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에 커져만 가는 경제적 격차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인 걱정거리다. 주류든 비주류든 경제 정책을 연구하는 이들 사이에 ‘불평등 확대 경향’은 이미 의견이 아니라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이런 불평등을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기존에 나온 다양한 방법론을 더듬어보면, 대략 세 갈래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 번째로 ‘성장을 통해 불평등을 해소하자’는 길이다.
예를 들면 앵거스 디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위대한 탈출>(The Great Escape)이라는 책을 통해 ‘경제성장이 인류를 빈곤과 질병으로부터 탈출시켰다’는 요지의 주장을 펼쳤다. 성장 과정에서 일부 불평등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 불평등을 원동력으로 자본주의는 더 성장해 결국 평등을 이루고야 말았다는 게 그의 역사 해석이다. 장기적으로 전세계를 놓고 보면 절대빈곤은 분명히 줄어들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성장이 불평등을 완화할 것이라며 현재의 자본주의 성장 모델을 옹호한다.
불평등을 그대로 둬야 성장한다?
디턴 교수는 결국 자본주의가 성장을 불러왔고, 성장이 인류의 대부분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해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인류는 분명하게 빈곤과 궁핍으로부터 탈출하고 있다. 자본주의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다. 또한 질병 퇴치로 평균수명이 획기적으로 늘었다. 자본주의 이전 유럽인의 평균수명은 30~40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100살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경제성장으로 인류 전체의 영양 및 위생 상태가 나아졌기 때문이라고 디턴 교수는 해석한다.
이 모든 문제는 고대 로마의 황금기도, 귀족정도, 공화정도, 봉건사회도, 심지어 사회주의도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불평등하다고 비판하는 자본주의는 경제성장을 통해 그 어떤 시대보다 불평등을 줄이고 있다. 불평등을 성장 동력으로 번영과 동시에 평등한 시대를 이룩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디턴 교수는 개발도상국에 공적개발원조(ODA)를 제공하지 말고 불평등 상태를 그대로 두어야 스스로 성장할 힘을 얻게 된다고 주장한다. 불평등이 성장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턴 교수를 위시해 성장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이들의 이야기는 낡은 해법이고 현실성도 낮다.
사실 경제성장이 빈곤이나 질병 등 인류의 오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분명한 도움이 된다는 점을 부인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조지프 스티글리츠나 폴 크루그먼, 심지어 토마피케티조차 성장의 순기능을 중시한다. 피케티는 더 나아가 어느 정도의 불평등은 자본주의의 역동성을 위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견해를 밝힌다. 다만 자본주의의 역동성과 성장잠재력을 갉아먹는 정도까지 불평등이 커졌다는 점을 우려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장만으로는 불평등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증거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경제성장의 과실이 상위 계층에 떨어지면 낙수효과를 통해 사회 전체에 그 온기가 퍼진다는 논리를 믿는 이들은 이제 주류 경제학자나 기업가들 사이에도 거의 없다.
두 번째로는 ‘분배론’ 또는 ‘경제민주화론’을 들 수 있다.
한 경제에서 기업은 부가가치를 생산한다. 생산된 부가가치는 여러 군데로 분배된다. 노동자에게 임금으로 지급되고, 주주에게 배당 등으로 지급되고, 협력업체에 대금으로 지급된다. 이게 바로 1차 분배다.
장하성 고려대 교수는 저서 <한국 자본주의>를 통해 한국 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이 1차 분배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 장 교수는 ‘자본주의를 고쳐 쓰자’고 주장하면서 다른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대안을 내놓는 것보다, 당장 임금 불평등부터 해소하는 게 먼저라는 해법을 내놓는다.
한국 경제는 실제로 경제성장률은 선진국 가운데 상당히 높은 수준인데, 실질임금은 계속 정체 상태에 빠진 기묘한 상황에 놓여 있다. 그 원인 중 가장 중요하게는 국내총생산(GDP) 중 가계소득 비중과 노동소득분배율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장 교수는 이에 착안해 한국 경제의 가장 중요한 과제를 노동자에게 임금이 더 분배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 사이의 임금 격차를 해소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가 된다.
분배를 앞세우는 불평등 해법은 분명 현실성이 있고 정치적 폭발력도 있다. 공공 영역에서의 정책도 필요하겠지만 민간 영역의 기업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힘을 얻는 것이 매우 중요한 방법이다.
세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이 ‘재분배론’ 또는 ‘복지국가론’이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등 다양한 책을 통해 ‘재분배’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경제에서 생산된 부가가치를 임금 등으로 1차 지급하는 게 ‘1차 분배’라면, 재분배는 1차 분배를 마친 뒤 나머지를 국가가 세금 등의 방법으로 취한 다음 이를 필요한 곳에 다시 나누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복지’라고 부르는 정책이 바로 재분배 정책에 해당된다.
장하준 교수는 지금 우리 자본주의에 필요한 정책은 보편적 복지를 기본으로 한 복지 정책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또한 부자뿐 아니라 소득이 있는 대부분의 국민이 함께 부담하는 보편적 증세를 통해 그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고 본다.
재분배론의 해법은 분배론의 해법에 견줘 상대적으로 현실성은 낮다. 재정 부담을 크게 늘릴 가능성이 높아 증세론과 직접 연결되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도 가장 풀기 쉽지 않은 문제가 바로 세금을 올리는 것이다. 다만 이 이론대로만 진행된다면 문제해결도는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성장·분배·재분배 모두 필요하지만
물론 실제 불평등 문제를 현미경을 들고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장의 해법, 분배의 해법, 재분배의 해법 모두 필요한 구석이 있다.
한국 경제는 1차 분배 문제가 심각한 것만은 분명하다. 경제성장의 한 과실인 부가가치가 우선 그 생산에 기여한 이들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바로 1차 분배 문제다. 가계소득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떨어지고, 노동소득분배율이 계속 낮아지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를 해결하려면 특히 저임금 노동자에게 좀더 많은 임금이 지급되도록 하는 게 불평등을 개선하는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재분배를 통해 경쟁에서 미끄러진 이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마련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래야 위험을 감수하며 경쟁에 뛰어드는 이들이 생기고, 성장 동력이 마련된다(한겨레21 제1067호 ‘자본주의 적은 평등 아닌 불평등’ 참조). 이렇게 성장이 이뤄지면 재분배와 분배할 파이가 더 커진다.
하지만 이 방정식 바깥에 문제들이 있다.이 세 가지 문제해결책을 보완하는, ‘네 번째 해법’이 필요한 이유다.
예를 들면 기술의 놀라운 발전은 전체로서의 인류 능력을 점점 더 신장시키지만, 동시에 개인이 가진 생산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을 빠른 속도로 퇴화시키기도 한다.
타자는 전문직으로 취업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으로 취급받다가, 불과 10~20년 만에 누구나 할 수 있는 범용 기술로 변화했다. 컴퓨터로 문서를 작성하는 능력은 한때 자격증 취득 붐이 일 정도의 전문적 능력으로 여겨졌지만, 이제 누구도 돈을 받고 문서를 작성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3D 프린터가 나오고 로봇이 등장하고 의료, 법률, 기사 작성 등 고도의 지식노동까지 대체하는 알고리즘과 소프트웨어가 쏟아져나오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직업은 이런 기술 변화 앞에 사라지고 말것이며, 그 자리를 다시 새로운 직업들이 채우게 될 것이다.
변화 속 새로운 패러다임의 축 ‘공동체’
문제는 그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은 고용 자체가 어렵게 된다는 것이다. 현재의 노동자에게 충분한 임금을 지급하는 것만으로는 불평등 문제가 해결되기 어려운 이유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능력을 갖춘 소수와 그렇지 못한 다수를 양산하는 현재의 시스템이 이어진다면, 소수가 얻는 부는 점점 더 커지고 고용은 줄어들며 불평등은 더 커지기만 할 수도 있다. 고용된 이들의 임금을 좀더 높인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분배가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게 되는 대목이다.
여기서 들어와야 할 정책이 바로 평생학습, 직업교육 등 적극적인 노동시장 정책이다. 사람들이 새로운 능력을 갖추고 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또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복지 정책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매일매일의 노동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직업을 찾아갈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복지 정책은 전체 시스템을 설계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을 갖춘 이들, 즉 대기업과 자본소득자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자유롭게 배우며 새로운 직업을 습득하고 실험하는 현재 또는 잠재적 노동자에게 흘러들어가도록 하는 일이 될 것이다. 기본적 생존 및 학습과 관련된 복지를 보편화하는 노력은 이런 맥락에서 중요하다.
경제적 목적과 사회적 목적을 동시에 지닌, 새로운 패러다임의 경제적 기회를 만들어내는 노력도 필요하다. 최근 관심을 끌고있는 공유경제와 사회적 경제가 그런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수 있다.
공유경제는 자동차나 건물 등 자산을 새로 만들어내는 대신 기존의 것을 공유하고 활용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기업을 운영하는 방법을 뜻한다. 가정집의 숙박 공간을 인터넷상에서 숙박업으로 연결한다든지, 개인이나 기관이 보유한 자동차 정보를 인터넷에 올려 자동차 렌트업으로 연결하는 일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렇게 하면 충분한 서비스를 생산하면서도 실물 생산을 줄여 환경자원을 절약하고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게 기본적 아이디어다.
사회적 경제는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마을기업처럼 이윤이 아니라 다른 공동체적 목적을 가진 사업조직이 벌이는 경제활동을 뜻한다. 이런 사업이 늘어나면 기업이 잘 운영될수록 사회문제가 더 잘 해결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
이런 새로운 경제적 기회는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며 불평등을 줄이는 일을 사업의 목적에 포함한다. 현재의 산업생태계 구조는 이런 기회를 포괄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런 기회를 키울 수 있는 금융과 소비 시스템을 갖추는 일 역시 불평등을 해소하는 정책목표가 될 수 있다. 기존 경제 패러다임은 불평등을 키우면서 성장한 뒤 다른 정책으로 불평등을 해소해야 하는 구조이지만, 이런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한 조직이 성장에 기여하면서 동시에 불평등이 완화되는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패러다임이 새롭게 재조직되는 일일 것이다. 당장의 분배가 잘된다고 하더라도, 재분배가 더 잘된다고 하더라도,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방식의 성장 모델이 자리를 잡는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의 삶의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으면 문제는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다.
다른 모습의 ‘좋은 삶’을 정의하기
분배를 더 한다고 하더라도 소득이 무한정 늘어날 수는 없다. 획기적 재분배를 기획하더라도 국가재정 부담을 넘어설 수는 없다. 공유경제와 사회적 경제가 주류 경제 패러다임이 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최소한 그 기간 동안 우리는 낮은 성장률 아래서도 더 평등하며 지속 가능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개인들이 덜 쓰고 오래가는 삶을 기획하는 일, 소비를 키우는 것이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키우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 삶을 찾는 일, 새로운 환경에 맞게 ‘좋은 삶’을 다시 정의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필요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야 궁극적으로 불평등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 2015년 7월 27일치 <한겨레21> ‘이원재의 먹고사니즘’ 코너에 게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