), <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2013년 9월), <교양영어사전 2>(2003년 12월), <우리는 왜 이렇게 사는 걸까>(2014년 6월), <싸가지 없는 진보>(2014년 8월), <인문학은 언어에서 태어났다>(2014년 12월), <생각의 문법>(2015년 2월),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2015년 5월), <재미있는 영어 인문학 이야기1>(2015년 6월)… (다 챙겼나? 분명 빠진 책도 몇 권 있을 거다.)
1998년 5월 창간한 월간지(초기에는 계간지였다) <인물과 사상>은 지금도 계속 나오고 있다. 7월 호가 통권 207호였다. <인물과 사상>은 내로라하는 글쟁이들의 경연장이었다. 진중권과 그의 ‘앙숙’ 변희재도 한때 여기에 글을 썼다. 지난 7월호를 살짝 찾아보니 서민과 박홍규가 글을 썼다(물론 나머지 상당 부분의 분량은 지금도 강준만 교수 본인이 쓰고 있다).
본인도 자신이 정확히 몇 권의 책을 출간했는지 모른단다. ‘350쪽 이상의 단행본만 200여권 정도로 추정’될 뿐이다. 가히 ‘글공장’, ‘책공장’이라 불릴만하다. 그렇다면 글의 질이 떨어지지 않을까? 분명 빼어난 문장가는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쓰는 사람은 아니다. ‘강준만처럼 글쓰기’, ‘강준만학(學)’이라는 용어는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다. <인물과 사상>은 글쟁이들의 경연장이자 독서 애호가들의 ‘참고서’였으며 그의 책들을 보며 읽으며 ‘글쓰기 근육’을 키웠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스포츠 해설가이자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인 서형욱도 “<김대중 죽이기>나 <조선일보 공화국>, 그리고 그가 정기적으로 발행하던 계간지 <인물과 사상>은 새로운 깨달음과 다양성의 세계를 경험하게 해준 귀한 교본이었다”고 회고했다. 최근 왕성한 필력을 과시하고 있는 기생충 박사 서민 교수도 인터뷰에서 “강준만 교수의 책과 그 분이 펴내는 잡지를 읽고 책 읽기에 눈을 떠서 매달 4~5권은 책을 읽는다”고 말했다.
그에게 빚지지 않은 이가 얼마나 될까
나에게도 그는 세상을 보는 창이었다. <인물과 사상> 창간호부터 시작해 한동안 이 책을 정기구독하고, <김대중 이데올로기>, <김영삼 이데올로기>, <노무현과 자존심>, <역사는 커뮤니케이션이다>, <조선일보를 아십니까?>, <언론플레이>를 비롯해 그가 시리즈로 펴낸 <시사인물사전>, <미국사 산책>, <한국 근대사 산책>, <한국 현대사 산책> 등을 읽으며 세상을 보는 관점과 안목을 키웠다.
그리고 훌륭한 글쟁이들을 만나게 한 ‘뚜쟁이’였다. <인물과 사상> 필진이나 강준만과 같은 논객들의 글에 매료됐다. 진중권, 김규항, 홍세화, 유시민, 박홍규 등을 만난(읽게 된) 것도 강준만 교수 덕분이다.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찬반을 떠나 한국 사회를 파악하고 성찰하는 작업에서 그에게 빚지지 않은 이가 얼마나 될까.” <정희진처럼 읽기>의 저자 정희진의 말이다.
한동안 그의 책을 읽지 않았다. 그가 싫어진 것도, 그의 생각과 달라진 것도 아니다. 적당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지만 그것은 ‘피곤함’에 가까울 것 같다. 내가 언젠가부터 그의 책을 읽지 않는다고, 그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이나 역할이 줄었거나 의미가 퇴색됐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변절과 배반, 훼절과 배신이 판을 치는 시대에 누웠을 때도, 서 있을 때도 늘 한결같은 길을 걷는 그의 존재는 오히려 더욱 빛난다.
<딴지일보> 부편집장 ‘죽지않는 돌고래’의 말처럼 그는 게임의 룰을 바꾼 남자였다. 조선일보가 수십 년간 쌓아온 이데올로기를 단 몇 권의 책으로 흔들었고 무엇보다 ‘실명 비판’이 한국 사회에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를 ‘치어리더였다’고 말한다. 김대중, 노무현 집권 이데올로기를 완성하고 설파했다. 사람들은 치어리더에 환호했지만 응원한 팀을 비판하는 치어리더를 차갑게 외면했다. “대세의 방향은 정해져 있고 우리가 따르는 누군가 저기로 가는데 치어리더가 그쪽을 향해서 박수를 보내야 하는데 아니니까, 그런데 치어리더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아요.”
20년 전 펜 한 자루 들고 무림강호에 홀연히 혼자 나타난 그는 지금도 여전히 혼자다. 그동안 숱하게 많은 칼을 휘둘렀다. 그 칼에 다친 사람도 있고, 심지어 치명상을 입은 쪽도 있다. 그렇다고 누구를 눕히기 위한 글이 아니었다. 오히려 같이 서 있자고 휘두른 칼이다. 예리하지만 더 서슬 퍼렇게 날을 세운 것 같지도 않다.
책꽂이에 그의 책이 적지 않다. 한때 그가 휘두르던 보검을 탐냈으나 칼에도 주인이 있는 법이다. 보검은커녕 여전히 과일 깎는 칼이나 이렇게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렇더라도 어떤 것이 진정한 논객의 글인지를 내게 알려준 최초의 인물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원문: 책방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