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레이스 알렌, 그는 누구인가
호레이스 알렌은 구한말 조선에서 활동한 외국인 중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다. 그는 1858년생으로, 구한말의 여러 풍운아들과 비슷한 연배다. (김옥균 1851년생, 박영효 1861년생, 서재필 1864년생) 한편으로 조선에서 활동한 외국인 선교사들보다 약간 선배이기도 하다. (언더우드 1859년생, 아펜젤러 1858년생, 게일 1863년생 등)
그는 의료선교사로서 1884년에 조선에 입국했고,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민영익이 갑신정변 당시 서재필의 칼에 맞아 빈사상태에 빠졌을 때, 그를 구해주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서양 의술의 뛰어남을 몸으로 겪은 민영익을 설득하여 광혜원을 설립했고, 이 광혜원은 제중원으로, 제중원은 세브란스 병원으로, 세브란스 병원은 연세대학교로 진화했다.
백 년이 지난 지금 그의 이름을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기독교 계열 칼럼, 의학 칼럼, 연세대학교 동창회 신문 등에서 그의 이름이 보인다. 모두 그의 입국 초기 시절 의료선교활동에 대한 것들이다.
하지만 그가 조선에서 의료선교사로 보낸 기간은 불과 2년에 불과하며, 스스로가 선교사의 역할을 포기하고 이후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왕실의 고문이자 외교관, 사업가로서 구한말 역사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이 기간 동안의 행적 중 상당수는 우리나라의 여러 이권을 미국에 넘겼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
중국으로 먼저 갔던 알렌은 왜 조선으로 왔나
알렌은 선교사 자격으로 1883년,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 8월에 오하이오주 델라웨어를 출발해서 요코하마를 경유, 1883년 10월 17일에 청나라 남경의 애실리(Ashley)의 집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그는 소규모 의료업을 개시하면서 어학공부를 했다. 그러나 약 2개월 후(1884년 1월 7일), 그는 ‘애실리 씨의 불친절한 대우’ 때문에, ‘그의 간절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을 떠나 상해로 이동했다. (이 포스팅에서 작은따옴표는 알렌이 자신의 일기에 남긴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것이다.) 이 불친절한 대우의 실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개는 이런 표현을 쓰는 이유는 인간적인 트러블이 있었거나, 돈과 관련된 문제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상해로 옮겨간 알렌은 그곳에서 몇 개월을 거주했는데, 당시 부인이 출산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884년 9월 가족을 상해에 남겨둔 채 조선으로 건너왔다. 당시 조선은 선교가 허락된 나라가 아니었으므로 그는 선교사의 자격으로 입국할 수가 없었다. 그때 조선 공사인 푸트가 그를 ‘주조선 미국공사관 무급의사’로 임명하여 입국의 명분을 만들어줬다. 푸트의 입장에서는 조선에 서양 의학을 알고 있는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알렌이 입국하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다 못해 대사 본인이나 본인의 가족이 아플 때 치료를 받는 것이라도 말이다.
그런데 알렌이 왜 중국에서의 거주를 포기하고 조선으로 건너오기로 결심했을까. 위키백과였던가, 어떤 신문기사였던가? 알렌이 상해에서 어떤 선교사가 한, 조선에서는 새로 벌일 수 있는 사업이 많다는 말을 듣고 이주를 결심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알렌 본인은 자신의 이주 동기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알렌의 후일의 행적은 크게 두 가지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경향을 보인다. 하나는 세속적인 성취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과 대인관계의 트러블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좀 몹쓸 사람으로 묘사되는 느낌이 있는데;;; 일단 내 감상으로는 그는 그렇게 호감형 인간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그는 혼자 조선에서 두어 달간 활동하며 조선의 외교관이나 외국인들을 만났다. 당시 조선에 거주하던 외교관과 외국인들은 대부분 조선 정치에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묄렌도르프처럼 아예 조선 벼슬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러시아나 미국, 영국 등 각국의 대사는 임금인 고종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적당히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한 알렌은 10월 말에는 가족을 데려와서 본격적인 조선 거주를 시작했다.
절호의 기회, 갑신정변
조선에서 언어를 공부하면서 조선의 외국인들을 진료하는 의사로서 몇 달을 보내던 그에게 전기가 된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갑신정변이었다. 김옥균, 서재필 등 알렌 본인과 같은 세대인 조선의 풍운아들은 당시 조선 최고의 권력자이던 민영익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당시 민영익은 얼굴과 목, 등, 팔, 넓적다리, 무릎, 머리꼭지 등에 칼에 깊숙이 베인 상처들이 가득했다. 당시 조선의 의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알렌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알렌은 거의 밤새도록 민영익의 상처를 소독하고, 명주실로 봉합하고, 고무 붕대로 감싸는 등의 치료를 실시했다. 출처가 기억나지 않는 다른 기록에서는 한의들이 칼에 다친 상처에 송진이나 꿀 등으로 봉합을 시도하려는 것을 묄렌도르프가 권총으로 위협하여 물러나도록 하고 알렌이 서양의술을 적용했다고 한다. 한편, 이 부분과 관련된 기록이 우리나라 한의사들의 자존심을 많이 건드려, 한의사들은 이 상황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는 것 같다.
갑신정변은 대규모 전쟁으로는 발전하지 않았지만 소요 사태라는 표현은 충분히 쓸 수 있을 것 같다. 김옥균과 서재필이 병력을 이끌고 왕궁을 포위하고, 청국군이 혁명당을 공격하고,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교전을 벌이고, 성난 백성들이 혁명당을 공격하는 등의 어지러운 사건들이 짧은 시간 동안 이어졌다. 알렌은 일본군도 많이 죽었고, 청국인 100명, 조선인 100명이 희생되었다고 기록을 남겼다.
이 기간 동안 알렌의 의술은 빛을 발했다. 그는 조선 최고 권력자의 생명의 은인이 되었고, 당시 조선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던 청국의 군의관 역할도 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 최고의 권력자인 민영익의 신망을 얻었고, 여기에다가 조선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던 청국 대변인 묄렌도르프, 나아가서 조선의 국왕 등에게도 신망을 얻게 된다.
결국 알렌은 민영익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어 광혜원(제중원으로 개명)을 설립했고, 선교를 공식적으로 허가받기에 이른다. 이후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우리나라 근대사에 굵은 획을 그은 선교사들이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상 알렌이 민영익을 치료해주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당시 역사의 흐름상 민영익이 없었더라도 기독교는 어떻게든 공인되었을 것 같긴 하다. 때문에 우리나라 역사 차원에서 의미를 부여할 만한 사건이라기보다는, 알렌 본인에게 더욱 의미가 큰 사건이었다고 생각된다.
조선의 한 외국인 의사였던 그는, 이제 당대 최고 권력자들의 지근에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제중원을 짓다: 그런데 곧 떠넘기려 하다…
제중원이 개설된 것은 1885년 4월 10일이었다. 갑신정변의 역적인 홍영식의 가산을 몰수하고 그의 저택을 개조하여 병원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운영 책임을 알렌에게 맡겼다. 왕실의 병원인데 행정적인 소속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즉 오늘날의 외교통상부 산하에 있었다. (의료기관을 관할하는 행정기관이 외교부였다. 그것이 이 병원의 성격의 중요한 일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알렌이 일은 잘 벌여놓았으나 정작 그 병원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운영했는지는 의문이다. 그는 수십 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수술해가면서 병원을 운영했으나, 개원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병원 운영 전체를 다른 의료 선교인인 스크랜턴에게 맡기려고 시도했다.
당시 갑신정변 때문에 조선 파견이 예정되었던 선교사들이 몇 달가량 일본에서 발이 묶였다가 정국이 안정된 후에 입국했는데, 이들이 바로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튼 등이다. 알렌은 그 중 갓 입국한 스크랜튼에게 제중원 운영을 맡기려고 했다. 입국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사람에게 제중원 전체를 맡기려고 한 것은 떠넘긴다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알렌 본인이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알렌의 일기에는 스크랜턴이 제물포로 가서 연락을 끊어버렸고, 그가 조선 정부에 공식으로 병원 운영을 넘기겠다고도 했으나 정부에서 역시 응답이 없어 병원 운영을 넘기지 못했다고 남아있다.
한 달 후 알렌은 다시 스크랜턴, 헤론 등과 언쟁을 벌인다. 스크랜턴은 병원 사업이 순수한 선교 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선교 본부에서 자신에게 이 일을 맡길 리 없다고 주장했고, 알렌은 당시 주조선 미국공사 대리인 포크까지 동원하여 그에게 다시 병원 일을 맡기려고 했다. 그러나 스크랜턴이 본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서 논의는 결렬되었다.
앞뒤 상황으로 봐서 스크랜턴은 처음부터 알렌이 맡기는 일을 할 생각이 없었고, 제물포로 갔다는 것도 귀찮아서 잠수 탄 상황으로 보인다. 알렌의 병원이 순수한 선교 사업이 아니라고 말한 부분도 인상적이다. 병원 운영 자체는 기독교 선교의 중요한 수단이다. 알렌의 병원이 일반적인 기독교 선교 병원과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병원 개설 석 달 무렵에 알렌은 이상한 제의 하나를 받는다. 독일인으로서 청나라의 세력을 업고 조선의 고관으로 일하던 묄렌도르프가, 알렌에게 의료 선교사업을 중단하고 자신의 해관 소속 의사(customs surgeon)가 되어 묄렌도르프의 주관하에 병원을 운영한다면 연 5,000달러의 봉급을 주겠다고 제의한 것이다. 일종의 현대적인 인수합병 제안으로 느껴지는 제안이었는데, 이때 묄렌도르프는 제중원이 알렌의 개인 소유물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런 거래가 가능하다고 했다.
분명 제중원은 왕실 소유였는데 묄렌도르프는 이 병원이 마치 알렌의 소유물인 것처럼 언급을 했고, 알렌도 이에 대해서 특별히 부인하지 않았다. 이런 소유권의 애매함은 이후 서재필의 독립신문사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나타난다. 분명 왕실의 돈으로 만든 왕실 소유물인데, 실제 운영자는 자신의 개인 소유물처럼 인식하는 상황 말이다. 제중원은 확실히 조선 왕실의 소유물임에도 불구하고 운영에서 실질적으로 발생하는 손익의 상당 부분이 운영자인 알렌 개인에게 귀속될 수 있었던 상황, 즉 알렌의 개인 수익 사업과 비슷한 형태로 운영되었던 상황을 지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알렌은 묄렌도르프의 인수 제안을 거절했는데, 당시 묄렌도르프의 의도나 정치적 입지 등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다른 까닭은 없었다.
알렌의 성깔, 그리고 ‘딴생각’
9월, 알렌은 그를 조력하여 제중원을 운영하던 헤론 박사와 다툼을 벌인다. 그의 일기에 적혀있는 상황을 그의 표현을 이용해서 재현해보자면…
알렌 : (아주 친절하게) 이보시오, 헤론! 병원 일을 도울 필요가 없을 때는 집에 머물러 있으시오. 그리고 선교 본부에서 촉구했듯이 조선어를 열심히 공부해두시오.
헤론 : 당신이 뭔데 내게 이래라 저래라요?[이렇게 시작된 논쟁이…]
알렌 : ㅆㅂ 당신 하인이 우리 얼음 물병에 들어있는 얼음 다 처먹어놓고 왜 물병에다 안 채워놓는 거요?
헤론 : ㅆㅂ 난 당신 같은 사람하고는 말도 안 할 거요!
알렌 : ㅆㅂ 좋아, 그럼 내가 선교사를 때려치우겠소. 그러면 되겠지?
헤론 부인 : 당신은 원래 선교사에 마땅한 인물이 아니었어요. 우리 남편 핑계로 선교사 때려치우고, 원래 하고 싶던 돈벌이의 세계로 본격적으로 나선다는 거죠?
이건 말 그대로 초딩들의 싸움이다. 아주 사소한 시비로 시작되어, 하인들이 물병에 물을 다 마신다는 둥 사소한 트집을 잡아가다가, 마침내 속에 쌓아뒀던 말을 꺼내는 상황까지 간 것이다.
헤론 부인이 알렌에게 돈벌이의 세계로 본격적으로 나선다고 공격했는데, 그것은 아마 개인적인 공격으로 끝나지 않았었던 듯하다. 그들은 총회에도 자신의 입장을 소명하는 편지/보고서를 계속 보냈다. 조그만 조선의 외국인 사회 안에서 반복해서 소문이 퍼지고 언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알렌은 일기장에 ‘뉴욕의 선교 본부에 부산에 가서 새로 선교사업을 개척하겠으니 전근 시켜달라’는 요청을 했는데, 이렇게 요청한 이유는 ‘자신이 돈벌이보다는 선교사업에 더 열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그리고 현재 직면한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고 썼다.
그는 부산에 가서 새로 선교사업을 개척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 이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대체 무엇을 하고 싶었나
그렇다면 이 무렵의 알렌은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일기장 어디에도 자신이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쓴 적은 없지만, 돈에 대해서 남들보다 꽤 예민하게 느꼈던 것 같다. 그의 일기에서 1884년부터 1885년 사이에 돈에 대해서 여러 가지의 기록을 남겼는데, 대표적으로 추려보면 이런 식이다.
1884년
- 집 계약 완료 45만냥, 365달러
- 중국인 청지기: 월급 15달러
- 일본인 요리사 와타나비: 월급 10달러
- 집 수리 기간동안 조선호텔 숙박비: 하루 1.5달러
- 알콜 중독자 핼리팩스를 위한 식량과 땔감: 60달러
1885년
- 민영익이 우정의 표시로 지불한 돈: 10만냥
- 무명옷 한 벌: 12원 50전
- 닭고기 한 마리: 20센트, 생선값은 닭고기와 같음
- 두 그릇 분의 쇠고기: 10센트.
- 하루 한 칸의 방을 데우기 위한 말 한 마리의 나뭇바리: 30센트
- 하룻밤 집 한 채 난방비: 1달러
- 민영익에 대한 의료비: 100달러 청구(나머지는 의료봉사)
- 청국 병사에 대한 진료비: 215달러 청구
- 일본 공사관 의사로서 의료활동: 연 500달러 받기로 함
- 묄렌도르프와 체결한 해관총세무사부 의사: 연 720달러 받기로 함
- 데니 판사를 고종의 외교 고문관으로 부임: 연봉 7,000달러 예상
- 조선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교사 3명, 농업 전문가 1명 고빙: 월급 160 달러
일기장에 이 정도로 상세하게 돈에 대해 쓰는 것으로 봐서, 그가 돈에 예민함을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0월 4일의 일기에 그는 영국 영사관과 외과의사 고빙 계약을 맺었고, 또한 청국과도 이와 같은 계약을 맺었다고 썼다. 그는 이전에 이미 일본 대사관 및 묄렌도르프와도 유사한 계약을 맺었다. 말하자면 해당 대사관 및 세관 직원들에 대한 주치의 계약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이러한 계약에 의하여 10월 4일 그는 ‘2,695달러에 이르는 돈을 벌었다’고 기록을 남겼다.
일단은 이 돈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보자. 당시 푸트 공사 등 조선에서 일하는 미국 공사의 공식 봉급은 월급으로 100달러 정도, 연봉으로는 1,200달러였다. 조선에서 미국식 생활을 영위하기에 넉넉한 봉급은 아니었다고는 하는데, 일반적인 서민들에게 작은 돈은 아니었다. 알렌이 청국에서 데려온 청지기나 일본에서 데려온 요리사의 월급은 10~15달러 정도였다. 그러니 2,695달러는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돈이다.
그런데 그가 일기에 남긴 돈은 3,000달러도 아니고 2,500달러도 아닌 2,695 달러다. 어지간히 꼼꼼히 돈을 관리하지 않는다면 정확히 셀 수 없는 액수다. 원래 돈 관리 안 하던 사람도 해외의 전혀 다른 물가 속에서 살게 되면 돈 관리에도 긴장하기 마련인데, 알렌의 경우는 그 정도로 설명하기에는 조금 도를 넘어선다.
이미 조선에 도착한 지 1년이 되는 동안 얼마를 쓰고 얼마를 벌었는지를 기록하고 1달러 단위로 집계한 것은 그가 돈에 대해 여간 꼼꼼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심지어는 수입이 고정적인 직장인이라고 해도 자신의 작년 연봉을 만원 단위까지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계약서에 적힌 연봉이야 기억한다고 치더라도, 실제 보너스, 세금, 급여 외 소득 등 실질적인 순수입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적을 것이다. 이래저래 계속해서 전속 의사 계약을 맺으면서,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를 날마다 꼼꼼히 세고, 그래서 모은 돈을 보며 스스로 뿌듯하고 대견해 하는 듯한 모습이 느껴지는 일기의 한 구절이다.
그가 돈에 눈이 멀어서 앞뒤를 가리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제중원을 얼마나 성실하게 운영했는지와는 별도로, 알렌은 제중원에 부설된 의학교를 건설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포크 대리공사는 그의 이 과업을 그다지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지지하다가, 교수진이 아직 미국에서 초빙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대며 반대했었다고 한다. (어딘지 반대를 위한 반대고, 실제로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데 고종이 그의 계획을 전해 듣고는 학교 설립을 적극 추진하도록 포크 대리공사에게 요청했다고 한다. 미국 공사 입장에서는 고종의 요청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제중원 의학당은 이렇게 해서 이듬해 4월에 개교한다. 교수는 알렌 이외에 언더우드 목사와 헤론 박사 세 사람이고, 학생은 양반계층에서 열여섯 명을 뽑았다.
그런데 알렌 본인도 일기에 남겨두었듯이, 이 세 사람의 관계가 그다지 원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알렌은 당시 불편한 회의를 가진 끝에 그들에게 언더우드는 위선자이자 수다쟁이(a hypocrite and a tattler), 헤론은 잘 토라지는 샘꾼(pouting envious man)이라고 비판했다. 사실 서른 먹은 남자들이 대화를 하다가 상대방을 저렇게 표현했다면, 그건 인간적인 신뢰가 바닥을 친 상황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다시 화해를 하고 잘 지냈다고는 하지만, 이후로도 헤론과는 썩 잘 지낸 것 같지 않다. 여전히 그의 일기 곳곳에는 헤론에 대한 비난이 들어있다. 포크 대리공사가 알렌의 의학교 설립에 반대했던 것도 이와 같은 조선 내 외국인들 간 불화 문제에 개입하기 싫어서는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9월 5일, 마침내 알렌은 헤론과 헤어지게 된다. 당시 일기에 남아있는 상황으로는, ‘헤론 박사 부처는 조선의 대군주가 주최한 연회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대군주를 알현하지 못해서 심사가 언짢은 상태로 비기독교적인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그는 시기심이 너무 강했고, 결국 알렌은 헤론과 헤어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날 일기에서, ‘서울에 있는 여러 외국인들은 알렌이 만약 선교회 일에서 손을 뗀다면 그를 도와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선교에서 사업의 길로
알렌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려는 의도를 가진 문헌들(그러니까 기독교 계열, 연세대학교 관련 문헌, 그리고 알렌이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외국으로 보는 역사학자 등)은 알렌이 선교사로서의 활동을 그만두게 된 직접적인 이유를 “선교사 내부의 인간적 갈등에 환멸을 느껴서”라고 표현하고 있다.
모든 역사 속 등장인물을 어린이 위인전기 등장인물로 만들어버리는 풍조가 참 아쉬운데, 당시 그가 환멸을 느꼈다는 표현은 다른 사람들 간에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음모와 암투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당시 그와 갈등을 겪던 대표적인 인물들인 헤론, 스크랜튼, 언더우드 등은 모두 각각 구한말 우리나라에 작지 않은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이다.
사실 조직 내 인간관계는 작은 문제는 아니라서, 멀쩡한 직장인들이 인간관계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기도 한다. 하지만 직장인과 선교사는 아무래도 다르다. 직장인이야 월급을 위해 살지만 선교사는 신을 위해 사는 사람인데, 선교사 간 인간관계의 문제 때문에 아예 선교사로서의 신분을 버린다는 것은 좀 궁색하다.
그리고 알렌의 문제가 정말로 인간적인 갈등이었을까. 그는 인간적인 불화를 끊임없이 만들었는데, 그것은 청나라에서도 그랬고 후일 미국 대사로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선교를 그만둔 것은 인간적인 갈등 때문이 아니라, 하고 싶었던 일을 하기 위해서라고 보는 것이 더 맞을 듯하다. 그는 여러 차례 이런 결심을 실행으로 옮기기 위해 간을 봐왔고, 괜찮다고 생각되는 시점에 마침내 선교사로서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던 것이다.
선교를 그만두면서 그가 하고 싶었던 것은 현실 정치의 세계다. 좋게 말하면 외교와 개척의 세계, 조금 비꼬아서 나쁘게 말하면 돈과 권력의 달콤한 세계다. 1886년 9월 11일, 그는 아래와 같은 일기를 남겼다.
데니 고문관에 대한 조선인의 불신감 때문에, 그리고 딘스모어가 새로 주한 미국공사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포크가 조선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이제 내가 서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외국인이 되었다. 국왕은 국정의 모든 문제를 나와 협의하면서 언제나 내 충고를 채택하곤 했다. 나는 아메리카 무역상사를 위해 금광채굴권을 획득하였고, 나는 일당 250달러를 지급받았으나 일부는 거절하고 말았다.
이 한 줄의 일기에는 진한 개인적인 감동과 성취감이 녹아있다.
그는 선교를 위해 가족을 데리고 북경으로 들어갔으나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약 1년 후 조선으로 왔고, 조선에서는 다행히 뛰어난 의사로서 권력의 핵심층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의사나 선교사보다 더 큰 꿈, 조선의 현실적인 권력의 정점에 서기 위해, 그리고 그에 따르는 부를 얻기 위해 그는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차 포크 대리공사의 출국과 함께 마침내 조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외국인이 되는 것에 성공했다는, 스스로를 뿌듯하게 여기는 성취감과 함께 알렌의 일기 1부는 끝이 난다.
출처: 찬별은 초식동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