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소풍이랍시고 오른 관악산을 비롯해 설악산, 지리산을 포함 여러 산에 올라가 본 바 있지만, 여전히 왜들 산에 올라가는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같이 오르던 다른 사람들에게 질문해봐도 뾰족한 대답은 없다.
사람들은 왜 산에 오르나
누구는 산이 자신을 깨끗하게 해주고 정신 집중을 하게 만든단다. 몸을 깨끗하게 하려면 목욕을 할 일이며, 생각을 정리하려면 조용히 일기를 쓸 일이지, 왜 하필 산이란 말인가. 누구는 운동을 위해서란다. 산은 오를 때는 운동이지만, 내려갈 때는 무릎에 심한 부담을 준다. 게다가 산에서는 다칠 일도 꽤 많다. 운동이라면 인라인이나 자전거를 타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공기가 좋아서라는 사람도 있다. 거기서 평생 살게 아니라면 몇 시간 좋은 공기 마시는 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게다가 그 공기 좋은 곳에 가기 위해서 내뿜어야 하는 매연을 생각해보면 이건 비용 대비 효과 비율이 매우 낮은 일이 아닌가. 경치 때문이라는 이유도 옹색하긴 마찬가지다. 꼭 산 속에 들어가야 좋은 경치를 볼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이런 저런 변명이 통하지 않으면 결국 1953년에 세계최초로 에베레스트산 꼭대기에 올라갔던 에드워드 힐러리의, “산이 거기 있으니까 올라간다”는 유명한 말이 튀어나온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보기에 이 말은 자기가 하는 짓에 결국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자백일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무의미해 보이는 등산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스포츠다.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 일부는 점점 상태가 심해져서 점점 더 험한 산을 찾아가고, 급기야 세계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산만 골라서 올라가는 지경에 이른다.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같은 산에 산소 호흡기 없이 올라가는 사람까지 등장한다.
심리학적으로 이런 증상을 ‘중독’이라고 부른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 행위 그 자체가 이유가 되어서 행동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중독은 어떻게 일어나는 걸까? 심리학적으로 중독에 이르는 과정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은 경험을 찾아가는 중독이다. 심리학자 솔로몬(Solomon)과 콜비트(Corbit)에 의하면 중독의 원인은 우리 감정의 양면성이다. 다시 말해, 공포에 떨어봐야 안도감을 느낄 수 있고, 고생을 해봐야 뿌듯함을, 고통을 겪어봐야 진정한 쾌감을 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될 수록 전후관계는 역전되어서 나중에는 고생을 하면서 뿌듯함을 느끼고, 고통을 당하는 그 순간부터 쾌감을 느끼게 되어버린다. 게다가 한쪽이 커지면 다른 쪽도 덩달아 커진다. 다시 말해서 고생을 지독하게 할수록 그 뒤에 오는 뿌듯함은 더 충만해 진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고생을 사서 하게 만들고 더 큰 고통을 찾아다니게 만드는 심리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세상에 이런 중독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경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어떤 경험으로부터 도망가는 중독도 있다. 일 중독, 알콜 중독, 약물 중독, 도박 중독, 도둑질 중독(도벽) 같은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삶의 공허함을 잊기 위해서 미친 듯이 일을 하고,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술을 마시고, 권태감을 잊기 위해서 사고를 치는 것이다.
똑같은 중독이라고 해도 이 둘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극한의 경험을 찾아가는 중독은 오히려 안전하다. 스카이다이버, 초음속 전투기 조종사, F1 레이서, 소방관, 무술가나 프로격투기 선수들이 여기에 속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평소에는 모두 점잖고 침착하다. 극한을 겪다 보니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쉽게 놀라지도 화내지도 않는다. 이들은 정상인들보다 훨씬 더 안정되어 있고 자제력도 대단하다.
반면에 도망치는 중독자들은 위험하다. 이들은 자기를 통제하지 못하고 계속 문제를 일으켜서 결국 자신과 주변사람들에게 큰 해를 입히고 만다. 일 중독자 치고 자기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지 않는 사람이 드물고, 알콜 중독이나 도박 중독자들 치고 자기 건강과 재정상태를 풍비박산 내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다시 말해서 이런 중독은 오래가지 못한다.
중독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주는 <남극일기>
그러면 프로 탐험가들은 어디에 속할까? 물론 그들 중에는 도망치기 위해서 위험한 곳을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미처 프로가 되기 전에 자제력을 잃어버리고 위험에 먹혀버리고 만다. 따라서 위험한 탐험을 계속할 수 있는 프로들은 결국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고 냉정하게 행동할 수 있는, 경험을 찾아가는 중독자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영화 <남극일기>는 애초부터 방향을 잘못 잡았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찾아가는 중독자들이 아니라 도망치는 중독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탐험대장 송강호는 자살한 아들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도달불능점에 집착하고, 막내 유지태는 부모 없이 자란 고독감을 잊기 위해서 탐험대에 합류한다. 나머지 대원들은… 도대체 뭐 어쩌자고 거기까지 따라왔는지 당췌 알 수가 없다.
이들 중 어느 누구에게서도 극한에의 도전이 주는 행복을 경험해 본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80여년 전 탐험대의 일기를 보고 고작 해낸다는 생각이 E-bay에 팔아먹는 거라면 말 다한 거다. 이런 구성원들로 짜여진 남극탐험팀은 만들어진 것 자체가 재앙이다. 이런 팀은 굳이 귀신을 만나지 않더라도 저절로 자멸할 수밖에 없단 말이다. 도대체 왜 이런 사태가 벌어진 건가.
미스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전개 자체가 극지탐험 중독에 대한 몰이해를 반영하는 것 같아 보여서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껄끄러웠다. 더구나 그 몰이해는 그 일부 탐험 중독자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인생에도 적용이 되기 때문에 더더욱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일들 대부분은 하지 않아도 되는 쓸데없는 짓들이 아니던가? 음악을 듣고, 소설을 읽고, 아무도 안 봐 줄 일기를 쓰고, 몇 달 후에 버릴 책이나 옷을 사고,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리플이나 남기고, 결국 헤어지고 말 사랑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서 수다를 떨다가 덧없이 흩어진다. 그 모든 일들을 굳이 꼭 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따지고 보면 문화라고 불리는 활동들은 거의 다 먹고사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 자체로 의미가 부여되는 것들인데, 그렇다면 문화는 결국 중독의 결과라 할 것이다.
어떤 중독은 우리 삶을 풍성하게 채워준다
문화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준다는 말에 동의한다면, 문화를 만들어내는 중독이 우리 삶을 풍성하게 채워준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중독의 이유를 고작 도망치려는 욕구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면, 이제 남는 건 뭐든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는 결론뿐이다. 열심히 한다는 것은 도망치는 중독에 깊이 빠져든다는 얘긴데 이렇게 될수록 점점 위험해지다가 결국에는 영화 <남극일기>속 탐험대원들처럼 미쳐버리고 말 테니까 말이다.
나는 여전히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이 마침내 산에 올랐을 때 느낌이 마치 내가 만족스런 글을 써 놓고 스스로 뿌듯해 하는 것과 비슷하리라는 추측은 한다. 영화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결국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을 어두컴컴한 곳에 끌어들여 놓고는 스크린을 멍하니 쳐다보며 두시간을 보내게 만드는 짓인데, 그런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라면 도달불능점을 정복하려는 남극탐험대에게 그 정도의 이해는 해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원문: 싸이코짱가의 쪽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