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사고 실험이다. 외부와의 어떠한 교역도 없고 그래서 수출도 없고 오로지 자급자족하는 내부 시장만 존재하며, 거기다가 그곳의 총생산은 하나도 변하지 않는 어떤 나라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이 나라의 전체 국민의 최대 효익을 달성하는 길은 모든 국민들에게 직장을 주어 안정된 고용을 보장해 주고 임금도 동일하게 주며 기업에게 최대한 세금을 부과하여 다시금 일반 국민들에게 재분배하는 방법일 것이다. 어차피 외부와 단절된 내수 경제이며 어떠한 요인도 생산성의 변화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최대한 전체 산출량을 균일하게 배분하는 게 최대 다수의 국민들에게 최대의 행복을 주는 데 가장 부합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시작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사고 실험의 예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 경제에서 완전히 자급자족하는 국가 경제단위는 없으며, 다소간의 대외 무역에 대한 의존에 자국 경제를 꾸려 나간다. 또한 전체 생산성은 여러 가지 정책과 법규의 방향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변동하는 게 실제 존재하는 현실의 모습이다.
그래서 만약 어느 한 국가의 주력 수출 상품에 대하여 외국에서 비슷한 품질이지만 더 싼 인건비를 기초로 한국 안팎에서 경쟁이라도 시작하게 되면 당연히 해당 기업들은 매출액과 수익 감소를 겪게 되며, 이것이 장기화되면 구조조정이 시작되고 더 심각해 지면 회사가 파산되어 문을 닫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기업 생산성을 뛰어넘는 지속적인 임금인상과 법인세 인상은 제품 가격 인상과 기업 수익 감소라는 결과를 초래하여 종국에는 총 생산성 향상에 필요한 기업의 투자 여력을 떨어뜨리고 된다. 결국 사고 실험에서나 존재하는 고립된 평형상태의 경제에서는 좋은 정책이 현실에 존재하는 열려있고 동적인 경제에서는 오히려 실업을 가속화하고, 총 생산량을 떨어뜨려 전체 국민의 효익을 감소시키는 역설적 상황이 초래되는 것이다.
거칠게 묘사한 이러한 현상이 바로 70년대 영미를 중심으로 한 서구 선진국에서 나타난 현상이며 일각에서 좋아하는 표현인 소위 ‘신자유주의’ 정책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이게 결코 부자들이 민중들에게 빵 한쪽이라도 더 빼앗으려는 탐욕과 음모에서 생겨난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지금 대한민국이 겪는 위기도 이와 비슷하다. 그동안 한국을 먹여 살려온 주력 수출 제품들에 대해 중국이 비슷한 품질에 더 값비싼 가격으로 맹렬하게 추격해 와서 수출 대기업들이 훅 가네 마네 하는 상황에서, 정규직은 무조건 늘리고 소득 관계없이 모든 노동자의 임금은 계속 인상해야 하고, 법인세는 더 내라고 한다는 건 되려 좋은 일자리를 더 줄이고 실업을 늘리며 경기침체로 인한 소득 감소로 전체 국민의 효익이 줄어드는 역설적인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그렇다고 지금의 양극화를 방치할 수 없으니 대안으로 임금 피크제나 법인세가 아닌 소득세 증세를 통한 재분배 강화, 공무원 연금 개혁을 통한 예산 조정 등의 방안이 나오는 것이지, 이게 무슨 단순히 재벌 기득권 이익 옹호해 주자고 나온 것만은 아니다. 만약에 법인세를 계속 인상하고 임금은 계속 올려줘서 국민들 삶이 계속 좋아질 수 있는 거라면 소위 복지선진국으로 불리는 북유럽에서는 왜 그렇게 법인세가 낮게 유지되며 노동 유연성은 그렇게 높고 거기다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급여 인상은 왜 그렇게 오랫동안 억제되었었는지 설명할 수가 없다.
법인세·임금 인상 논의를 넘어서서
게다가 기업들이 임금 인상을 억제하고 법인세를 적게 내서 낸 수익 전부가 우리가 알고 있는 재벌 오너들에게 돌아가는 것인 양 가정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고를 하니까 기업과 노동자가 제로섬 게임 관계로 가정하고, 허구한 날 법인세 인상, 임금 인상을 모든 양극화 해소의 대책으로만 내세우게 된다.
아주 소규모 기업이 아닌 이상 기업의 순수익은 고용 창출과 타 기업 매출을 일으키는 투자에 사용되거나, 아니면 추후 기업 손실에 대비해 유보금으로 은행 계좌에 보관 되어지거나, 마지막으로 남은 걸 수 많은 주주들에게 배당금으로 돌아가게 된다. 더군다나 그 주주들 중에는 평범한 월급쟁이들도 있다.
우리가 뉴스에서 자주 보는 대기업 재벌 오너 한두 명이 임금인상을 억제하고 법인세 덜 내서 더 번 돈을 모두 게걸스럽고 탐욕적으로 독차지하는 건 그냥 가상세계에 존재하는 판타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법인 기업을 운영의 편의를 위해 하나의 방편으로 가상 인격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진짜로 노동자와 이윤을 놓고 제로섬 관계로 대립하는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 간주한 19세기 자본주의 발생 초기의 일부 모습들이 남겨놓은 강한 잔상에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끝까지 가보면 그 배당금이라는 게 결국 주주들에게 가는 만큼 양극화를 어느 정도 완화 시키며, 동시에 경제적 성장과 활력을 계속 유지시키고 싶으면 사회적 합의를 통해 소득세를 점진적으로 올리는 방법밖에 다른 큰 뾰족한 방법이 없다. 그래서 북구 복지 선진국들이 법인세는 그렇게 낮으면서, 반대로 소득세가 그렇게 높은 것이다.(참조: “소득세 부담 낮고 법인세 부담 높은 대한민국“)
게다가 이 또한 오랜 시간의 대타협을 통해 어렵사리 구축한 시스템인 동시에 오직 장점만 있고 단점은 없는 유토피아도 아니라는 게 현재의 현실이다. 최근에 약간의 소득세 인상에서도 고소득자들 및 중산층들이 강하게 저항해서 취소시킨 걸 봐서는 이게 과연 한국에서 순조롭게 적용될지도 크게 의문시되는 상황이다.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양극화 해소는 정말 중요한 사회적 과제이며, 저출산과 경제 성장을 위해서도 반드시 완화해야 할 사회적 이슈이다.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한 논의에 있어 이제는 좀 수준을 높여야 진도가 나갈 수 있다. 진보 야권 일각에서 주장하는 오로지 법인세 인상, 소득과 상관없이 근로자 전부 임금 인상, 무조건 정규직 증가, 임금피크제 같은 기존 노동자의 이익을 침해하는 어떠한 타협이나 변화도 거부, 소위 실체도 불분명한 ‘신자유주의’ 무조건 반대, 이런 식의 다분히 현실보다는 믿음에 근거한 교리적 진보 노선에 대한 고집으로는 실질직인 재분배에 필요한 사회적 대타협 달성은커녕 유의미한 정치세력으로도 남아 있게 될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원문: 한청훤