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타임스의 Nick Bilton의 칼럼, “What Steve Jobs Taught Me About Being a Son and a Father“을 전문 번역한 글입니다.
두 달 전, 내 첫아들이 태어나자마자, 나는 내가 늦게 배운 삶의 교훈들 중에서 내 아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것들을 떠올려 봤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교훈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스티브 잡스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내가 내 어머니의 마지막 식사를 대접하는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었다.
이야기에서 잡스에 대한 부분은 2010년 10월 말 즈음의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스티브 잡스가 샌프란시스코의 포시즌스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나도 알고 있는 친구와 같이 있을 때였다. 친구의 말에 의하면 30대 중반 정도의 조심스러운 웨이트리스가 잡스와 자신에게 다가와 아침으로 뭘 드시겠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잡스는 갓 짜낸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싶다고 답했다.
몇 분 후, 웨이트리스는 큰 컵에 담긴 주스를 가지고 돌아왔다. 잡스는 주스를 아주 조금 마시더니, 그녀에게 간결한 어투로 음료가 갓 짜낸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주스를 되돌려보냈고, 다른 걸로 다시 가져달라고 요구했다.
몇 분 후, 웨이트리스는 또 다른 큰 컵에 담긴 주스를 가지고 돌아왔고, 이번엔 갓 짜낸 것을 가지고 돌아왔다. 잡스는 조금 마시더니, 그녀에게 공격적인 어투로 음료에 과육이 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 주스 또한 돌려보냈다.
내 친구는 자기가 잡스를 바라보며 “스티브, 왜 그런 나쁜 놈(jerk)이 되려고 하는 거요?”라고 물었다고 말했다.
잡스는 만약 여자가 웨이트리스를 자신의 천직으로 선택했다면, “그럼 그녀는 최선을 다해야 해.”라고 대답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는 잡스의 행동 때문에 바로 불쾌해졌다. 그는 —아침을 함께 먹은 내 친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쁜 놈이었다. 하지만 그의 무례함을 지나서 생각해보면 (아마 그가 나쁜 하루를 보냈던 게 아닐까?), 이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든 상관없이, 언제나 가능한 최선을 다해야만 할까?
물론, 이 질문은 직업이 그저 직업이기만 할 때 별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직업이 늘 천직인 것은 아니다. 특히나 직업으로 하는 일이 다른 이들에게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지 않다고 믿거나, 다른 사람의 삶에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믿을 때 이 질문의 의미는 더 없어져 버린다.
나도 안다. 나는 수년간 웨이터로 일했었다. 조리사(line cook)였던 적도 있다. 한 때는 뉴욕시의 패션 구역에서 원단들을 나르기도 했다. 헤어샵에서 여성들의 머리를 감겨주는 일을 한 적도 있다. 생일 축하 파티 캠프에서 일하기도 했는데, 일을 할 때면 커다란 털 많은 인형탈을 쓰고(안쪽은 냄새가 고약했다), 내 카드 기술을 그다지 재밌어하지 않는 아이들을 위해 마술을 하곤 했었다.
하지만 3월 중순쯤 내 어머니가 말기 암이라는 사실을 알고, 살 날이 앞으로 두 주밖에 남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기 전까진, 나는 심지어 직업이 그저 직업일 뿐이라도 여전히 다른 누군가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당신도 아마 그걸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내 어머니는 새우를 좋아했다. 어머니는 새우가 어디서 왔는지, 신선한지 냉동인지, 큰지 작은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머니는 지저분한 공항 카페에서든 별 다섯 개짜리 레스토랑에서든 신경 쓰지 않고 새우를 먹을 것이다. 그리고 새우를 먹고 나면, 언제나 큰 웃음을 지으며 당신의 우아한 영국 억양으로 “오, 이거 정말 맛있구나(Oh, that was just lovely).”라고 말했다.
내 어머니는 나에게 새우를 어떻게 요리하는지 가르쳐 준 사람이다. 그 외에도 모든 걸 가르쳐주셨다. (내가 정말 어릴 때, 어머니는 내가 부엌일을 도와주면 그릇에 남은 초콜릿 케이크 아이싱을 핥아 먹을 수 있게 해주셨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 생의 마지막 두 주간 어머니의 개인 셰프가 되기로 했다.
어머니가 조금씩 뜯어먹을 채소를 부탁했을 때, 나는 오이를 얇은 슬라이스로 세심하게 잘게 썰어, 화려한 사기 그릇 위에 절반씩 겹쳐서 올려두었다.
어머니가 피타(납작한 빵)와 후무스(병아리콩 소스)를 부탁했을 때, 나는 빵을 작은 삼각형 모양으로 완벽하게 자르고, 찬장에서 세련된 작은 보울을 찾아, 마치 Thomas Keller(옮긴이 주: 미국의 유명한 셰프)가 내 어깨 너머로 보고 있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세 가지 딥핑 소스를 담아냈다.
나는 자부심을 가지고 모든 식사를 어머니의 멋진 사기 그릇에 담아 대접했다. 음식이 담긴 사기 그릇은 다시 화려한 쟁반 위에 올려졌고, 식사의 마지막은 꽃 한 송이로 맺음을 했다. 나는 아주 작은 디테일까지 신경 써가며 메뉴를 준비했다. 내가 어머니의 침대맡으로 가져다주는 식사가 어머니의 마지막 식사가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치 어머니의 마음이 약해지는 것처럼 어머니의 식욕도 떨어져 가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부탁하는 식사는 점점 양이 적어져만 갔다. 접시에는 더 적은 오이 슬라이스가 담겼고, 딥핑 소스는 종류가 하나 줄었다. 그러다 어머니는 갑자기 먹는 걸 멈췄다. 어머니는 백차(white tea) 한 컵도 거의 마시질 못했다.
우리는 모두 끝이 가까워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밤, 어머니는 갑작스레 믿을 수 없을 만큼 활기차게 나를 불렀다. 어머니는 새우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알겠어요.” 나는 어머니에게 말하고 부엌으로 달려갔다. “금방 새우 가져다 드릴게요!”
문제는 새우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 처한 다른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포장음식을 주문하기로 했다. 잉글랜드의 리즈에 있는 어머니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몇 마일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별 특색 없는 타이 음식점 수코타이였다. 내 여동생이 주문을 했고,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르게 차를 몰고 음식점으로 향했다.
식당은 분주했다. 나는 뒤쪽의 오픈된 주방에서 10여 명의 남자와 여자들이 뜨거운 스토브와 식기세척기 사이로 정신없이 일하는 걸 볼 수 있었고, 그 주방으로는 버스보이(옮긴이 주: 식당에서 손님이 먹고 난 식기를 치우는 사람)와 웨이터가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내가 어머니를 위한 새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이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봤고, 몇 년 전 잡스가 웨이트리스에 대해 얘기했던 것을 떠올렸다. 비록 잡스의 무례함은 쓸모없는 것이었지만,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의미가 있었다.
그건 중요한 생각이다. 단순히 누군가 나에게 열심히 하길 기대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내가 내 아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처럼, 하는 일이 얼마나 사소한 것처럼 보이든 상관없이 그게 다른 누군가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대부분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감동시키는지 보지 못할 뿐이다.
분명 북잉글랜드의 작은 타이 음식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그 날 밤 일을 했을 때, 다른 누군가의 마지막 식사를 요리하는 영예를 가졌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내가 어머니의 방으로 가져가기 전에, 어머니의 부엌에서 테이크아웃 패키지의 포장을 벗겨내고, 조심스럽게 네 개의 새우를 박스에서 꺼내, 어머니의 화려한 사기 그릇에 올려놓은 식사였다. 그건 어머니가 의식을 잃고 작별의 인사도 없이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웃으며 당신의 우아한 영국 억양으로 “오, 이거 정말 맛있구나(Oh, that was just lovely).”라고 말했던 식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