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속 드라큘라 (1)」에서 이어집니다.
5. 블라드 드라큘라의 어린 시절
블라드 드라큘라는 어떤 의미에서든 간에 15세기 역사에서 주역급 인물이라곤 할 수 없다. 사실 왈라키아의 궁정에서는 역사상의 기록을 별로 남기지 않았고, 그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은 동시대의 유럽과 오스만 양측에서 타인이 기록한 것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누가 어떻게 기록했는지에 대해서 천차만별이다. 더구나 그에 대해서 중요한 몇몇 내용은 기록이 누락되어 있기도 하다.
그의 탄생을 둘러싼 이야기도 그러한데, 정확한 생일은 확실치 않다. 다만 출생 시기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의 아버지가 용기사단에 입단한 1431년이고, 탄생 장소는 트란실바니아의 시기쇼아라였다. 시기쇼아라는 블라드 드라큘(블라드 2세, 드라큘라의 아버지)의 망명 정권의 본부 같은 장소로 당시에는 매우 잘 요새화된 성이 존재했다.
블라드 2세는 적어도 1435년까지 여기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고 당연히 그의 어린 아들인 미르세아(Mircea, 1428년에 태어난 블라드 드라큘라의 형), 블라드(블라드 드라큘라), 라두(Radu the handsome, 라두 미남공, 1435년생)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장남인 미르세아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다. 사실 블라드와 라두의 어머니 역시 분명치 않은 부분이 있는데, 가장 가능성있는 사람은 몰다비아 공작 알렉산드루(Alexander the Good, 혹은 Alexander I of Moldavia)의 딸인 크네아즈나 공주(Princess Cneajna of Moldavia)일 가능성이 높다. 이 시기 블라드 2세가 알렉산드루 1세의 사위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다만 블라드 2세는 다른 첩들도 있었기 때문에 약간 명확하지 않은 부분도 존재한다.
아무튼 시기쇼아라 시절은 1436년 블라드 2세가 형의 뒤를 이어 왈라키아 공이 되면서 마무리하게 된다. 발칸 반도는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사실 블라드 2세가 즉위했던 그 시점이 이 명칭에 딱 맞는 시절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무라드 2세는 세르비아를 야금야금 집어먹으면서 사실상 헝가리 왕국의 남쪽 국경과 왈라키아의 남쪽 국경까지 도달했다.
이 시점에서 헝가리 왕국은(앞서 이야기했듯이 당시의 헝가리 왕국은 크로아티아와 루마니아 일부 등을 포함해서 지금보다 훨씬 큰 국가였다) 당연히 오스만 제국의 북진을 저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사실 1440년에 헝가리 귀족들이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 바르넨치크(Władysław III Warneńczyk)를 국왕으로 옹립한 것도 (바로 이전 포스트 참조) 바로 오스만 제국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헝가리 – 폴란드 동군 연합(같은 국왕을 모시는 두 개 이상의 국가 연합)이 들어선다면 오스만 제국의 북진을 막기 수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폴란드 귀족들은 헝가리와 힘을 합칠 생각이 없었으나 적어도 헝가리 귀족들의 희망은 그랬다)
한편 왈라키아의 상황은 이와 달랐다. 왈라키아는 이미 헝가리의 일부처럼 되어버린 트란실바니아와는 달리 독립을 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헝가리는 강대국이었으므로 부득이 왈라키아공은 헝가리 왕을 상위 군주로 모셨다. 그런데 오스만 제국이 북상하자 어쩔 수 없이 오스만 제국에도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블라드 2세는 어느 쪽을 택하기가 매우 애매한 상황에서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박쥐 같은 외교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비록 이미 용기사단에 입단해서 황제와 기독교 세계를 지키기로 맹세하긴 했지만, 사실 이것도 왈라키아의 군주 자리를 둘러싼 내분에서 지지를 얻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맹세를 지킨다든지 하는 일은 솔직히 그와 같은 약소국의 군주에게는 사치스런 일이었다.
6. 오스만 제국의 북상
블라드 2세가 왈라키아의 군주가 되던 시절,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무라드 2세(Murad II)였다. 술탄 메흐메트 2세(Mehmed II) 아버지인 무라드 2세는 아나톨리아 지역과 발칸 지역 모두에서 연거푸 승리를 거둬 유럽 국가들에 큰 위협으로 부상했다.
1440년에는 현재 세르비아 수도인 베오그라드(Belgrade)가 오스만 군에 의해 포위당했다. 당시 발칸 반도는 세르비아계 소국들로 분열되어 있었고 베오그라드는 헝가리 왕국의 남쪽 국경에 해당했다. 비록 베오그라드를 지켜내긴 했지만, 이 지역까지 오스만 제국이 치고 올라온 사건은 1439년 국왕 알브레히트 2세(Albert the Magnanimous)가 죽은 후 혼란에 빠진 헝가리 왕국과 기독교 사회에 큰 위협으로 생각되었다.
이 혼란의 시기에 블라드 2세는 무라드 2세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결정한다. 선제 지기문스트가 승하한 직후인 1437년, 블라드 2세는 오스만 투르크와 조약을 맺고 매년 10,000 두카트의 조공을 바치는 조건에 합의했다. 이는 물론 오스만 제국의 팽창에서 살아남기 위한 약소국의 비애였다. 기독교를 수호하는 용기사단의 맹세를 지키기에는 그와 그의 조국이 너무 위험했다.
한편 앞서 설명했듯이 1440년 초반, 헝가리의 야노스 훈야디는 오스만 제국의 북진을 막아내며 헝가리의 영웅은 물론 기독교 사회의 백기사(white night)로 명성을 드높이고 있었다. 1441년 훈야디는 현재 세르비아의 스메데레보(Smederevo)에서 이사크 파샤(Ishak Pasha)가 이끄는 오스만군을 격파하고, 1442년 3월 22일에는 트랜실바니아에서 메지드 베이(Mezid Bey)가 이끄는 오스만군을 궤멸시켰다.
훈야디는 오스만 제국을 압박하면서 공동의 방어 전선을 만들 목적으로 트랜실바니아 남쪽에 있는 (앞서 언급했듯이 훈야디는 트랜실바니아 공이다) 왈라키아의 블라드 2세에 압박을 가했다. 그에게 공개적으로 용기사단의 맹세를 지킬 것을 요구했지만, 어느 쪽 편도 들기 어려운 블라드 2세는 1442년 왈라키아를 통과하는 오스만 군대를 그대로 통과시켰다.
사실 그가 오스만 제국의 신하라면 오스만 군대에 합류해야 했고, 반대로 용기사단의 일원이며 헝가리 국왕의 신하라면 오스만 제국과 싸워야 했다. 하지만 어느 한쪽 편을 들면 반드시 반대쪽의 보복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는 애매하게 중립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442년, 오스만 군대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훈야디에 의해 궤멸되었지만, 이 사건 이후 블라드 2세는 양쪽 모두에게 의심의 대상이 된다. 당연히 블라드 2세의 충성심을 의심한 술탄 무라드 2세는 블라드 2세를 수도 에디르네의 궁정으로 소환했는데, 아버지의 부재 동안 미르세아 2세가 왈라키아의 군주가 되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한편 훈야디는 블라드 2세와 미르세아 2세 대신 친 헝가리파를 왈라키아 군주로 세우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그가 내세운 대항마는 단 2세(Dan II)의 아들인 바사라브 2세(Basarab II)로 물론 드라큘파와 반대파인 단파(다네스티) 계열의 군주이다.
1443년 왈라키아에 침공한 훈야디는 미르세아 2세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바사라브 2세를 앉혔다. 이와 같은 행동은 왈라키아 입장에서는 외세의 간섭이지만, 헝가리와 훈야디의 입장에서는 자국을 방어하기 위한 애국적인 행동이었다. 아무튼 외세에 의해 세워진 바사라브 2세는 오래 자리를 지키지는 못했다.
술탄에게 자신의 충성심을 보여주러 간 블라드 2세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지위를 다시 탈환했다. 하지만 사실 블라드 2세의 자리는 매우 불안했다. 만약 헝가리가 다시 세력을 팽창하게 되면 아무래도 자신은 무사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오스만 제국 역시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자신은 용기사단의 일원이고 자신을 비롯해 왈라키아인들 역시 기독교인들이기 때문에 오스만에 조공과 군사를 바치면서 다른 기독교 국가들과 싸운다는 것도 꽤 부담되는 일이었다.
이렇게 아버지가 고생하는 동안 차남인 블라드와 삼남인 라두는 약소국의 왕자로 태어난 탓으로 볼모로 보내지게 된다. 1442년, 술탄의 궁정으로 간 두 형제는 한동안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1448년 왈라키아로 돌아올 때까지 미래의 블라드 드라큘라 (블라드 3세)는 감수성이 예민할 사춘기 시절을 부모와 떨어져 볼모 생활을 해야 했다. 아마도 이때 겪은 일이 그가 나중에 보인 잔인성과 연관성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한편 1443~1444년에는 어쩌면 이들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었던 큰 사건이 발생했으니, 앞서 설명한 바르나 십자군이다.
7. 바르나 십자군의 시작
중세 시대 역대 교황들은 다양한 형태의 십자군을 주도했다. 물론 이 십자군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성지 예루살렘을 수복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바르나 십자군이 일어난 15세기 중반은 이미 마지막 십자군 요새가 바다로 밀려난지 1세기 반이 흐른 시점으로 이 시기에는 더 이상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같은 것을 논의할 상황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장 오스만 제국이 유럽을 압박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유럽 세계는 오스만 제국의 유럽 진출을 막기 위해서 니코폴리스 십자군을 일으켰으나 1396년 충격적인 패배로 말미암아 한동안 유럽에서 다시 십자군을 조직하기 힘든 상황에 이르렀다. 하지만 유럽 국가들에게는 천만다행으로 티무르의 오스만 침공 이후 오스만 제국이 내분을 겪어 한숨은 돌릴 수 있었다.
오스만 제국이 내분을 수습하고 다시 유럽으로 치고 들어오자 다시 유럽 사회가 긴장하게 된 것은 당연했다. 특히 헝가리처럼 바로 옆에 있는 국가는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한편 1431년 즉위한 교황 에우제니오 4세(Pope Eugene IV)는 십자군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마침 1440년대 초반은 이를 위한 적절한 시기인 듯했다.
헝가리에서는 내전이 마무리되어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 바르넨치크(Władysław III Warneńczyk)가 국왕 자리에 올라 현재의 동유럽 상당 부분을 장악한 폴란드 – 헝가리 동군 연합을 결성했다. 또 헝가리에서 대오스만 전선의 최전방을 담당한 트란실바니아 공 야노스 훈야디는 1441년에서 1442년 사이 오스만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둬 사기가 올라 있었다. 여기에 비잔틴 제국 역시 교황과 서방 교회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도움 역시 기대할 수 있었다.
이에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1443년 1월 1일 교황 연두 교서에서 현재 오스만 제국이 매우 약화된 상태라는 (물론 희망 사항이지만…) 견해를 피력하면서 지금이 유럽에서 오스만 세력을 축출할 절호의 기회라고 역설했다. 교황이 이와 같은 희망을 품었던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자주 반기를 드는 카라만 왕조(Karamanids) 와의 협공을 기대했던 것이었다.
교황이 믿는 다른 한 축은 물론 헝가리였다. 사실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폴란드의 잠재적인 도움 역시 기대되었다. 새로운 국왕은 젊었지만 아무튼 오스만 제국을 저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도 큰 공적을 세울 의욕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국왕보다 군사적으로 더 믿음이 가는 쪽은 역시 대 오스만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훈야디였다.
훈야디는 오스만군을 상대할 독특한 전술을 발전시켰다. 훈야디는 후스파와의 전쟁에서 나왔던 마차를 이용한 이동 요새 전법을 구사해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베겐부르크(Wagenburg)라고 불리는 이 전술은 여러 대의 마차들을 엮어 일종의 이동식 조립 요새를 만드는 것으로 그 기원은 종교 전쟁보다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이후에도 이와 비슷한 전술을 볼 수 있다.
일단 이런 식의 마차 요새가 생기면 기병으로도 쉽게 적을 공격할 수 없었는데 훈야디는 이 방식으로 우세한 병력을 지닌 오스만 제국과의 싸움에서 큰 피해 없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물론 반대로 이런 마차는 제대로 된 도로가 별로 없는 중세의 도로 환경과 산악 지형에서는 오히려 기동에 방해가 될 수도 있었으나, 대 오스만전은 대부분 방어하는 입장이었으므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렇게 훈야디가 연거푸 큰 승리를 거두자 유럽 세계는 다시 오스만 제국과의 전면전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여기에 오스만 제국의 팽창에 두려움을 느끼던 주변국들과 튜턴 기사단까지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정하면서 다시 유럽에는 범유럽 십자군이 형성되었다.
1443년 결성된 바르나 십자군(Crusade of Varna)은 헝가리군이 주축이 되었으며 여기에 폴란드, 리투아니아, 세르비아, 왈라키아, 몰다비아, 불가리아 반군, 튜튼 기사단, 교황청이 참여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병력 구성은 헝가리/폴란드/보헤미아 군이 약 15,000 정도의 병력으로 주축을 이뤘으며, 여기에 왈라키아 역시 주로 기병으로 구성된 7,000명을 보내왔다고 한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잡다한 병력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과거와는 달리 영국/프랑스/신성로마제국에서는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지 않았다.
이 전쟁에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부분은 왈라키아의 참전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왈라키아는 훈야디가 세운 괴뢰 정권 수반인 바사라브 2세가 축출되고 다시 미르세아 2세와 블라드 2세가 정권을 장악했다. 그런데 정권을 안정시키기도 전에 이들은 바르나 십자군에 참가하라는 압박을 받게 된다. 여기서 이들 부자는 기지(?)를 발휘했는데 블라드 2세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충성을 지키면서 미르세아 2세가 군대를 이끌고 바르나 십자군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볼모로 잡혀있는 두 아들─블라드 드라큘라와 라두 미남공─을 생각할 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다행히 1443년에는 이런 연극이 어느 정도 통했던 게, 왈라키아에서 많은 병력을 파견했으므로 십자군에서도 뭐라고 말할 처지도 아니었고, 무라드 2세도 당시에는 평화를 고려하는 중이어서 인질을 살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8. 바르나 십자군의 진행
1443년 바르나 십자군의 초반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비록 카라만 왕조와는 협공은 실패로 끝났지만, 십자군의 초반 진격은 성공적이었다. 십자군을 맞이한 오스만의 지휘관인 카심 파샤(Kasim Pasha)와 그의 동료인 투라한 베이(Turahan Bey)는 자신들의 기지를 포기하고 불가리아의 수도인 소피아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냥 도망만 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가는 길에 있는 모든 마을과 식량을 모두 징발하거나 불태웠는데, 적이 대병력을 이끌고 원정을 온 만큼 장기전에 버티기 힘들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오스만군은 점차 십자군을 안쪽으로 끌어 당겼는데, 이는 십자군에 승리에 대한 환상을 심어줬던 것 같다.
결국 1443년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기 시작하자 문제가 심각해졌다. 충분한 월동 준비가 어려웠던 십자군은 곧 겨울의 혹한을 적진에서 버텨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십자군은 1443년 크리스마스 직전에 불가리아의 즐라티차(Zlatitsa)를 지나면서 오스만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매우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다만 이 전투 이후 십자군은 이전의 패배를 설욕할 기회를 얻었는데, 드라고만(Dragoman)에서 마흐무드 베이(Mahmud Bey) 가 이끄는 오스만군을 격파하고 그를 포로로 잡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사실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오스만군보다는 십자군의 피해가 더 막심했으나 이와 같은 성과는 십자군에게 승리에 대한 믿음을 가져왔다.
따라서 1444년, 다시 헝가리로 귀국했을 때, 헝가리군은 무라드 2세의 휴전 제의를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반면 은퇴를 고려 중이던 무라드 2세는 십자군, 특히 헝가리의 국왕과의 휴전을 간절히 희망했다. 결국 1444년 상반기에 사절들이 서로 오가는 가운데 평화 협상의 가능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국왕은 곧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교황의 특사인 추기경 줄리앙 세자리니(Julian Cesarini the Elder)는 국왕을 강력하게 압박했다. 교황이 원하는 것은 1444년에도 십자군을 계속 진행하는 것이었다. 만약 이를 거절한다면 국왕은 국내외적으로 강한 압박을 받게 될 뿐 아니라, 계속해서 헝가리 왕위를 요구하는 유복자 라디슬라우스(Ladislaus the Posthumous) 지지자들에게 명분을 제공할 위험도 있었다.
참고로 라디슬라우스는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프리드리히 3세(Frederick III)의 보호 아래 있었다. 황제가 그를 보호한 이유는 사실 라디슬라우스의 왕위 계승권 때문이었는데, 아무튼 브와디스와프 3세가 조금만 약점을 보이면 황제가 움직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폴란드 – 헝가리 국왕이란 자리는 명칭은 멋있지만 사실 귀족들에 의해 세워진 만큼 그 위치는 생각보다 불안했다.
결국 1444년 8월 15일, 양국 간의 평화 협정이 맺어지긴 하지만 이 평화 협정은 잠시 후 휴지조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바로 술탄 무라드 2세이다. 술탄은 독특하게도 이제는 평화와 휴식을 진정으로 원해서 카라만 왕조 및 헝가리와의 평화 협정이 맺어지자 왕위를 아들인 메흐메트 2세에게 넘기고 자신은 은퇴를 선언했다.
그런데 아직 어린 술탄이 왕위에 오르자 헝가리에서는 이를 오스만 제국을 공격할 절호의 기회로 여기게 된다. 그리고 정통성 없는 통치자가 없는 정통성을 마련하려면 전쟁만큼 좋은 방법도 없었다. 결국 무라드 2세의 양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브와디스와프 3세는 성경과 코란을 걸고 한 맹세를 헌신짝처럼 던져버리고 다시 십자군을 일으켜 오스만 제국을 침공한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9. 바르나 십자군의 위기
사실 헝가리군과 브와디스와프 3세는 재앙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매우 여러 차례 있었다. 어쩌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신의 손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비극의 주인공들처럼 이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모든 구원의 손길을 마다하고 죽을 곳을 찾아 사지로 뛰어들었다.
일반적인 가정이긴 하지만 보통 공격 측은 방어 측에 비해서 훨씬 유리한 전력을 가져야 한다. 일단 방어하는 입장이 더 유리한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침공하는 측은 적국에서 싸워야 하는 만큼 일단 더 불리함을 안고 시작하는 셈인데, 예외도 있기는 하지만 우세한 전력을 지닌 침공군이 열세인 방어군에 패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데 사실 1444년 당시 바르나 십자군은 별로 좋지 않은 상황에 놓여있었다. 무엇보다 전년도에 입은 피해가 완전히 복구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십자군의 전력은 본래부터 오스만군에 비해 열세였으나 1444년 침공 시에는 더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1443년 당시 오스만군이 보여줬던 지리멸렬한 대응 때문에 바르나 십자군은 상황을 오판하고 적지로 뛰어들었다.
이들은 나름 믿는 구석이 있기는 했는데, 그것은 술탄 무라드 2세가 은퇴하고 아직 소년인 메흐메트 2세에게 양위를 했다는 것이었다.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지닌 술탄이 부재한 상황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처럼 여겨졌기에 바르나 십자군은 맹세를 어기고 오스만 제국을 침공했다. 그러나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이런 상황에서 무라드 2세가 안락한 은퇴 생활만 즐길 리는 만무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술탄 메흐메트 2세는 바로 아버지에게 사자를 보내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한다. “당신이 아직 술탄이시라면 당장 와서 적을 물리쳐주십시오. 만약 술탄이 아니라면, 내가 술탄으로써 명하니 군대를 이끌고 적을 물리쳐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무라드 2세는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술탄의 자리에 올라 군대를 지휘했다. 카라만조와의 평화 협상은 아직 유효했기 때문에 무라드 2세는 십자군에 대해서만 전력을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따라서 1444년의 상황은 여러모로 오스만 측에 급격히 유리해지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면 이제라도 빨리 발을 빼는 것이 현명한 일이겠지만, 인간이란 항상 현명하지만은 못한 게 사실이다. 일단 십자군의 대의와 헝가리 수호라는 명분을 내건 이상 아무 성과 없이 그냥 후퇴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꾸물거리다간 적국에서 우세한 병력에 둘러싸여 겨울을 견뎌야 하는 심각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었다.
이 시기보다 조금 앞서 왈라키아의 블라드 2세는 오스만 제국으로 호기롭게 침공한 바르나 십자군을 직접 만나 이야기할 기회를 가졌다. 이를테면 주요 지휘관급을 모아서 회의를 하려 했던 것인데, 왈라키아 역시 병력을 제공했으므로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은 십자군의 병력을 본 블라드 2세는 실망과 우려 섞인 표정으로 이와 같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지금 당신들이 전쟁에 투입하는 병력은 술탄이 사냥을 하러 떠날 때 투입하는 병력보다도 적다.”
아마도 블라드 2세는 결말을 어느 정도 예측했던 것 같다. 하지만 훈야디와 헝가리의 압박이 우려되었는지 아들 미르세아 2세에게 4,000명 정도의 병력을 주어 바르나 십자군에 계속 참전하도록 했다. 이 병력까지 합친 십자군의 병력은 대략 2만 명에서 3만 명이라는 설이 있다.
반면, 오스만 제국의 병력은 5~6만 명에 달해서 병력 면에 있어서는 오스만 제국이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여기에 홈그라운드의 이점과 명장인 무라드 2세의 지휘, 그리고 십자군이 조약을 파기하고 무단으로 자국을 침공한 데 따른 명분상의 이점 등, 오스만군이 이길 만한 조건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결국 그해 11월, 이제 술탄으로 복위한 무라드 2세는 모든 병력을 발칸 반도로 집중해 십자군을 포위할 수 있게 되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이제는 종교적 지휘관인 줄리앙 세자리니(Julian Cesarini the Elder)추기경 역시 빠른 후퇴를 할 것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1444년 11월, 발칸 반도 쪽의 오스만 영토로 깊숙이 진격했던 바르나 십자군은 빠른 속도로 퇴각을 결정하지만, 오스만 군이 바로 추격에 나섰다. 결국 이들은 지금의 불가리아의 흑해 연안 호수인 바르나 호수(lake Varna)에서 마주치게 된다.
10. 바르나 전투
1444년 11월 10일, 오스만군은 바르나 호수 북쪽으로 가는 길목을 막고 십자군을 포위했다. 바르나 십자군은 좌우로 바르나 호수와 흑해에 막혀 있어 헝가리로 귀국할 수 있는 통로는 오직 북쪽 길뿐이었다. (아래 그림 참조) 이런 상황에서 십자군은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매우 열세인 상황이지만 마지막 혈로를 뚫고 탈출을 시도할 것인가? 아니면 지형과 마차 요새를 이용해서 방어를 할 것인가? 전자는 승리의 가능성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문제가 있었고 후자는 결국 보급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고립되어 스스로 괴멸될 가능성을 자초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세자리니 추기경은 방어를 주장했고 일부 지휘관들도 여기에 동조했다. 반면 훈야디와 브와디스와프 3세는 이 의견에 반대했다. 훈야디는 탈출도 불가능하고 항복도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인 만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용감하게 싸워 명예를 드높이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아마도 이와 같은 주장을 한 이유는 항복할 게 아니면 싸워 이기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국왕이 총사령관을 맡고 훈야디는 자신의 부대와 왈라키아 부대를 지휘했다. 각 지역에서 온 다양한 출신의 부대들이 각자의 지휘관 밑에서 싸웠는데, 마차 요새로 적의 공격을 차단하면서 기병 전력을 이용해서 적의 주력, 특히 무라드 2세를 격파하는 것이 십자군의 계획이었다.
전투의 결과는 사실 뻔했지만, 실제 전투는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십자군은 우세한 오스만 군의 전력 앞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왕이 이끄는 본대와 훈야디의 부대는 전투의 중반까지 매우 잘 버티고 있었다. 마차 요새 역시 오스만의 경기병에 대해서 잘 버티고 있었다.
전투의 결과를 결정한 것은 왕의 실수였다. 위기에 처한 아군을 구하러 떠나면서, 훈야디는 왕에게 자신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했다. 하지만 왕은 정면에 놓인 무라드 2세의 천막을 보고 훈야디를 기다리지 않고 돌격을 감행했다.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에 무리한 결정을 내린 셈이었다.
브와디스와프 3세와 그의 500명의 근위대는 매우 맹렬하게 술탄의 중앙 부대를 향해 돌격했다. 예니체리를 격파하고 전진하는 용맹한 십자군 앞에 적수가 없는 듯했지만, 기적 같은 전진은 술탄의 천막 앞까지였다. 술탄의 천막 앞에는 구덩이 함정이 있었는데, 여기로 호기롭게 뛰어들어간 왕과 용맹한 기사들은 순식간에 형세가 역전되어 이제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
술탄의 충성스런 예니체리 전사들은 즉시 이들에게 달려들어가 칼로 난도질을 했다. 결국 왕은 목이 잘려 장대 위에 내걸리게 되었다. 한편, 본진으로 돌아온 훈야디는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마지막 충성심을 발휘해서 왕의 시신이라도 구하려고 술탄의 본진을 향해 공격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 정도 상황이 되자 이제 십자군은 와해되기 시작했고 남은 병력은 살기 위해 혈로를 뚫고 달아났다. 이 패잔병의 무리에는 훈야디는 물론 미르세아 2세도 있었다.
바르나 십자군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헝가리의 재앙으로 마무리되었다.
사실 이 사건은 승패와 관련 없이 볼모로 있던 두 소년─블라드 드라큘라와 그의 동생인 라두─의 생명을 크게 위협하는 일이었다. 아마도 바르나에서 십자군이 승리했다면 보복하는 차원에서 두 소년은 참수되거나 극형에 처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승리를 한 상황에서는 조금 다른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술탄은 블라드 2세가 박쥐처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승리한 지금 블라드 2세의 충성이 다시 자신을 향할 것이라는 점도 짐작했을 것이다. 따라서 아직 이용가치가 있는 두 소년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나중 일이고 당시에 소년 드라큘라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는 상상하기 쉽지 않다. 아직 어린 소년이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약속을 어기고 자신의 생명을 위험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잘 알았을 것이다. 이 소년은 아버지라고 해도 믿을 수 없고 생명의 가치는 매우 싸게 거래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 드라큘라 본인이나 혹은 동시대를 살았던 제삼자가 남긴 기록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당시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길은 없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드라큘라가 부모의 사랑을 확신하기보다는 세상은 믿을 수 없는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여러 가지 요소들이 아마도 우리가 나중에 보게 되는 드라큘라의 잔인성의 원인일지 모른다.
원문: 고든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