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의 귀환
음식이나 식재료의 사용을 두고,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는 식으로 선악을 판단할 수는 없다. 문제는 양이지 음식이나 성분 자체가 아니다. 예를 들어, 과잉의 설탕이 해롭긴 한데, 얼마만큼이 과잉인지 정할 때는 논란이 많다. 설탕 자체가 안전역이 넓다. 대부분의 비타민은 설탕만큼 안전역이 넓지 않다. 양으로 치면 과잉의 설탕보다 과잉의 비타민이 훨씬 해롭다. 과학적으로는 설탕은 나쁘고, 비타민은 좋다고 말할 만한 근거가 없다.
사회적으로는 얼마든지 선 긋기가 가능하다. 위계질서를 따지는 가정 내에서는 음식의 선악이 존재한다. 가족이 함께하는 식사는 사회적이다. 혼자 먹을 때 음식의 선택은 개인적이지만, 여럿이 함께 식사할 때 메뉴는 사회적으로 정해진다.
집밥에서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은 별 의미가 없다. (‘집에서 먹으면 집밥’이라는 단순 논리에 따를 경우, 배달시킨 짜장면을 집에서 먹어도 집밥이 된다.) 가족 구성원 간의 상호관계가 중요하다. 과학적 사실에 관계없이 가정에서는 음식의 선악을 논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우리 집밥’이 제일 맛있다는 것은 ‘우리 가족’이라는 사회의 기준에 따른 판단이다. 인류학자 시드니 민츠의 설명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어떤 식품을 선호하는가를 비교문화적으로 연구해 보면 인간 집단들이 평범하게 자신들의 “자연적인 환경”이라고 생각하는 우주는 분명히 사회적이며, 상징적으로 건설된 우주라는 것이 너무나 확연하게 드러나게 된다. “좋은 음식”이라고 하는 것도 좋은 날씨, 좋은 배우자, 만족스러운 생활 따위와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문제이지 생물학적인 문제가 아니다.
많은 가정에서 이제껏 설탕은 나쁜 음식이었다. 사회적 관점에서 그러했다. 설탕이 해롭다니 다른 데서 단맛을 찾았다. 2년 전 신문기사를 봐도 가정용 설탕 판매량은 줄고 있었고, 올리고당, 꿀, 메이플시럽 등의 대체 감미료 판매량은 늘고 있었다. 가정에서 직접 소비하는 설탕의 양은 줄고, 산업에서 소비하는 설탕의 양은 늘어났다.
82년 신문기사를 검색해보면, 1인당 설탕의 소비량이 연간 9kg으로 줄어드는 추세라고 나오지만, 2011~13년 통계를 보면 1인당 설탕 소비량은 25.6kg으로 증가했다. 설탕 소비가 이렇게 늘어난 이유는 가공식품과 바깥에서 사먹는 음식 소비량이 증가하여 간접적으로 섭취하는 부분이 커졌기 때문이다.
식사의 전통적 개념은 사라지고 있다. 1인 가구에서는 물론이고, 다인 가구에서도 동시에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하기 힘들다. 식사는 사회적 의미를 상실하고 철저히 개인화되었다. 먹방, 쿡방이 대세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내 최초의 ‘1인 가구 먹방 드라마’라는 <식샤를 합시다>는 집에서 먹는 일이 개인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백종원은 집에서 금기시 또는 절제하던 설탕을 집밥의 영역으로 끌어왔다. 가정에서 설탕 소비가 다시 늘어나고 있다.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지만, 지마켓에서 지난달 설탕 판매량이 4배 이상 증가했다는 기사를 통해 미루어 보건대 그렇다. 백종원 개인의 힘으로 끌어낸 변화라고 보기 어렵다. 집밥이 혼자 먹는 밥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음식 판단의 기준이 가정에서 개인으로 변한 것이다. 덧붙인다면, 설탕이 무조건 나쁘다는 식의 비판이 잘못된 주장임을 대중이 직시하기 시작한 것도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좋은 음식’은 사회적인 기준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백종원을 탓해봤자 부질없는 일이다. 그를 ‘슈가보이’라고 비난하면 사람들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대한 부당한 개입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일부는 팬덤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댓글에 “주관적”이라는 단어가 자주 눈에 띄는 걸 보면 전문가 또는 사회적 권위가 자신의 권리를 침범하는 것에 대해 분노한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황교익 평론가는 자신이 백종원의 음식을 두고 맛없다는 이야기를 해서 대중이 화를 내는 것이라고 썼다. 이어 그는 백종원이 대체엄마라는 무리한 주장을 폈으며, 한 술 더 떠 종이접기 아저씨 김영만은 대체아빠라는 식으로 계속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그런 논리라면 무한도전 토토가는 대체 무엇을 대체한단 말인가?
사람들은 과거를 그리워한다. 종이접기 아저씨의 등장은 무한도전 토토가와 마찬가지로 복고의 유행일 뿐이다. 종이접기 아저씨는 과거, 백종원의 인기는 현재의 일이다. 그 둘을 연결지어 풀이하는 것은 자신이 던진 무리수를 합리화해보려는 시도로만 느껴진다. ‘백종원’의 음식을 두고 “맛없다” 해서 화가 난 게 아니다. 어린 너희들의 판단은 틀리고 내가 맞다는 식의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염증을 느끼는 거다.
논의와 비판에 성역은 없다. 백종원을 비판할 수도 있고, 당연히 그 비판을 또 비판할 수도 있다. 자신의 평론을 비판적으로 평했다고 해서 기레기라고 칭하는 것은 감정적이며 권위적이다. 백종원은 백선생이 아니라 백주부로 떴다. 백선생은 방송이 붙여준 이름이다. 그가 인기를 얻은 이유는 선생의 권위가 아니라 주부의 친근함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권위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백종원에게 불편해하는 것은 그런 면에서 당연한 일이다.
조선일보에 실린 박은주의 칼럼 “백종원이 ‘집밥 선생’? 무슨 그런 농담을“은 백종원이 결국 외식업체 대표이며, 방송을 통해 자신의 업체를 간접적으로 홍보하는 것이라고 평했다. 타당한 비평이며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하지만 글의 어조는 지나치게 권위적이다. 박은주의 칼럼은 “나 우리 애들 그렇게 안 해멕였다!”는 말로 끝맺는다. 자신이 선생이며 대중을 어린 학생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딱 나올 만한 이야기다. 이런 박은주의 글에 황교익 평론가는 박수 갈채를 보냈다.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면 진정한 언론인, 반대하면 기레기인 셈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둥글어서 왼편 끝과 오른편 끝이 서로 이어져 있음이 분명하다.
음식의 판단 기준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적이며, 사회와 함께 변한다. 절대자의 관점에서 음식과 그 문화를 논하느니 차라리 소설을 쓰는 게 낫다.
원문: 쿠키보어의 연습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